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76

       찰리는 올해는 엘라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신과의 약속을 계속 주지시켜 놓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돌아오고 나니 우체국에 가기는커녕 펜을 들 시간조차 없었다. 생일선물이야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찌어찌 보냈지만,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는 농담이 아니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다.

         

       학생 대표라는 자리가 원래 업무가 막중하기는 했다. 그러나 찰리가 맡은 해에는 일이 다른 때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그것은 바로 다음 해에 열리는 서커스 그랑프리 때문이었다.

         

       17년 만에 열리는 서커스 그랑프리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축제였다. 교수님들은 내년 5월 말에 있을 개막식에서 학생들이 최고의 축하 공연을 손님들 앞에서 펼치길 원했다.

         

       교수님들은 아예 시간표에 따로 단체 연습 시간을 박아 놓기까지 했다. 거기서 학생 대표인 찰리의 역할은 컸다. 그를 비롯한 학교의 최고 우등생들이 공연을 주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습을 끝내고 나면 그는 녹초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그가 엘라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졸업 과제 역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면서 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예선전을 준비할까 고민하고 있던 교수님들은 그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고는 그것을 시험의 바탕으로 잡기로 한 것이다.

         

       학교 전체를 레이스 장소로 활용한다는 발상은 사실 엘라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예전부터 그녀의 주도에 따라 각자 준비한 함정을 학교 주변에 깔아두고 장애물 달리기를 하곤 했었다.

         

       영광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가 맡은 일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일과시간을 마치고 학생회 간부들을 이끌고 학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경기장으로 배정할 장소를 조사하고 거기에 배치할 만한 장애물과 함정들의 아이디어를 수집해서 정리해야 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필 학교 내부를 제일 잘 아는 학생도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현장과 학생회실을 수시로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진행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교수님이 요구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그는 주말을 반납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중 철야를 하기도 했다.

         

       만약 그 모든 것을 그 혼자 감당했다면 그는 봄을 맞이하기도 전에 과로사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늘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의 단정한 차림새의 소녀는 2학년 수석인 클라라였다. 그녀는 자기 생활도 다 반납해가며 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왔다.

         

       “선배, 괜찮으세요? 잠시 눈붙이고 오시는 게 어때요?”

       “하지만 아직 정리해야 할 자료가 남았는데…….”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자, 어서요. 선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고요.”

       “알았어. 고마워, 클라라.”

         

       찰리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그녀와 붙어 다녔다. 그녀는 신입생 때부터 찰리의 자취방에도 찾아올 정도로 그를 잘 따랐다. 그러나 둘이 급격하게 가까워진 것은 함께 학생회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신체적 접촉도 빈번해졌다. 때로는 그녀가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기도 했고, 때로는 서로의 뭉친 어깨와 종아리를 마사지로 풀어주기도 했으며, 때로는 학생회실 구석의 간이침대에 서로 몸을 붙이고 자기도 했다.

       이 시기 찰리는 클라라에게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찰리는 때때로 그녀의 허리나 어깨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자신의 손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왠지 엘라에게 죄짓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클라라가 오히려 더 질척하게 달라붙는데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사실 몇 개월간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엘라였다. 보내준 과자는 친구들끼리 잘 나눠 먹었다는 답장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자신은 바빠서 편지를 쓸 시간이 없었다고 해도, 그녀 쪽에서 궁금해서 먼저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찰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개월이나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 그도 머리가 처음보다는 식었다. 그날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관계에 진전이 생겼다고 느낀 것은 자신뿐이었을까? 그녀는 조금도 자신과 함께할 생활을 떠올리며 두근거리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그녀는 지금까지의 합숙 생활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찰리는 최근에 레이나가 편지를 통해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 같아서 흔들리고 있었다. 엘라의 이런 무심한 태도는 그를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찰리는 오기가 치솟았다. 겨울이 지날 때쯤에는 시간이 났는데도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레이나와도 더 적극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신이 얼마나 잘난 남자인지 보여준다는 심정으로 시험의 중요한 부분 몇 개를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자랑했다.

         

       클라라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일부러 방치해버렸다. 솔직히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지, 체육계 학교 특유의 개방감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엘라에게 자신도 그녀처럼 다른 여자에게 무방비하게 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그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은 계기는 개막식이 시작하기 얼마 전에 고향에서 도착한 편지였다. 그것은 사부님이 보낸 것이었다.

         

       그분은 작년부터 계속 베가스의 병원에 묵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이 찰리에게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그가 학업을 마칠 때까지 아이들에게 편지를 부치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찰리는 엘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부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어서 기뻤다.

       그래. 그럼 그렇지. 뭔가 사정이 있었던 거지.

