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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6

       “도착했어요.”

       

       포탈에 발을 들여놓자, 아렌스 대륙과는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나무는 가지각색이고, 야트막한 들판은 꽃으로 덮여있다. 맹수조차도 온순하게 행동하며, 날개 달린 요정들이 뛰노는 장소.

       

       정령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몽환적인 곳이었다.

       

       “마수로서는 당신이 1천 년 만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군요.”

       “정령들이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나요?”

       “아뇨, 정령은 단순해요. 최상급 정령이 말하면 상급 이하의 정령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죠.”

       

       시큐엘은 싱긋 웃으며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품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앨리스가 있었다.

       

       “당신의 언니는 최상급 중에서도 최고 서열에 위치한 전계정령. 정령들 사이에서 당신은 이미 아군으로 인식되었을 거예요.”

       

       이것 참 신기하다.

       

       정령에 의해 타락했었는데, 다시 돌아오는 것도 정령 덕분이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모양인가 보다.

       

       나는 시큐엘을 따라 더욱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심계(深界)에 해당해요. 여신님께서 직접 빚으신 장소라 마수의 몸으로는 견디기 힘들 수도 있어요.”

       “…그런, 가요.”

       “네. 벌써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그 말대로였다.

       

       심계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목에서 칼칼한 기운이 느껴지고, 입에서는 짠맛과 쓴맛이 동시에 감돌았다.

       

       무엇보다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솔직히 보통 마수는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고 쓰러지거든요.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격이 다르다는 거겠죠.”

       

       칭찬인지, 꾸중인지.

       

       아니면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착했어요.”

       

       정신없이 땅바닥만 보며 걷기를 수십 분.

       

       고개를 들자 폭포수 떨어지는 정경이 보인다.

       

       폭포 아래로는 커다란 정자와 함께 돌을 둘러놓은 자그마한 옹달샘이 있었다.

       

       “이곳이 정령의 샘이에요.”

       “…경치 죽이는군요.”

       

       나도 죽을 것 같고 말이다.

       

       시큐엘이 말하길, 이곳에서 24시간 몸을 담그며 여신에게 소원을 빌면 세상의 순리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준다고 하더라.

       

       가령, 죽은 사람은 되살리기는 어렵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비는 사람의 수명을 대가로 살려준다든지.

       

       기왕 도와준 거 조금 더 싼 값에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시큐엘이 말을 걸었다.

       

       “……저기, 안 벗으시나요?”

       “네?”

       

       잠깐.

       

       시발.

       

       “무얼 멀뚱히 쳐다보고 계세요. 목욕재계를 하려면 일단 옷을 벗으셔야죠.”

       

       그렇다.

       

       로테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샘에 들어가야 하고, 샘에 들어가려면 일단 알몸이 되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적진 한가운데서 나신으로 있으라는 소리였는데, 솔직히 남성의 자아가 섞여 있는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기행이었다.

       

       “친구 안 구할 건가요?”

       “…저, 옷 입은 채로 들어가면 안 됩니까?”

       “성수와 직접 살갗을 맞대어야 효력이 나와요. 의복을 착용한 채로는 안 됩니다.”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착실히 셔츠 단추를 풀어나갔다.

       

       “후우.”

       

       솔직히 로테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짓 하지도 않았다.

       

       “들어가시죠.”

       “네, 네.”

       

       정령의 샘에서 목욕할 땐 반드시 정령들의 주시가 있어야 한단다. 시큐엘은 멀찍이서 나를 관찰하겠다며 배려해주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은 건 나와 앨리스, 그리고 하급 정령 몇 마리가 전부였다.

       

       “와, 동생.”

       “조용히 해.”

       “…….”

       

       이제는 익숙해진 속옷까지 다 벗어서 정리해 둔 다음, 달빛이 떨어지고 있는 샘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울처럼 깨끗한 물을 통해서 내 모습이 비쳐 보인다.

       

       기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뽀얀 피부와, 지적할 곳 하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비율을 갖춘 여성적인 몸매.

       

       소녀로서의 자아도 분명히 존재했기에, 생각보다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

       

       사실 전라가 된 것보다 더 문제인 일이 있었으니.

       

       바로 샘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꺼려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마수의 본능이었다. 저기에 들어가면 진짜 안 된다고 온몸이 소리를 내지르는 중이었다.

       

       그래, 인간으로 치면 왕수에 몸을 담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지.

       

       “동생,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우리 시간이 많이 없어요.”

       “알아.”

       

       마왕이 부활했다.

       

       내가 이러는 동안에도 놈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겠지. 그러니 효율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그렇게 샘에 발끝을 담근 순간.

       

       찌릿, 하는 감각이 들더니 그대로 발이 타 버리는 감각이 들었다.

       

       “씹…!!”

       

       아프면 신음부터 흘릴 줄 알았는데, 정작 나온 건 쌍소리였다. 한국인 정서 어디 안 가는 모양이다.

       

       문제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발을 헛디뎠다는 점이다.

       

       풍덩!

       

       이끼가 자란 매끈한 돌 위에서 묘기를 부리던 나는, 중심도 잡지 못한 채 정령의 샘에 몸을 푹 담갔고.

       

       “아악, 씨발! 악, 악, 아아악!!”

       

       다른 정령들이 보는 앞에서, 추태를 보여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걸 수치스러워한다거나 할 여유는 없었다.

