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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6

       “아니, 이제는 팬그리폰의 흑백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음, 그건 좀 이상하네요. 팬그리폰이라는 것도 결국 가문명일 뿐이지만…… 애초에 팬그리폰이라는 말 자체가 이명처럼 들리니까요. 말하자면 이명만 두 개 붙여 둔 것 같달까.”

        

       “어쩌면 조금 전에 실비아가 그리폰을 타고 있는 광경을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우리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앨리스가 드디어 끼어들었다.

        

       “팬그리폰이라는 이름은 옛 제국어로 그리폰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니까. 지배자라고 하기도 하고.”

        

       킁.

        

       엄청나게 크게 코 푸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리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마냥 식빵 굽는 자세로 앉아있는 주제에 고개는 또 꼿꼿하게 세운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거만해 보였다.

        

       아마 그 커다란 코 푸는 소리는 인간으로 치면 코웃음 소리 비슷한 것이리라.

        

       ……그나저나, 너는 집에 안 가냐?

        

       전투가 끝난 뒤에도 떠나지 않고 내 뒤쪽에 앉아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영 어색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날아가지를 말던가.

        

       혹시 내가 위험해질 때까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멋있게 등장하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신의 힘 때문에 만들어진 그 결계를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그 결계가 사라지고 나서야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쟤가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가 팬그리폰이라고 동의하긴 했잖아.”

        

       잠깐 말을 멈췄던 앨리스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실비아한테 붙은 팬그리폰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가문명이 아니라, 동시에 이명이기도 한 거라는 거지. 그러니까 흑백합이라는 이명을 또 붙이면 이명과 이명으로만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거고.”

        

       팬그리폰의 흑백합은 사람을 별명 두 개로 부르는 것과 같다는 소리다.

        

       “아뇨, 잠깐만.”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그 흑백합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대충은 알 것 같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그렇다. 애초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치고 넘어가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당신이 ‘그레이스 가’에 있을 때였죠.”

        

       “저는 그레이스 가의 아이였던 적이—”

        

       “어머, 당신이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얻어낸 이명이 아닌가요? 무도회와 연회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교계에 이름을 알렸던 당신이잖아요.”

        

       “…….”

        

       톡.

        

       실낱같던 희망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샤를로트는 품위 있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왜요, 제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렇게까지 선명한 건 아니지만, ‘분명하다’라고는 할 수 있을 정도로는 기억하고 있어요. 꿈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동시에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당연히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당연히, 그쪽 세상에서 기억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나, 클레어, 앨리스뿐이었으니까. 나는 여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도 했기에, 그리고 클레어는 여신의 힘을 찬탈한 사람이었기에. 앨리스는 그 가짜 앨리스의 영향으로.

        

       그쪽 세상에서 샤를로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친해지게 된 계기도 제국 사교계에서 나름대로 입지가 탄탄하던 나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비아.”

        

       앨리스가 나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의 힘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결계를 넘어올 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봐.”

        

       “…….”

        

       “그게 네 힘 때문이건, 아니면 여신이 의도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건— 적어도 그 결계를 통과했다는 건 한순간이나마 여신의 힘의 덕을 보았다는 거잖아.”

        

       어…….

        

       그렇다는 건, 설마.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쪽으로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내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이 각자 하던 일을 마치고 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어.”

        

       레오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떨어져 있던 클레어가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여신의 힘을 날려버렸던 그곳은, 사실 이 장소가 아니었잖아?”

        

       아.

        

       맞다.

        

       그래, 개념적으로는 이 장소가 아니었다. 여신이 급하게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 속이었으니까. 환상이면서도 현실인 어중간한 곳이긴 했다. 만약 그곳에서 여신의 힘이 여신에게 넘어갔다면 그 세상 자체가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을 거다. 여신은 그 짧은 순간에도 그걸 염두하고 그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내가 클레어와 함께 ‘계속!’을 외쳤던 곳은 그 환상 속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장치가 작동해서 여신의 힘이 날아간 곳은 이곳이 아니라 ‘그곳’이었다는 거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그 시점의 이전에 이미 여신의 힘의 효과가 끝났으니, 그 세상에서의 기억이 사라질 틈이 없었던 거다.