       찰리는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개막식의 공연은 훌륭하게 치러졌고, 첫 예선전인 6월의 아크로바틱 러시도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찰리는 예정대로 무사히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기존 수석 졸업생 25명으로 이루어진 ‘레카체프 25’의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 어차피 대회 시작 시점까지 6대 극장 관계자였던 사람은 곡예사로 활동할 수 없었다. 아마 들어가면 2년 동안 수습생으로 잡일만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런 걸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에겐 이미 갈 곳이 있었다. 그에겐 그녀와 함께하는 곳이 세계 최고의 서커스단이었다. 미련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있긴 했다.

       바로 클라라였다. 그녀는 졸업식 직전에 자신에게 고백했고 자신은 그것을 거절했다. 한때는 그녀에게도 일탈하는 것처럼 마음을 기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는 엘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편에 올랐다. 일단 베가스에 들러 사부님 병세를 살피고, 학교를 살펴주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엘라와 유랑곡예를 떠날 생각이었다.

         

       올해 7월.

       찰리는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서커스단을 하자고 약속했던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

         

         

       찰리는 부엉이의 눈을 통해 원더스타인의 방으로 들어오는 엘라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녀에게 들킬까 늘 조심하느라 한 번도 가까이서 보지 못했던 그녀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단장, 이제 출발할게. 고마워.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서.”

       “후후, 감사는 아르노 단장님에게 하시죠. 그분이 기자들을 유인해준 거니까요.”

       “당신 부탁을 받고 한 거잖아?”

         

       도시 반대편에 가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 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모든 신경은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1년 사이에 더 성숙해져 있었다. 키도 몸도 전보다 더 컸다.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전체적인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가 꿈에서나 바라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몽롱한 눈빛, 들뜬 웃음소리, 수줍은 몸짓. 그것은……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가 늘 상상만 해오던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레이나를 희롱했던 그 남자였다. 그녀는 뭐가 즐거운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입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뭔가 수작을 부린 걸 거야.

       놈은 레이나에게도 그랬잖아. 그 차갑던 레이나도 이상하게 만들었어.

       분명 엘라에게도 뭔가 한 걸 거야. 그녀는 나에겐 한 번도……한 번도……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따위.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즐겁게 말을 섞는 것 따위.

       그러나 수백 미터 밖에서도 먹잇감을 포착하는 부엉이의 시야와 눈은 그대로 방안의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연결을 끊어야 해.

       그는 마음은 그렇게 먹으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속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여자’로서의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원래 저기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놀다 올게. 아, 잠시만. 맞다. 떠나기 전에 약을 줘야지.”

         

       그녀의 말에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님이 만들어 주신 건가요? 어차피 이건 영혼에게 작용하는 거라 소용없을 텐데요…….”

       “괜찮아. 이것도 영혼에 작용하는 거니까.”

         

       엘라는 그러고는 기습적으로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찰리는 혼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정신이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입맞춤을 당한 상대는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의외네요.”

       “뭐가?”

       “제가 몸을 못 움직인다고 이때다 싶어 제 입에다 할 줄 알았는데요.”

         

       엘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거 아껴두는 거야.”

       “아껴요?”

       “응. 당신이 감히 확신했잖아. 내가 나중에 100% 후회할 거라고. 하지만 난 아니라고 믿거든. 뭐가 바뀌든 나는 당신에게 같은 말을 할 거야. 그때처럼.”

         

       엘라는 방 밖을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더니 노래하듯 속삭였다.

         

       “좋아해, 원더스타인. 진심으로.”

         

       찰리의 정신이 끊어졌다.

         

         

       ***

         

         

       부엉이는 주인의 목소리가 끊긴 뒤로도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금발의 남자는 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중간중간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이상한 움직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 때, 부엉이는 위층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푸른색 머리카락. 그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주인과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던 여자였다.

         

       인간의 음성 신호로 ‘클라라’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부엉이는 자신과 연결이 끊어진 뒤에 뭔가 특이한 것을 보면 전해달라는 주인의 명령을 기억해냈다. 그는 주인에게 돌아가 보고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때,

         

       “삐에엑!”

         

       퍽.

       공중에서 강하한 매 한 마리가 부엉이를 덮쳤다. 그의 부리가 그의 눈을 쪼았고, 그의 발톱이 그의 날개를 붙잡고 꺾었다. 부엉이는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새벽에도 보이던 부엉이군. 계속 근처에 있었던 건가? 길들이기를 이용한 감시일지도.”

         

       호크는 파도가 부엉이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것을 확인하고는 원더스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제법 잘 나시는군요. 그건 뭐죠?”

         

       그는 매의 발톱에 묻어 있는 피와 살점을 보고 말했다.

         

       “부엉이 한 마리가 달라붙길래 떨쳐버렸지.”

       “공중전까지 치르시다니. 이제 몸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군요.”

         

       원더스타인은 그에게 고기 몇 점을 건넸다. 배를 채운 그는 다시 날개를 펼치고 밖으로 날아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크리슴 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