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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6

        

         에나마의 광견, 아마기 가문의 왕권 찬탈자.

         남자들은 ‘흠, 그 정도인가….’ 하며 팔짱 끼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기묘하게 여성 유저 팬 층은 두터운,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눈 돌아가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줄 아는 또라이 도련님.

         

         게임에서야 얘가 사람되기 전에 얼마나 막 나가고 대화 도중에 특정 지문을 골랐을 때 얼마나 기발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절절하게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시간과 세계를 되돌리며 등장 인물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플레이어였으니까.

         

         하지만 직접 만난 에다마츠 아마기는 훨씬 유약하고… 외로운 걸 감추는 것도 서투른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게 보여서.

         끝까지 보살피며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닐진대, 비 오는 날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줍는 기분으로 경박하게 접근한 건 이젠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내 잘못이긴 하다. 음.

         

         헌데 여태 머리로만 알고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했지, 내가 몸소 체험한 건 짓궂지만 어디까지나 예의 바르며 나이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소년 같은 면모가 강한. 그저 쇼우라 불리기만 해도 기뻐하는 바보였는데.

         

         …기회가 생기자마자 냅다 달려드는 행태를 겪고 나니 조금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내부 평가를 하향 수정해야 할지도?

         

         아니, 별명이 개라고 실제로도 전혀 절제하지 못한다면 그건 숫제 짐승이지 인간이 아닌데요.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내키는 대로 저지를 수 있었다면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발치에다 권총 몇 방을 쐈어야 했다 이건.

         

         “하….”

         

         그래서 흡사 실내에 갯과 맹수…. 그 중에서도 늑대를 같은 공간 안에 풀어놓는 참담한 심정으로, 제로보고는 옆으로 비켜서 기다리라 부탁하고 들어와도 된다 허락한 건데.

         

         “……불편하시다면 이대로 얘기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얼굴을 마주볼 수 없는 건 저로서는 손해보는 기분이라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지만… 때로는 이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엥…? 무, 뭐?”

         

         이게 웬 걸,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나지막한 발소리가 다가오는 게 들리더니…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어… 얘 지금, 먼지투성이 복도에 주저 앉아서 문에 등을 기댄 건가? 진짜로?

         

         아무리 내 앞에서 허물없는 태도를 취하고 젠체하지 않는다 해도, 오가는 사람이 많은 탓에 더럽고 지저분한 맨바닥에 그냥? 막말로 저기 추적자라도 불러다가 인간 의자를 시켜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인간이 나 하나 비위 맞춰주겠다고 이러는 걸 보니 느낌이 참….

         

         – …나머지 경호 인력의 기척은 멀리 스튜디오 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정말 에다마츠 이사 홀로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

         

         “그으으래…?”

         

         말꼬리를 늘어트린 채 나보다 훨씬 예민한 센서를 보유한 제로에게 눈짓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문가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한들 달라지는 것도 없었고.

         

         내 곁에 제로가 딱 달라붙어서 스캐너를 번뜩이고 있는 걸 체험하고도 경호원들을 떼어놓고 돌아왔다 했으니, 아까처럼 갑자기 어떻게 덤벼들려는 것도 아닌 모양이고.

         

         정말 그냥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길 원해서 보란듯이 이런 스탠스를 취한 거라면… 정성은 충분히 인정해줄만 하네. 응.

         

         “아샤, 거기 계십니까? 어디로 몰래 나가시려고 벽이라도 파내고 계신 건 아니죠?”  

         “……정말 아쉽게도. 환풍구를 찾아내긴 했는데 워낙 좁아 터져서 내가 지나가긴 무리더라고.”

         

         이쪽이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고 있자,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게 무안했는지 쇼우가 드물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 왔기에.

         나도 비슷하게 돌려준 다음 슬금슬금 옷 무더기를 밀어 헤치곤 엄폐 장소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굳혔으니.

         털레털레 걸어가서 방금 전의 그와 똑같이, 문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기댄 채로 편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가 이 안쪽을 투시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이 정도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맞춰해줄 수 있는 예의라 여기고 취한 행동이지만, 약간 섣부른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그야 움직이는 기색이 줄줄 샐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이 탈의실은 방음 성능이 영 별로인 듯, 직전보다 이런저런 소리가 조금 많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들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멀리서 떠드는 스탭들의 잡담 소리가 일시적으로 잦아들면. 건너편에서 쇼우가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마저 엿들을 수 있을 수준으로 얇은 벽 하나만 두고 붙어있다는 실감이 났다.

