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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5

    <275 –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쏟아지는 빗줄기에 세탁바구니로 빨래를 걷는 손길이 한층 급해졌다.

     

    ‘너무 들뜨지 마. 바보 에이프릴. 주변에서 조금 잘 대해준다고 우쭐거리면서 본분을 잊어버리면 안 돼.’

     

    재단의 스파이라도 메이드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으면 근무평가가 떨어지고 일자리에서 해고된다.

    쓸모를 다한 스파이의 처분은 당연지사.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빨래를 걷는다.

    이 단순한 일조차도 에이프릴에게는 목숨이 걸린 진지한 일이다.

     

    클린마법이 새겨진 마나보드 위에 세탁바구니와 세탁물을 올려놓기만 해도 청소가 되는 세상.

    마석을 사용하지 않는 손세탁은 별도의 마나술식이 새겨져있어 술식 간의 간섭현상이 일어나며 파손될 우려가 있는 고가의 세탁물을 대상으로 한다.

    세심한 세탁은 당연이고 도중에 생긴 파손은 에이프릴의 봉급에서 까인다.

    만일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파손이 발생해서 재단의 지원금을 받아야 한다면 그녀를 향한 재단의 시선은 더욱 가혹하게 바뀔 것이다.

     

    ‘한 번의 실수조차도 치명적인 지령으로 되돌아오는 조직이 와이히엠하이 재단이야.’

     

    세상은 수인여자(아님)에게도 친절한 안데르센 대공자나 재단의 말단 스파이에게도 관대한 수석장학생 오크노디처럼 상냥한 사람만 있지 않다.

    그녀가 보고 겪어온 세상의 크기에 비하면 안데르센과 오크노디의 비중은 아직 턱없이 작았다.

    그 작은 사람들에 비하면 보다 그녀에게 친숙한 기척이 진흙탕 위로 발소리를 내었다.

     

    찰박.

     

    걸음소리 하나에 뇌가 빠르게 정보를 분석한다.

    발의 무게중심은 왼발에 치우쳤으며 걸음을 내딛기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1초.

    한 번 걸음을 내딛으면 망설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기계적인 도살자의 걸음.

    기억에 있다.

    그녀의 밑에서 이런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자쿠 1년생.”

    “메이드의 본업인가. 귀찮겠군.”

    “지금은 메이드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용건이 있다면 나중에 들러주시길 바랍니다.”

     

    평소라면 그녀가 용무를 마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거나 지령만을 회수해갔을 자쿠였다.

    그러나 오늘의 자쿠는 변치 않는 암묵적인 약속대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도망쳐라.”

    “…의미를 모르겠군요.”

    “재단의 새로운 꼬리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제 키보다 커다란 세탁물을 품에 안았던 에이프릴이 세탁바구니로 향하던 손을 멈칫했다.

     

    “함정입니까?”

    “꾀어내기를 요구받았지.”

     

    쏟아지는 빗소리가 한층 더 짙어졌다.

    차오르는 빗물에 두 사람의 신발이 조금씩 진흙탕에 잠겼다.

     

    “재단의 결정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죽을 각오로 암흑마나에 몸을 던졌던 당신 정도의 사내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도 재단의 새로운 꼬리에게 환심을 살 기회를 놓치고 버려진 꼬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나쁜 아이에게 잘못된 버릇이 들었지. 불필요한 오지랖을 부리는 버릇이.”

    “죽을 겁니다, 당신.”

     

    에이프릴은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고치지 못하면 다음은 당신의 차례입니다.”

    “참고는 해두지.”

     

    세탁물 너머, 보이지 않는 얼굴임에도 에이프릴은 자쿠가 차갑게 웃으며 귓등으로 흘려듣는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남자였다.

    안데르센만큼은 아니어도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이다.

    그러니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전언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강아지수인에게 전해주세요. 메이드일이 서툴러도 해피는 착하고 감이 좋으니까 얼마든지 다른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죽을 작정인가?”

    “제가 가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당신을 포함한 1학년 장학생 일동이.”

     

    그 중에는 오크노디도 있다.

    신세 진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다.

     

    “저를 유인하기로 한 장소로 안내해주십시오.”

    “…정말 바보 같은 여자군.”

     

    자쿠는 에이프릴을 이끌고 프라이머에게 전해 들었던 약속장소로 향했다.

    빗소리가 짙어지며 체온을 빼앗긴 몸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정말 허접한 메이드복이야.’

     

    먼지 따위로 더럽혀지는 티가 나지 않도록 색은 검고 천은 두꺼운 주제에 방수기능은 없다니, 역시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머지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시간도 이제 곧 끝이다.

    마음의 준비를 끝마칠 무렵, 걸음과 동시에 빗소리가 뚝 끊기는 것이 느껴졌다.

    외부와의 소리를 격리하는 소형방음구역.

