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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7

        

         “그래서, 이게 오늘자 탑 토픽이야? ‘로보틱스 기업들의 늦장 대응에 지친 민간에서 기어이 바이러스 대책용 신규 백신 개발 성공!’ 이랑, ‘과도한 안전 지향적 직업 선호로 인한 소프트웨어 개발 시장의 블루 오션 재진입 신호?’ 라니. 진심? 정말로??”

         

         멘트를 비롯해 전체적인 진행 흐름을 미리 익혀 놔야 하는 만큼 대략적인 키워드와 포인트는 미리 알았어도.

         

         생방송 들어가기 직전에 직전까지.

         소스 유출 방지 명목, 거기에 숨이 턱밑에 찼어도 죽어라 구르는 게 방송국의 역사적 전통이라며 미뤄지던 최종 쪽대본 종이를 마침내 건네받은 에린 스컬리가 볼멘소리를 마구 쏟아냈다.

         

         “저번에도 얼핏 나왔던 얘기에 살만 붙인 거니까 특종도 아니고, 당연히 단독 보도하는 속보도 아니고. 재료가 글러먹었는데 분당 시청률을 대체 나보고 어떻게 유지하라는 건지…… 국장님이 분명 오늘은 꽤 흥미진진할 거라 호언장담했는데 이상하네.”

         

         “아하핫… 모건 국장님이야 뭐, 일단 철판 깔고 밀어붙이면 결국엔 된다는 무대포 스타일이신 거 알잖아~”

         

         날카로운 표정으로 꼭 짚어주라고 강조한 대목에 달라진 건 없나 빠르게 훑고.

         이따 모니터링 팀이 전달해주는 실시간 반응에 따라 적당히 재량껏 잡아 늘리거나 줄여야 할 부분은 듬성듬성 기억하며 조미료처럼 더해줄 문장들을 머리속으로 완성하고.

         

         자기 할 일이야 그렇게 빈틈없이 하고 있었지만. 같이 호흡을 맞춘 것도 하루이틀이 아닌 담당 PD는, 그녀가 속으론 ‘지금 나한테 짬처리 시키는 건가….’ 하는 불만이 피어오르는 걸 곧장 감지하고 달래 주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차라리… 누구 유명인 리얼타임 인터뷰라도 방송국 이름 팔아서 어떻게 못 따? 아까 봤는데, 무슨 기업 VIP를 실은 게 분명한 차가 착륙하는 걸 봤다며 호들갑 떠는 애들도 있는 건 알지?”

         

         “…보통 거기서 누가 올 때는 우리가 관심 가져서 좋은 일이 아니잖냐. 그리고 비즈니스적으로 상부상조하는 관계긴 한데, 거기 출신 중간 관리자들은 우리가 입만 열었다 하면 일거리가 늘어난다며 빈말로라도 사근거리진 않는다고? …아, 우리 스컬리 아나운서님은 또 연예인이라 들이대도 좀 봐주려나? 응?”

         

         이 정도면 어떻게, 삔또가 살짝 나갈 뻔한 간판 아나운서님의 기분이 풀렸나.

         

         탁탁! 하고 대본 뭉치를 뉴스 데스크에 쳐서 정리하는 걸로, 쓸데없는 아부하지 말고 각자 일이나 하자는 말을 건네는 에린에게 웃어 보이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PD는 뭔가… 뭔가 허전한 점을 고민하다가 눈치챘다.

         

         그녀의 기분이 안 좋을 때, 곁에서 멘탈 관리하던 허당 매니저가 왜 안 보일까.

         

         “헌데 그 베서니 매니저는 어디에 두고 혼자…? 아예 같이 들어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심한 배탈이라도 났나?”

         

         “걔는 정신적 충격 받는 바람에 기절해서 누워있어. 지지배 재수도 없지, 미모에 홀려 가지고 귀한 집 아가씨를 인형 마냥 데리고 놀다가 그만. …그러고 보니 그 아가씨 사연이라도 가십거리로 써먹을 수 있으면 꽤 재밌을 텐데 기껏 선배 노릇해 놓고 그렇게 써먹기도 뭐하고, 뒷감당도 힘들 것 같단 말이야.”

         

         “……?”

         

         이게 시방, 당최 뭔 소리래.

         직원이 과로로 기절하는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충격으로 쓰러져? 아가씨 얘기는 또 뭐고.