         

         별 것 아닌 편한 거리감도 의미가 부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당연히 내가 들린다면 저쪽도 마찬가지로… 혹은 여러 임플란트와 육체 개선 시술을 받은 만큼 더욱 자세히. 내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는 인기척부터 옷자락 스치는 소리, 자칫 입술 깨물며 내는 미약한 신음마저 전부 들릴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이씨!”

         “크흡.”

         

         콩콩!!

         피부에 얽매이는 것처럼 내려앉는 공기와 오싹한 분위기를 모조리 떨쳐내고 싶어서 뒤통수를 마구 부딪히자 과연이라고 할까, 반대쪽에서 진동을 느낀 쇼우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달아 헛바람을 끊어 내뱉었다.

         

         너는 사람이 심란한 게 웃기냐 인마? 어? 웃겨??

         

         그래도 항의의 표시로 얼얼한 머리를 더 박아댈 필요는 다행이 없었다.

         사실상 각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서로의 옆에 나란히 자리한 셈이 되었다는 걸 인지한 그가 먼저 가슴을 터놓고 떠들기 시작했기에.

         

         “아나스타샤. 당신은 혹시, 제가 밉거나 싫으십니까?”

         

         “…글쎄, 딱히? 눈만 마주쳤다 하면 계속 능글맞게 웃고, 사사건건 느끼하게 구는 건 별로여도 싫어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반대로 괜찮다는 걸 그런 쪽으로 또 ‘좋다’고 확대 해석하지는 말고!”

         

         “하아.”

         

         만사를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질문에 무심코 대답하려다가 왠지 유도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황급히 뒷말을 덧붙이자 아니나다를까, 말꼬리를 잡을 여지를 미연에 차단당한 누군가가 아쉽다는 듯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게 얼핏 들렸다.

         

         어허,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이 헛나오는 걸 노릴래? 의도가 불순하네 아주.

         

         무슨 초등학교 애들끼리 다툴 때처럼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쪽이 유리해지는 것도 아닐진대 그렇게 건수 하나 잡는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생각하지만 말이다.

         

         ……아니면 설마 몰래 녹음이라도 하고 있다가 나중에 상호 동의했답시고 서류화해서 들이밀려는 건? 아니, 아니다.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억측이다.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메트로폴리스 DB에서 시민증 세부 사항과 가족 관계를 바꿔 써넣는 건 아무리 메가 코프여도… 어…… 일단 오늘부터 주기적으로 갱신하면서 조심은 해 둘까?

         

         “그럼 솔직히, 제가 취향에 맞지 않으신 건가요? 바이(Bisexual; 양성애)나 동성애를 선호하시는데 저는 안타깝게도 그 범위에 해당이 안 된다거나.”

         

         “푸흡!?”

         

         가벼운 탐색전에서 순식간에 더럽게 딥한 영역까지 단박에 뛰어넘은 대화 수위에.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서 넘어질 듯 뒤를 돌아봤지만 그런다고 뭐가 보일 상황은 아니었다 참.

         

         왜 이렇게 내가 만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들 남의 취향에 유독 관심이 많은 걸까?

         

         그야 서구권이나 엄청 사교적인 인싸들은 성경험을 가벼이 여기고, 마음이 좀 맞거나 내키기만 해도 시험 삼아 스포츠처럼 해보는 문화라는 걸 머리로는 알긴 하는데…!

         

         낭만을 비롯해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건 게임이 현실이 되어도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를 관통하는 대주제인가 역시?

         

         “물질적 조건으로 따지든, 다른 사회적 여건과 실체험을 고려하든지 간에. 저는… 이성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없는 만큼 당신에게 어떻게 더 다가가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연애나 미래 설계라는 분야에 있어서 아샤에게 저보다 나은 대안이 있다고는 차마 믿고 싶지 않기에 더더욱요.”

         

         

         지금 잘난 척하는 거냐고 한껏 쏘아붙일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털어놓는 쇼우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한없이 진지해서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정말 모르겠다.’고 상심해하는 게 팍팍 느껴졌다.

         

         성정체성… 이건 잊을만하면 제로도 가끔씩 물어보는 난처하면서도 난해한 질문인데, 정직하게 답변이 궁하다. 돌려줄 말이 마땅치 않다고 해야 하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꼭 능력의 발전이나 늘어나는 계좌 잔고가 아니더라도, 여러 측면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변화하고 정신이 신체에 깊이 적응하는 게 느껴진다 해도 좋으리라.

         

         굳이 철학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논지를 따지지 않아도.

         또 모든 기억이나 인과가 매끄럽지는 않을지언정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겪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이다.

         

         결국 그 과정(Input)들이 없었다면 나(Output)도 없는 셈이라는 거지.