    재단에서 표적을 제거할 때 곧잘 사용하는 암살준비물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이드 에이프릴.”

    “재단의 새로운 메이드는 인사성도 참 밝으시군요.”

    “순순히 이 자리에 온 것은 칭찬하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메이드가 아닙니다.”

     

    쏟아지는 비보다도 차가운 눈을 한 녹발의 여인이 비에 젖은 암녹색 머리칼 사이로 무감정한 눈동자를 열었다.

    품 안으로 들어간 손에 들린 것은 날카롭고 가느다란 세 자루의 장침.

     

    “저는 재단의 암살메이드. 제가 파견된 시점에서 기본전투훈련교육만을 이수한 청소메이드인 당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 마음을 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메이드 리프.”

    “…정보가 샜군요. 어디서 제 이름을 들었습니까?”

     

    기분 나쁠 정도로 냉정했던 얼굴에 일어나는 미약한 짜증.

    입을 막아야 할 인원이 늘어났다는 피로를 느끼는 얼굴에 에이프릴은 작게 실소했다.

     

    “애초에 당신을 이곳에 부른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상부에 전투메이드 지원요청을 보낸 것이 바로 저입니다.”

     

    두 메이드는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마치 사냥감과 사냥꾼이 조우한 광경.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습니까?”

    “그쪽의 ‘아가씨’의 부탁을 들었을 뿐입니다.”

    “…!”

    “리프와 조나를 만나고 싶어.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훨씬 더 자주. 그것이 오크노디 님이 제게 요구한 소망이었습니다.”

    “아가씨가 네게 무엇을 베풀었기에 이 정도의 각오를 품은 겁니까?”

     

    전투메이드 지원요청.

    에이프릴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재단은 같은 자리에 두 개의 꼬리를 심지 않는다.

    대신할 사람이 온다면 그녀는 처분 당한다.

    오크노디의 요청은 면전에서 그녀는 필요 없으니 당신이 죽어서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유능한 메이드를 불러달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에이프릴은 저질렀다.

    자신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을 지원요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보냈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가 발각된 꼬리는 어차피 빠르든 늦든 처분당할 미래를.

    그래도 오크노디에게 나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메이드의 근속연수는 평균 반년.

    후임자는 전임자의 얼굴조차 보지 못해 인수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전임자의 흔적을 보며 알아차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마음을 정리한 사람에게는 오크노디의 선고조차도 그저 올 것이 왔다는 생각뿐이다.

    그런 자신에게 오크노디는 허락했다.

    그녀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와의 교류를.

    안데르센 대공자의 상냥함을 겪을 수 있도록.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분에 넘치는 과분한 배려를 받았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리프의 무감정한 눈에 조금이지만 인정의 기색이 어렸다.

     

    “아쉽군요. 그 강인한 정신력이 아쉬울 정도로. 당신이 제 직속으로 들어왔다면 손수 전투메이드로 육성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게 받아드리죠.”

     

    이제 끝내라.

    여한은 없다.

    눈을 감고 조용히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에이프릴.

    죽음을 기다리며 그녀는 생각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암살메이드.

    암기를 날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프로.

    재단의 고위전투부대에게 죽는 것도 일개 청소메이드인 자신에게는 참 사치스러운 최후라고.

     

    챙!!

     

    그런 그녀였기에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는 놀라움은 더욱 컸다.

     

    “역시 안 되겠어. 널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다.”

    “…기어이 저질렀군요.”

     

    그녀를 이곳까지 안내한 자쿠.

    순순히 유인만 하고 돌아가야 했을 그가 리프의 일격을 쳐내며 재단에 명백한 적의를 드러냈다.

     

    “오크노디 님에게 진 빚은 그대로 떼어먹을 생각입니까?”

    “빚은 갚는다. 언제 갚을지를 정하지 않았을 뿐.”

    “쓰레기 같은 빚쟁이의 전형적인 표본이군요.”

     

    매도의 말과 달리 에이프릴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자쿠. 당신을 장학생으로 추천한 후견인을 봐서라도 한 번은 경고하죠. 재단의 처분작업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함께 처분하기 전에.”

    “웃기는 소릴 하는군.”

    “…당신이 고른 죽음입니다. 원망하지 마시길.”

     

    리프가 암기 대신 단검을 역수로 쥐고 돌격자세를 취했다.

    에이프릴의 앞을 막아선 자쿠의 등이 작게 떨렸다.

    명백한 실력차이.

    심상치 않은 강함을 피부로 느낀 결과다.

     

    “함께 죽어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면 되겠습니까?”

    “누구 멋대로 같이 죽으려는 거냐. 착각하지 마라. 너희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

     

    자쿠의 시선이 방음장막의 입구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리프와 에이프릴, 두 메이드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그곳에는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볼따구에 바람을 꽉꽉 채워 넣은 오크노디가 서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 착각의 끝을 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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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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