         

         마음 같아서는 밑도 끝도 없는 뜬금없는 혼잣말에 좀 더 어울리며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정말 생방송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기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카메라 뒤편으로 얼른 물러났다.

         

         닫혀 있던 메인 카메라의 렌즈가 열린 뒤 데스크 정면으로 예쁘게 정렬한다.

         

         뒷면 패널 확대가 필요한 경우에 사용하기 위한 서브 카메라들이 좌우 사이드로 빠지고, 룸 안에서 웅성거리고 소리지르면서 일하던 직원들도 잡음 차단 기능을 맹신하지 않은 채 정위치에서 대기.

         

         외야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가 아나운서에게 집중되며, 혹시라도 발생할 네트워크 동기화 오류에 대비해 별도로 설치된 0.1초 단위(ms)까지 안내하는 전자 시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아침 뉴스 라이브 녹화에 들어가는데까지 앞으로 3… 2… 1….

         

         “좋은 아침입니다! 네오 헤이븐 시민 여러분! 오늘도 안식처의 아늑함과, 인류 문명의 최전방이 주는 치열함에 다들 만족하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더위가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이맘때, 열사병으로 인한 노동자 피해 신고 건수가 어제만 약 23만 건에 달한다는 소식이…….”

         

         칼같이 돌아가기 시작한 녹화 사인, 토픽도 무난하고 아직은 분위기를 잡는 중인만큼 화사한 미소를 띤 에린 스컬리.

         

         이제 뉴스 룸에는 On-Air 사인이 표시됨과 동시에 가벼운 오토락이 걸려 주요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잠시 제한되었다.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펑…!! 투콰아앙——!!

         

         가벼운 오프닝 멘트가 지나가고 슬슬 메인 뉴스거리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에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심지어 그 중 한 개의 근원지는 가까워도 상상 이상으로 너무 가까웠으니.

         

         “콜록, 콜록… 크억!?!”

         “이런 개씨바 이게 다 뭔 일이야…!!”

         

         돌연 뿌옇게 피어오른 분진에 기침하는 환자, 날아온 차단문에 얻어맞아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의식 불명이 된 행운아, 와중에도 버릇처럼 마이크를 의식해 목소리를 깔고 욕하는 사람까지.

         

         터져 나간 뉴스 룸 입구와 난장판이 된 실내가 진정하기도 전에 노란색 해저드 슈트를 입은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허공에 위협적으로 소총을 갈겨대며 몰려들어왔다.

         

         “전부 엎드려 뜻을 받들라!! 방송 진행에 필요한 인원만 추후에 우리가 선별하겠다! 기계의 노예가 될 예정인 너희들에게 위대한 아르카디아에서 구원이자 해방의 길을 제시해주고자 친히 나섰으니 영광인 줄 알도록…!!”

         

         정당한 방식의 접근은 시도해본 적도 없는 종교 단체의 테러리즘(Terrorism).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위법 폭력 활동의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무장 경비원을 애타게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평소처럼 간단한 인원 통제 업무를 위해 뉴스 룸에 배치된 두 명 모두 문가에 있다가 도어 브리칭에 휘말려 심한 출혈과 함께 쓰러진 상태.

         

         거기에 스스로를 아르카디아라 지칭한 괴한들은 영악하게 로봇 격납고에 미리 들렸다 왔는지, 정작 내부 직원들을 지켜야 할 드로이드마저 몇 기나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정말 긍정적인 방면의 해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좋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을 억지로 꼽아보라면, 그들이 인질극을 벌이거나 방송국을 점거하기 보다는 방송을 타는데 더 관심이 많은 또라이들이었다는 게 아닐까.

         

         “거기, 에린 스컬리! 혹세무민을 일삼던 네년에겐 우리의 성명서 겸 포고문을 낭독할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기도록 하겠다. 그러니 거기 데스크에서 꼼짝 말고 이쪽 지시에 따라 움직이도록!!”

         

         

         

         ★ ☆ ★ ☆ ★

         

         

         

         시야를 반쯤 채운 사이버웨어의 방송 화면.

         

         본래 네오 헤이븐 지도, 생방용 배경 화면이 띄워져 있어야 할 후면 패널을 둥근 태양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 보통 한국인이라면 ‘저, 저저… 시발련이? 이거 완전….’ 하는 반응을 돌려줄 것 같은 아르카디아의 승천 문양이 새겨진 천조각이 가린다.

