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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4

   처음 내가 기사를 상대했을 때엔 청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상태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버로우 가문의 풍경뿐이었고 촉각이나 후각은 아예 기능하지도 않았더랬지.

   

   그래서 난 기사와 싸울 때에 오롯이 그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청각에 의존하여 싸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고생을 했을 뿐 거기에 적응한 순간부터는 손쉽게 기사를 쓰러트렸지.

   

   그 다음 전투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느 방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이 닫히며 시작된 전투에서도 청각 이외의 다른 감각은 무의미했으니.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내 코에 어떤 냄새가 파고든다는 것.

   

   그건 공기의 상쾌함이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의 편안함도 아니었고.

   

   차의 향기로움도 아니었으며.

   

   낡은 곳에서 느껴지는 칙칙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향취는.

   

   비린내였다.

   

   인간의 몸 안에서 흐르던 것이 바깥으로 새어나왔을 때 느껴지는 기분 나쁜 향취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냄새 때문일까.

   

   싸움에 집중해야할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엔 자꾸 두 기사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떠올랐고.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길게 늘어선 시체가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날 공격한 녀석들이 그리 강하지 않았단 거겠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어렵잖게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씨발. 진짜.’

   

   전투가 끝나고 멈추어 버린 저택의 풍경이 사라졌을 때.

   

   이번에도 그 곳엔 사람의 시체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건 시녀의 시체였다.

   

   검은 색 시녀복을 점차 물들여가는 진득한 붉은 색과, 박살이 나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지닌 몇 사람의 시체.

   

   난 그것들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뒤집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다.

   

   ‘자꾸 이러다간 목이 상해서 목소리가 안 나오겠는걸요?’

   <…여아야.>

   

   한참이 지나 쓰라린 목을 매만지면서 애써 태연한 척을 했더니 할배가 걱정스런 목소리를 냈다.

   

   에잉. 할배. 센스가 왜 이렇게 없어요?

   

   이럴 땐 목소리 안 나오면 좋은 거 아니냐면서 받아쳐줬어야지.

   

   하여간 이러니까 자기 동료한테 여자를 다 빼앗긴 거겠지.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 몇 번이나 이야기 하느냐!>

   ‘네. 뭐. 그러시겠죠.’

   <이 놈이 진짜!>

   

   그 다음으로 펼쳐진 전투에서도 타리키는 수작질을 부렸다.

   

   이번에 생겨난 감각은 촉감이었다.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질척한 액체의 감촉.

   

   중간 중간 내 발목을 부여잡는 힘없는 손의 감촉.

   

   필사적으로 날 가로 막는 무언가의 감촉.

   

   만약 그게 단순히 감촉일 뿐이었다면 난 애써 그를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 감촉은 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피냄새가.

   

   날 가로막는 사람의 냄새가.

   

   썩어가는 시체에서나 풍길 역겨운 냄새가.

   

   날 미치게 만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상처 없이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었던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약 몬스터가 조금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난 이미 바닥에 드러누워선 공포를 마주하고 있었을 거야.

   

   전투가 끝난 후.

   

   당연하게도 바닥엔 여러 구의 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지나간 풍경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방의 모습에 헛웃음이 샜다.

   

   참 신기한 건 그걸 마주했을 땐 위액이 역류하지 않았단 것이다.

   

   안에 있던 걸 모두가 뱉어서 나올 게 없는 건지.

   

   그새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위액을 뱉어내는 것도 꽤 고된 일이거든.

   

   방의 풍경에서 느릿하게 시선을 뗀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들어선 위 쪽으로 향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전투가 이어졌다.

   

   때로는 계단에서.

   

   때로는 어느 방에서.

   

   때로는 복도에서.

   

   몬스터들은 내 시각이 무력화되었단 사실을 이용해서 기습을 걸었고 전투가 한창 이어질 때면 항상 타리키의 악의가 내 주변을 둘러쌌다.

   

   버로우 저택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내 발 밑은 언제나 피로 이루어진 진창이었고.