         

         하여간 그래서 각설은 옆으로 집어치우고. 옛날 옛적, 호텔에서 헬레나와 일선을 넘을 뻔했을 때에 비해 업데이트된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의 개인적 의견을 밝히자면… 성적인 호기심은 충분히 있지만 연애는 여전히 좀…?

         

         남자로서 ‘신체적 욕구를 해소’하는 건 자연스럽고 익숙해도, 그걸 남과 함께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귀기까지 한다?

         

         …존나 어렵다. 그냥 따져봐도 어려운데 그런 곳에 한눈 팔만큼 여유롭지 않은 시기엔 더욱 무리다.

         

         엉? 사람이 연애도 좀 하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도 같이 할 수 있지, 뭘 그렇게 핑계 대면서 도망만 치는 거냐고?

         

         그 네오 헤이븐이라는 게임에 몰두하는 건 사실 굉장히 일방통행 성격이 강한 교류인 걸로도 모자라 시간을 엄청 잡아먹는 취미였거든요.

         

         게다가 대학 생활도 꽤 바빴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중간중간 규칙적으로 쉬기도… 군대도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어서….

         

         ….

         …….

         ……….

         

         시발! 그래!! 남자는커녕 여자도 못 사귀어 봤는데 이 꼬라지가 된 내 ‘취향’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너희들이 알기는 알아?? 어!?

         

         안 그래도 요즘 따라 우연찮게 성인 광고를 보게 되면 어느 쪽 알몸을 봐도 얼굴에 막막 피가 쏠리는 게 느껴져서 어지러워 죽겠는데, 왜 나도 모르는 걸 자꾸 알려달라는 강도 같은 놈들이 튀어나오는 거야!

         

         그리고 처음 해보는 일에 난색을 표하는 게 잘못된 거냐?!

         난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서 무작정 저질러 놓고 ‘난 이거랑은 안 맞나 봐~’ 할 수가 없다니까?

         

         “설마 미스터 드레이퓨스. 그 인간과 벌써 사귀고 계신다던가 하는 건….”

         

         “거 상상만 해도 막 속이 울렁거리고, 토가 쏠리는 기분이니까. 너를 싫어하게 될 것 같다고 아까 대답을 수정하기 전에 제발 단어 예시를 좀 조심스럽게 들어 줄래…?”

         

         “…죄송합니다.”

         

         고새 무슨 나쁜 가능성을 떠올렸는지, 다짜고짜 노란 비단구렁이가 연상되는 파라다이스의 인간 파충류를 끌어와서 내 옵션 목록에 추가하려 드는 쇼우를 제지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이 녀석아. 말 조심해. 걔는 뇌 어느 한 부분이 권모술수와 정치의 꽃밭에서 놀고 있는 쾌락주의 인격파탄자야. 사람한테 한 번 관심주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할 때까지 신나게 물고 늘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몇 가지는 잘 알았다.

         

         나는 아직 이 ‘다양한 방식의 교감이 강제되는’ 연애 사업 분야에 있어서는 흥미보다 거부감이 앞선다는 것과, 쇼우 얘는 아무리 자기가 밀어붙여도 상대가 안 넘어오는 답보 상황이 익숙지 않다는 것.

         

         따라서 내가 누구와도 사귈 마음이 없는 상태라는 걸 고지시킬 수 있다면 오늘은 그래도 얌전히 물러가 줄 가능성이 높다 보인다. …아마도.

         

         그럼 이제 남은 건 이걸 얼마나 잘 포장해서 전달하느냐… 이건데.

         

         비교적 온화한 단어와 문장을 최대한 열심히 고르는 와중, 멀리서 어느 직원분이 내지른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귀에 쏙 들어왔다. 가급적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내 뇌가 그걸 인지해버렸다.

         

         “꺄악—!! 어머어머, 어떡해! 테러리스트 놈들이 기어이 뉴스 룸까지 밀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나 봐요! 생방송 화면에 에린 아나운서님이 지금…!!”

         

         

         이런 미친, 뭐라고요. 아니, 그 언니. 이 난리통에도 대피 안 하고 라이브로 일하고 있었어? 프로가 짊어지는 무게가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소개팅(?)하는 도중에 냅다 옆길로 새어버리는 주인공.
    구경하기로 했지만… 또 한바탕 말썽에 발 담그러 갈 시간이네요.

    원래는 연재분 뒷내용이 끊어 올리면 많이 어색한 파트라, 오늘 조금 지각하더라도 연참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기침하는데 무슨 콜록콜록이 아니라 컹컹! 하는 개짓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상황이라 일단 쉬러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 주셔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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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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