         

         나중에 본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데이터 칩의 내용에 따르면 사실 욱일기가 아니라 무려 구시대의 종교 문양 -유저 대부분이 통일교 모티브가 아니냐며 경악한- 중 하나에서 따왔다고 하는 만큼 어쩐지 미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가운데 초조하게 앉아있는 여성과 좌우에 라이플을 들고 위협적으로 시립한 복면 괴한 둘.

         

         메모리얼 타임즈의 아침 뉴스 코너가 영락없는 테러 방송으로 납치되는 꼬라지를 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 이익…!! 병신 머저리들아! 위쪽 건드리지 말라니까!? 그냥 망할 대본만 주면 알아서 잘 읽어준다니까, 머리채를 왜 잡으려 하는 건데! 니들은 말귀도 못 알아처먹냐! ]

         [ 무, 뭣?! 진짜 이 개미친 썅년은 겁대가리도 없나!! ]

         

         물론 아직까지는 몰래 카메라를 의심할 있을 법한 광경이 송출되고 있기는 하다만.

         

         저 언니, 진짜 배짱이 장난 아니다.

         

         들이닥친 사이비 친구들이 자기를 마스코트처럼 써먹을 생각이라는 걸 알자마자, 평소 이미지를 십분 활용해 오히려 바락바락 대들며 억지로 협조한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아니면 아까 한참 미용 기계로 지지고 볶고 해서 안착한 헤어스타일이 또 흐트러지는 걸 진짜 존나 짜증나게 여기는 거던가.

         

         그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와중이라 더 신경 쓰는 용기는 가상하긴 한데 조금만 더 몸을 사리시면 안 될까요? 보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하네 이것 참.

         

         하지만 나는 마냥 초조하게 사이버웨어를 쳐다보는 것 이외에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당장 눈앞에 산재해 있긴 했다.

         

         “그럼 아샤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깊은 관계를 맺는데 흥미를 가지시게 만들려면, 제가 과연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요. 부디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야, 너는….”

         

         쇼우 얘는 정말 인근에서 무슨 난리가 나고 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방송국이 위아래로 다 터져 나가도 나랑 이렇게 떠들 공간만 무사하면 괜찮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 들었다.

         

         당황한 티를 내지도 않았다.

         어차피 테러리스트가 쳐들어온 건 아까 주지된 사실인만큼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긴 한데… 정말? 아니, 진짜로??

         

         애정결핍과 여러 트라우마를 지닌 만큼 세상이 무너져도 한 사람의 애정만 갈구한다는 미친 결심을 내릴 위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왜 하필 그 대상이 이쪽이냐고요.

         

         짐작가는 바가… 솔직히 흘러 들어간 정보나 첫만남 때 너무 친근하게 접근한 정황상 있기는 해도! 너무 가까워졌다는 걸 자각한 이래로 내가 그렇게 막 잘 대해준 건 없다 생각하는데 말이다. 곤란하네.

         

         “…기대에 못 부응해서 미안한데 이건 내 문제야. 내가 겁나 이상한 인간이라 누구와 사귀고 자시고 할 상태가 아니라는 거니까, 네가 바뀐다고 딱히 뭐가 달라지진 않아.”

         

         “허면 옛말에,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바꿔주는 인연과 사귀라 하였으니. 아샤는 제가 바꿔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뭐 인마…!”

         

         와, 이 녀석 배운 사람이라고 말 번드르르한 것 좀 보게. 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그럴싸한 격언까지 끌어다가 의미 부여하는 게 어딨냐?

         

         가망이 없다 잘라 말하자마자 한술 더 뜨는 세상 느끼한 녀석을 정색하고 노려보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문이 가로막고 있어서, 기가 찬 소리를 들려주고 주먹으로 한 대 쿵 두드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반면 부정적이라도 내가 격하게 반응하는 게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문너머의 쇼우는 또 나지막하게 웃었고.

         

         아으… 머리 아파. 이러다 이 찰거머리 때문에 정신 나가겠어.

         

         정말 작정하고, 상대하기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강한 아론이라도 불러와서 한 번 삼자 대면이라도 해야 하나?

         

         …그건 좀 가혹한 처사인가? 아까도 이상한 망상을 하던 걸 보면 오히려 아론과 내가 같이 있으면 더 열 받아서 폭주할 가능성까지 고려할 경우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걸 어째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떼어 놓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홀로 고민할 시간은 충분치 않았고, 인간이 궁상 떠는 것에 지친 주변 상황은 이만 움직이라며 내 결단을 촉구하듯이 등을 떠밀었다.