   

   내 주변에 머무르는 정체 모를 사람들은 자꾸만 내 움직임을 방해하려 들었고.

   

   내 코에는 지옥에서나 느껴질 기괴한 향취들이 머물렀으며.

   

   전투가 끝날 때면 항상 내 주변은 연쇄살인마가 다녀간 것이 분명한 지옥도가 되어 있었지.

   

   그리고 그 풍경을 지나칠 때면 항상 내 걸음은 이전보다도 무거워져 있었고 말이야.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무렵 난 어느새 버로우 저택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왔나?”

   

   제발 이 곳이 보스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을 연 순간 방 한 가운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쓸데없이 진지하고 멋진 척을 하고 있는 중2병 환자.

   

   키는 크지만 키만 클 뿐 그 안은 텅텅 비어 있는 멀대.

   

   타리키의 사도.

   

   나크라드가 집무실 책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정확하게는 나크라드의 환영이라고 해야겠네. 저기에 실체는 없으니까.

   

   “그대를 위해 신경 써서 만들어 낸 던전은 어땠나? 재밌게 즐겨 주었다면 기쁠 듯 하다만.”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은 채 웃음을 흘리는 나크라드를 본 순간 등줄기를 타고 피가 솟구쳤다.

   

   “응♡ 재밌었어♡ 땅굴이 처박힌 히키코모리 악신의 창의력이 얼마나 허접한 지를 구경하는 건 말야♡”

   

   그래서 일단 목소리를 냈다.

   

   이게 나크라드가 준비한 함정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심지어 이게 진짜 보스룸인지 아닌지조차도 말이다.

   

   이 도발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도 추측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건 있었다.

   

   나크라드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으로 보아 이 녀석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크라드가 내 말을 듣고 있다면 타리키 또한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후환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그것보단 날 괴롭힌 개새끼들한테 보답해 주는 게 더 중요한 일이잖아?

   

   “솔직히 난 너희 좆밥들한테 아무 기대도 안 했어♡ 그도 그럴게 하나는 인간한테 처발리고 땅굴에 처박힌 좆밥 악신이고♡ 다른 하나는 참교육 당한 후에 질질 짜면서 도망친 좆밥의 사도잖아?♡ 당연히 형편없을 거라고 생각 했어♡”

   “이 년 지금…”

   “푸하핳♡ 근데 기대 이상이더라?♡ 너~무 허접스러워서 오히려 재밌었어!♡”

   

   중간에 나크라드가 반박하려 했지만 목소리로 찍어 눌렀다.

   

   메스가키 스킬의 보조를 받는 내 목소리는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 선명하다.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이 목소리를 뚫고서 말을 내뱉는 건 불가능 해.

   “오감을 빼앗아서 괴롭히겠단 도착증 환자 같은 발상에♡ 정면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정신을 괴롭히겠단 개허접 겁쟁이다운 생각에다♡ 이 말종 같은 짓거리를 하고도 얼굴을 들이밀고 도발을 하려 드는 뻔뻔함까지!♡ 이 정도는 해야 치졸한 좆밥 쓰레기랑 그걸 좋다고 따라하는 병신이 될 수 있는 거구나?♡ 나 진짜 감탄해버렸다니까?♡”

   

   도발에 넘어 온 나크라드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서지만 소리는 없다. 저 녀석의 몸엔 실체가 없으니까.

   

   “왜?♡ 때리려고?♡ 말로 못 이길 것 같으니까 폭력을 쓰려는 거구나?♡ 우와~♡ 나 또 감탄했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병신 같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거야?♡ 이게. 재능?♡”

   “가만 두ㅈ!…”

   “뭐해?♡ 왜 안 덤벼?♡ 아~♡ 이길 자신이 없는 거구나♡ 이 자그마하고 귀여운 여자애가 무서운 거구나♡ 그치?♡”

   “…”

   “풉♡ 쫄보 새끼♡”

   

   하. 그러게 왜 나한테 말로 싸움을 걸어?

