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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8

       앨리스와의 대화는 그럭저럭 끝냈지만, 문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속이 더부룩해질 만한 대화상대는 주변에 널려있다는 것이다.

        

       내가 시간을 돌렸던 상황을 전부 기억하— 아니지, 그걸 전부 기억해내지 ‘않더라도’, 이 상황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불편할 만한 상대가 많았다.

        

       그렇다. 나는 당장 눈앞의 상황만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달려들었을 뿐, 정작 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그 상황에서 뒤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황제조차도 뒤 없이 달려들었는데, 그 황제를 상대해야 했던, 심지어 별다른 준비도 없이 곧장 상대해야 했던 내가 뒤를 얼마나 생각할 수 있겠어.

        

       가짜 앨리스를 앞에 두고 조금 추모하는 분위기가 된 앨리스를 두고 몇 걸음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를 거의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말로 포위하듯 에워쌌다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각자 조금 거리가 있어서 빽빽한 벽 수준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는.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단 나를 따라온 인원 중 그나마 나와 불편하지 않게 엮인 사람을 추려냈다. 예를 들자면 검성, 제니퍼, 캐롤린 정도일까. 두 사람 다 나와 어느 정도 친분은 있지만, 나의 능력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을 터였다. 실제로 검성은 지금 상황이 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고, 제니퍼는 깊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으니까.

        

       게다가 캐롤린은 내 담임이었다. 평소라면 선생과 학생이라는 관계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이만큼 훌륭한 관계도 없다. 상황이 끝나고 서로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명분이 있는 관계라니!

        

       말을 한 번 섞으면 그래도 꽤 오랫동안 섞을 수 있지 않을까? 선생과 대화하고 있는 학생에게 굳이 와서 말을 걸만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당장 나와 눈이 마주친 스승-선생 그룹에 곧장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결심만 했다.

        

       바꿔말하자면, 나는 그 결심을 이루지 못했다.

        

       “……팬그리폰.”

        

       음, 이쪽으로 넘어오고 나서 거의 들어본 적 없는 호칭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실비아라는 나의 이름 뒤에 팬그리폰이라는 성이 붙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서명할 때는 뒷부분의 팬그리폰이라는 성도 제대로 적어 넣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팬그리폰!’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친해지기 전의 친구 사이나, 나를 처음 보는 교직원들이나— 나를 굳이 ‘팬그리폰 양’ 혹은 ‘팬그리폰 영애’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다.

        

       여기에는 어마어마하게 높고 넓은 심리적인 장벽이 있다.

        

       성(姓)을 영어로 번역하면 last name, family name…… 아무튼 ‘name’이 붙는다. 즉, 이름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일부를 그냥 부르기에는 ‘팬그리폰’이라는 성씨가 가진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영국에서 ‘미스 윈저’ 같은 명칭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 세상에서 나는 성씨보다는 이름으로 훨씬 많이 불렸다. 나나 앨리스를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 ‘실비아 황녀님’, 혹은 ‘앨리스 황녀님’이라고 불렀다. 이것도 둘을 구분해야 할 때나 그렇고, 혼자 있을 때는 그냥 ‘황녀님’이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당연히 그냥 이름으로만 불렀고. 나와 앨리스는 함께 있을 때가 많은데, 거기서 팬그리폰이라고 부르면 둘을 구분하지 못하잖아. 뭐, 그보다는 ‘팬그리폰’이라는 이름이 제국 황실의 성씨인 동시에 ‘제국 초대 황제의 이름’이기도 했으니 대놓고 부르기 껄끄러운 것도 한몫했겠지만.

        

       그런데 굳이 지금 나를 팬그리폰이라고 불렀다는 건, 그 이름이 지금부터 나누려는 대화에서 꽤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장 상대의 목소리만 들어도 위장이 꼬여서 데굴데굴 굴러다닐 지경인데, 그 목소리로 그런 명칭으로 불리기까지 했으니, 당장 바닥을 구르지 않은 내가 너무나 대견했다.