         

         [ 이 씨발년이 진짜, 인류를 위한 해방 운동에 앞장설 영광에 감사하기는커녕 반항을…! ]

         [ AI가 불러온 거대 운석이 떨어져서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다 뒤질 거라는 멍청한 개소리 보단 훨씬…… 꺄악!! ]

         

         쿵!

         

         장렬한 기 싸움 끝에 결국, 줄타기에 미스가 있었는지 뒤통수를 잡힌 채로 데스크에 이마가 내리 찍힌 에린의 얼굴로부터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사실 정확한 시기가 언제가 되었건, 아르카디아 교단의 방송국 습격 사건은 무조건 일어나는 행사였다.

         

         게임 상에서는 과거에 있던 메모리얼 타임즈의 보안 스캔들에 가까운 일화 겸, 아르카디아가 도시의 골칫거리로 대두되는 중간 과정이었다~ 관계자가 회상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식으로 짤막하게 나왔던 걸 잊지 않고 챙겼다고 할까.

         

         내가 괜히 일부러 여기까지 나와서 한참 후에나 써먹을 위치 추적용 바이러스를 만들어 뿌리고 있던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

         

         헌데 원래도 에린 스컬리가 저렇게 인질처럼 붙잡혀서 목숨을 위협받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애당초 게임에서야 그녀가 무사히 살아남아 어떤 엔딩까지 가던지 간에 간판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건 알지만, 지금 저렇게 핍박받는 게 포함된 사건이었나? 아니면 이것도 내가 알짱거리다 생긴 나비 효과?

         

         지금으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헌데 아르카디아 사이비 새끼들 몇 명 정도야 살려서 돌려보내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쳐도, 내가 마음의 빚을 졌다고 감사까지 표한 사람이 저딴 몰상식한 대접과 위협을 받고 있는데 여기 가만 있을 정도로 나는 얌전한 타입이 아니다.

         

         볼일 다 봤으면 이제 슬슬 꺼져버리라고 가서 윽박질렀으면 질렀지.

         

         쇼우와 어떤 형태로든 결착을 짓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게 남이 피 보는 와중에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며 숙덕거릴 가치가 있으냐 하면… 난 억지로라도 뒤로 미루는 것을 선택하겠다.

         

         막말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누가 누구한테 사귀어 달라, 계속 옆에 있어달라 고백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달라붙는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그런 식으로 구애하는 과정에, 생체 병기나 마찬가지인 고도로 훈련된 특수 요원도 동원되고, 수천 명은 우습게 넘는 휘하 직원들의 일상도 자연히 말려들어가는 범상치 않은 직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물 연구소에서 태어난 주제에 감추는 비밀도 더럽게 많고, 당장 머리속에는 이 시기에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 정보들로 가득하며, 할 수 있는 일도 묘하게 많은 인조 해커가 대상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긴 하다만.

         

         지금 바로 움직여서 도울 수 있는, 사람 한 명의 목숨을 감히 저울질할 가치는 없으리라.

         

         “읏!?”

         “어.”

         

         격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덜컹!

         

         예고 없이 문을 의상실 안쪽으로 잡아당기자, 등을 너무 편하게 기대고 있던 모양인지 우리 상임 이사님께서 땅에 우당탕탕 넘어지신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셨다.

         

         허나 객관적으로 무례함에 점수를 매기더라도 10점 만점에 9점 내외는 되는 내 행동에 화라도 낼 줄 알았거늘,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주된 감정에 분노는 일절 없었다.

         

         외려 혼란, 황당, 간절함, ……그리고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불안함.

         

         ‘………아, 뭐야. 그런 건가.’

         

         그제서야 이 얇은 벽을 사이에 둔 그와 나의 미묘한 대치 상태를 납득했다.

         생각 외로 간단한 얘기다. 애당초 관계를 파탄 내고 싶지 않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라, 결국엔 이 바보 자식도 똑같이 마찬가지였다는 소리다.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다가 실수로 한 발자국 경계를 넘어선 것 같으면 화들짝 놀라서 다시 물러나고. 그래도 상대가 용서한 것 같으면 재차 조심스럽게 접근해보고.

         

         다만 쇼우와 나의 결정적 차이점이라면, 나는 여기서 서로 얼굴 붉힌 채로 대판 싸우고 헤어져도 어차피 나중에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 걸 아는 만큼 어색한 재회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면.