   

   잘하는 거라곤 약한 사람 괴롭히는 것밖에 없는 인간말종 주제에 한심해서 진짜.

   

   나의 가소롭다는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일까. 나크라드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으음. 아무 보복도 안 들어온 걸로 봐서 여긴 진짜 보스룸이 아닌 모양이네. 무언가 준비되어 있는 곳이었다면 도발을 견디지 못하고 공격을 퍼부었을 테니까 말야.

   

   결과적으로 헛걸음을 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먼저 여기에 오길 잘했다. 나크라드 그 새끼 면상이 구겨지는 걸 구경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기지개를 키면서 버로우 저택의 지도를 그렸다.

   

   여기가 보스룸이 아니라면 남은 곳은 하나뿐이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버로우 가문의 사진 같은 정경은 무너진 지 오래.

   

   피와 시체로 가득한 풍경 아래에 빈틈은 존재치 않았으니 조심스레 움직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 끝에 도착한 장소는 나크라드가 만들어 낸 던전의 입구가 자리했던 장소였다.

   

   죽어버린 버로우 가문 장남의 방.

   

   망설임없이 그 곳의 문을 연 순간 내 앞에 초원이 자리했다.

   

   버로우 가문의 영지 뒤 편에 자리한 드넓은 초원.

   

   그 넓디 넓은 곳을 사용하고 있는 건 단 두 사람이었다.

   

   한 쪽은 채 열 살이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아이였다.

   

   자신보다 약간 큰 나무 창대를 휘두르는 남자아이의 얼굴에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옅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를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은 이미 성인식을 치렀을 것이 분명한 남자였다.

   

   남자아이가 가뿐히 휘두르는 창대를 피해내면서 칭찬과 함께 이런저런 조언을 전하는 남자에게선 분명 남자아이를 아낀단 마음이 드러났지.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만큼 저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게 정상일 터이다만 난 저들이 누구인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 곳이 버로우 저택을 배경으로 한 이상.

   

   그리고 내가 이 버로우 가 장남의 방문을 열고 초원에 발을 디딘 이상.

   

   두 사람의 정체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작은 쪽이 자칼 버로우.

   

   그리고 큰 쪽은 이미 죽어버린 자칼의 형.

   

   아아. 그러니까 형에 대한 기억이 미련이 되어 이 던전의 쐐기를 담당하고 있는 거구나?

   

   하여간 누가 형 없인 못 사는 찌질이 공자 아니랄까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전투를 준비했다.

   

   메이스를 다시 잡고.

   

   방패의 끈을 꽉 붙잡은 후.

   

   신성을 몸에 두른다.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여기까지 달려온 탓에 멀쩡한 부분보다 망가진 부분이 더 많기는 하다만.

   

   괜찮다.

   

   자칼 이 새끼의 면상에 주먹을 꽂을 수 있다면 이 정도 패널티야 감수할 수 있지.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즈음 버로우 가문의 형제가 대련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 쪽에 꽂힌다.

   

   “거기. 누구지?”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날 보며 다가오는 버로우 가문 장남과 겁에 질린 채 그 뒤에 숨어 있는 자칼 버로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스전이 대충 어떤 형식일지 감이 왔다.

   

   여태까지 이 던전이 내 정신을 갉아먹으려 노력했단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떤 결말을 준비했을지야 뻔하지.

   

   “대답해라!”

   

   모든 걸 추측할 수 있으니만큼 이 보스전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도 대충 보인다만.

   

   됐어.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어쩔 건데?♡”

   

   일단 좀 패고 생각하자.

   

   내 속에 쌓인 게 좀 풀릴 때까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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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_521님 100코인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루 늦게 감사인사를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후원을 드린 날 바로 감사인사를 드렸어야 했을 터이나 제가 미숙했던 탓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나 독자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후원을 받았을 때 제가 느꼈던 기쁨만큼은 진짜였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 드리고, 동시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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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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