        

       클레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러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지금까지 유지하던 캐릭터마저 잠깐 잊을 정도로 당황한 나를 보고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그런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 태도가 너무나 평소의 클레어 같아서 순간 나는 내가 서 있는 이 장소를 잊을뻔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거의 완전히 똑같은 인생을 살았을 거 아니야. 언니랑 관련 없는 사람들은 그냥 데자뷰 정도만 느끼고 넘어갈 거야. 전쟁이 일어난 뒤의 일은 그냥 악몽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

        

       “…….”

        

       그, 그런가?

        

       “그리고, 그 일을 직접 겪었던 저조차도 당신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완전한 확신을 하지는 못했어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샤를로트가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뭐랄까, 어젯밤에 꾼 꿈 같다고 할까요. 희미한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선명한 부분이 있는. 특히 당신과 함께 있던 기억이 유독 선명해요. 그러니, 아마 당신이 걱정해야 할 부분은 당신과 직접 말을 섞은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씩 웃어 보이는 걸 보니, 샤를로트는 자기가 하는 말의 뜻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내가 그레이스의 흑백합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사교계에서 엄청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내 또래와는 말을 거의 섞지 않았지만, 제국의 중진이라고 부를 수 있을법한 나이 많은 귀족들과는 열심히 말을 섞고 다녔다.

        

       그렇다는 말은, 나와 그렇게 직접 말을 섞은 이들은 나의 그 별명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물론 조금 선명한 꿈 정도로 생각하겠지. 머리를 기르고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은 지금의 나의 모습과는 다르니까. 그 사람들한테 지보나 여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도 없고.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인식의 가장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 나의 별명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그레이스라는 이름이야 쉽게 떼어지겠지만—

        

       “……아.”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의 뇌는 다시 한번 정지되었다.

        

       그렇다.

        

       그 환상 속 세상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레이스 가의 딸이었다.

        

       그레이스 남작 부부는 나를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클레어가 어째서 그렇게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을 만큼. 그 사람들 눈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저 밑바닥 인생을 살던 고아였을 뿐일 텐데도, 딸로 받아준 뒤로는 레오와 전혀 차별하지 않았다.

        

       뭐, ‘딸과 아들’이라는 점에서 성적으로 구분하여 키우긴 했지만, 애초에 사교계를 열심히 돌아다니는 나는 여러모로 ‘모범적인 귀족 집 딸’이었다. 그런 식의 차별을 느낄 틈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레이스 남작 부부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부모와 딸 사이였으니까.

        

       관계는 원만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진짜 부모님처럼 느끼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이 관계는 그저 환상 속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선을 그었는데.

        

       “조만간 부모님께 다시 인사하러 가도록 하죠. 실비아 누님.”

        

       “…….”

        

       레오의 그 말에,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굳어지고 말았다.

        

       물론 레오의 그 말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지만, 동시에 진심이 담겨있는 것도 느껴졌으니까.

        

       ……그레이스 남작 부부와 부모와 딸 관계였던 것처럼, 레오도 나와 남매 관계였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정말로 자매가 된 거 아니야?”

        

       클레어는 진심으로 기뻐하듯 그렇게 말했고, 앨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옆까지 다가온 앨리스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부모님이 또 계신다면 인사 정도는 드려야지. 이 언니는 이해할 수 있어.”

        

       아니, 차라리 팬그리폰의 이름을 내세워서 하지 말라고 하라고.

        

       하지만 앨리스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앨리스와도’ 자매로 지내본 내가 잘 알았다.

        

       ……뭔가, 최종보스를 끝내고 나니 뒤에 더 큰 보스가 기다리고 있는 기분인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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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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