       

       “하악, 하악, 하악…!”

       

       염산을 들이부은 것처럼 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시큐엘이 미리 경고했던 대로 뒤지게 아팠다.

       

       “헉, 허억, 허억…….”

       

       머리까지 물에 잠겼다가 가까스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돌에 몸을 맡긴 채 숨을 고르고 있자니 앨리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동생?”

       “……전혀.”

       

       진짜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처음 몇 분은 너무 아파서 계속해서 쌍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욕하는 건 잠시뿐이었고, 기운이 다 빠지자 남은 건 신음뿐이었다.

       

       “크으으윽…….”

       “나가면 안 돼요. 친구를 살려야죠.”

       “그래, 그래야지…….”

       

       이미 나체가 되었다는 부끄러움은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

       

       이 좆같은 곳에서 24시간을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절망감만이 들 뿐이었다.

       

       

       **

       

       

       6시간 경과. 더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12시간 경과.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18시간 경과. 이젠 신음도 나오지 않았고, 몸에 감각도 점차 사라져갔다.

       

       이 와중에도 가능한 한 많은 기도를 드렸다. 종교와는 거리가 먼 내가 깍지 끼고 이러는 게 참 코미디였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놓고 말았다.

       

       “동생, 정신 좀 차려봐요.”

       

       24시간 경과. 기절했다가 일어나니 이 시각이었다.

       

       “…왜.”

       “오셨어요.”

       

       오셔? 뭐가.

       

       뭐가 온다고.

       

       “여신님께서, 메시지를 남기셨어요.”

       

       첨벙!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픔 따윈 잊어버린 채 고개를 쳐들었다.

       

       앨리스의 말마따나, 허공에 큼지막한 글귀가 쓰여있었다.

       

       [root@Le’Cuiness:~# 안녕하세요.]

       

       “……!”

       

       나타났다.

       

       여신 르퀴네스.

       

       지구에서의 나를 이 세계에 빙의시킨 녀석이자, 아렌스 대륙을 총괄하는 수수께끼의 존재.

       

       [root@Le’Cuiness:~# 제 말이 들리신다면 대답을 부탁드립니다.]

       

       “…들립니다.”

       

       [root@Le’Cuiness:~# 고마워요.]

       

       [root@Le’Cuiness:~#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은 건 논문 리뷰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신의 계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틀림없이 리눅스 기반의 계정이었다. 아무래도 지구의 컴퓨터를 통해 채팅을 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여신은 지구 사람이란 말인가?

       

       [root@Le’Cuiness:~# 당신이 무얼 궁금해하는지는 알겠네요.]

       

       [root@Le’Cuiness:~# 미안하지만 제가 누구인지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질문은 이 세상에 관한 것만으로,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지금은 르퀴네스가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로테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설령 나와 로테가 이 작자가 만든 세계 속의 장기말에 불과할지라도, 생각하는 나는 나로서 그대로 존재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생각이다.

       

       [root@Le’Cuiness:~# 훌륭한 자세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넘어가 보도록 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root@Le’Cuiness:~# 무엇을 바라시나요?]

       

       갑자기 ‘무엇을 바라느냐’라니.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여신이 내 속내를 읽을 줄 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괜히 퉁명스럽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면서 왜 물어보시나요?”

       

       [root@Le’Cuiness:~# sudo rm -rf /]

       

       시발 좆됐다.

       

       “잘못했습니다.”

       

       [root@Le’Cuiness:~# 농담이에요. 이걸 쓰면 저도 귀찮아지거든요.]

       

       [root@Le’Cuiness:~# 당신의 바람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대신 제 목적을 얘기해 줄까 해요.]

       

       이어서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는 르퀴네스. 채팅창 너머로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root@Le’Cuiness:~# 저는 위 명령어를 사용하지 않고 제 세계에 숨어든 악성 코드를 줄줄이 제거하고 싶어요.]

        

       “악성 코드라 하면, 마왕 말인가요?”

       

       [root@Le’Cuiness:~# 네, 사실 초반부 개발을 할 때 미숙한 점이 많았거든요. 잘못해서 탄생하고 말았는데, 지금까지도 안 잡히고 있어요.]

       

       그렇군.

       

       이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겠다.

       

       여신은 프로그래머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존재. 그런데 이 세계를 창조하면서 심각한 결함을 만들어 버렸고, 아예 파일을 지우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이 마왕인 셈이다.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계정에서 비슷한 ‘파일’을 복사&붙여넣기 한 거겠지.

       

       그게 다름 아닌 나였고.

       

       “결국 저를 트로이 목마로 이용한 셈이군요.”

       

       [root@Le’Cuiness:~# 네. 혹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여자의 자아와 남자의 자아를 동시에 가지게 되면서, 많은 고민을 거쳤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런 개같은 곳에 떨어져서 고통받아야 하는가. 집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내 집이 어디지?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답을 낼 수 있었다.

       

       “제가 어떻든 간에, 저는 접니다. 제 자유의지가 당신과 같은 방향을 원한다면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여신의 의도대로 되더라도, 로테는 살려내겠다.

       

       마수든 인간이든 엘프든, 나를 믿고 따라주는 사람이라면 미워하지 않고 똑같이 그들을 위해주겠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마왕을 멸하겠다.

       

       그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선택이다.

       

       [root@Le’Cuiness:~# 와.]

       

       여신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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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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