         

         그는 한 번의 다툼이 완전한 단교나 절교로 이어질 수 있다 철썩 같이 믿었기에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진 채로 이쪽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는 것?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간절한 쪽은 어쩔 줄 몰라 해야 한다니… 이거 상당히 치사한 관계가 아닌가?

         

         여태 온갖 걱정을 다 했지만 실제로는 내가 유리한 위치에 서있는 눈치 싸움이었다는 소리다.

         

         불공정한 치킨 게임, 조금만 힘을 줘서 강하게 밀어내는 걸로도 거의 무조건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심리적 고지. 제대로 악용하고자 마음먹으면 꽤나 재미를 볼 수 있으리라.

         

         내부 정치 싸움, 권력 구도에서는 아직 많이 열세여도 에나마의 상임 이사라는 자리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권한이나 물자는 어마어마하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멋대로 상대방을 휘둘러볼 생각부터 했겠지.

         

         그러나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생각도 못한 채로, 불안하게 눈만 굴리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인간을 몰아붙이기엔 아직 모질게 굴 이유가 도저히 없었다.

         

         더군다나 여자 후리는데 무슨 도가 튼 것처럼 굴더니. 실제로는 어리숙한 나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수준에 불과한 녀석한테 그러기는 좀….

         

         몸이랑 머리만 컸다 뿐이지, 알맹이는 진짜 완전 그냥 애구나 애.

         

         으이구, 형(?)이 이번 한번만 참고 넘어가준다. 다음부턴 느끼하게 굴지도 말고, 덮칠 것처럼 덤벼들 생각도 하지 마라. 엉?

         

         주인이 바닥에 널브러진 걸 본 추적자가 질겁해서 달려오기 전에 얼른 잡고 일어나라는 용도로 그에게 손을 슬쩍 내밀었다.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천천히 뻗어진 손이 마주 잡히고. …예상보다 많이 무거운 성인 남자의 체중에 혀를 차며 냉큼 두 손으로 붙잡고 낑낑거리며 잡아당겨 쇼우를 일으켜주었다.

         

         이제 후딱 뉴스 룸으로 달려가서 구조에 한 손 보태는 일만 남았지만. 여기서 또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지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나도 연장자로서 진지한 충고 하나 정도는 돌려주는 게 맞으리라.

         

         “질척거리면서 실현 가망성 적은 쪽에 집착하기 보다는. 굳이 정말 네가 바뀌고 싶다면, 아예 나처럼 연애에 무관심한 인간도 다시 돌아볼만한 인물이 되는 건 추천할게. …괜히 발밑도 불안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 신경 쓰다 미끄러지지 말고.”

         

         “……….”

         

         비록 첫 대면에 여러가지로 아다리가 맞으며 팍 꽂힌 게 컸는지, 아니면 그 놈의 망할 ‘취향’에 내가 딱 맞아 떨어져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건지는 몰라도.

         

         진면목이라는 건 언젠가 드러나는 법일지니.

         

         나 같은 반푼이 가짜 여자보다는 훨씬 더 좋은 인연을 만날 길이 열려 있는 그에게, 반려처럼 누군가와 의지할 수 있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면 좀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준비해두라는 말을 던져주었다.

         

         음, 뭔가 들었을 때 멋진 문장으로 분위기를 흐리고 상대를 현혹해서 자리를 얼버무릴 속셈이라면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비서실장 미스터 K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실어준 것만 아니라면 좋겠다.

         

         하여간 보무도 당당하게, 여타 추적자들이나 에나마 사병들이 나와 제로가 급하게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걸 막지 않은 시점에서. 쇼우가 수긍은 애매해도 각자 할 일에 집중하자는 걸 허락은 했다고 믿는다.

         

       

       

         자, 그럼…… 기껏 빠져나와 놓고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제로? 길 뚫기는 잘 부탁해?

         

         아니, 이런 미로 같은 복도를 무작정 돌파하다가 눈 먼 총알에 맞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조심할 건 최대한 조심해야지. 어우씨.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단은 철벽을 치는 걸로 간신히 넘어간 A양.

    연참! 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안 그래도 0.5편으로 자른 이걸 또 두 개로 쪼개는 건 좀….
    죄송합니다. 많이 지각했지만 정성껏 담은 분량을 봐서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침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파요.

    Glacia샤샤 님의 23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아샤가 대답을 삐끗했으면 TS 쇼우가 나타나는 전개냐고 물어봐 주셨네요. 네, 맞습니다(?). 사실 다음 예정 에피소드에 위험한 플래그가…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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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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