        

       별로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태엽이 고장 난 인형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더니, 내 소매를 붙잡은 소피아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표정은……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신을 믿는 이가 눈앞에서 신을 잃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라 잃은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을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소피아의 눈은 완전히 말라버린 것 같았으니까.

        

       그냥 마른 것도 아니고, 마른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공허했다. 언제나 최소한의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어야 할 눈동자가 저 모양이니, 안 그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더 확실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간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아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충분한데요.”

        

       그래도 그 팬그리폰이라는 호칭만은 어떻게 하고 싶어서, 나는 상황에 별로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

        

       소피아의 눈이 움직였다.

        

       여전히 식빵 굽는 자세로 앉아 내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리폰을 올려다보는 소피아를 보고, 나는 대체 그 오해를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 그리폰은 나에게 지배당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을 때처럼, 아마 본인이 할 일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또 어디론가 날아가겠지. 게다가 팬그리폰은 그리폰 ‘한 마리’가 아니라 ‘무리’였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그리폰 등에 타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나를 팬그리폰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소피아도 굳이 그걸로 쓸데없는 논쟁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여신님은 이제 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쓸데없는 논쟁이 더 나았을 것 같다.

        

       “…….”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중학생 시절 같은 반의 한 아이 중 목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한테 ‘너도 유부녀나 따먹고 다니려고?’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목사야’라고 하는 그 애한테 ‘그럼 니 아버지도’라고 했다가 얻어맞은 적이 있지.

        

       원래 종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상당히 민감한 법이다.

        

       “제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소피아는…… 초반에는 광신도에 사이코패스처럼 나오는 캐릭터였지만, 뒤로 갈수록 주인공과 얽히며 조금씩 세탁이 되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한 작품 만에 깨끗하게 세탁이 되는 것을 보고 상당히 싫어했던 캐릭터이긴 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꽤 그럴싸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법국의 손에 자라면서 그게 진리라고 배우고 살아온 아이였으니까. 거기에 아예 ‘여신과 대적하는 악’이 튀어나오기까지 했으니 더 신났을 것이고.

        

       하지만 그런 강대한 악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소피아는 레오를 만났다. 그리고 나를 만났고.

        

       결과적으로 원작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 되었다.

        

       이 소피아는 원작의 소피아가 아니라, 내 친구인 소피아다. 그러니, 차라리 어중간한 거짓말보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낫겠지.

        

       “당신은…….”

        

       말을 고르는 것은 소피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여신님과는,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요?”

        

       이미 짐작하는 것도 있을 거고, 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 약속했었지.

        

       일이 다 끝나면 이야기해주기로.

        

       “그 여신이라는 존재가 보낸 이는 맞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내 일행뿐만이 아니라, 아까부터 묶인 채로 이쪽을 흘끗거리는 제국의 기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더 숨겨서 뭘 하겠는가.

        

       이미 그리폰 등에도 탄 마당에.

        

       “여신의 계획에 이용될 사람이기도 했죠.”

        

       “그렇다면 어째서 마지막 순간에 여신님을 배신한 건가요?”

        

       소피아의 말은 얼핏 들으면 힐난하는 것 같았지만, 어조가 너무 평탄해서 딱히 원망하는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확인하려는 듯,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물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처음 이 세상에 오고 나서 내가 ‘캐릭터성’을 만든 것은 주인공 일행에 끼어들기 위해서였다.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주인공의 일행이 되었으니까.

        

       황제와 대적했던 것은 그 모두가 살아남은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건 성공했다.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여신의 계획을 뒤집어버린 것은…… 내가 그 해피엔딩에 함께하고 싶어서였다.

        

       …….

        

       이건 해피엔딩일까?

        

       나는 신을 잃은 신자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할 대답을 소피아는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답은 해야겠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어서요.”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분명히 3시까지 올리겠다고 해놓고 3시간을 늦어버렸네요ㅠㅠ

    기왕 늦은 김에 매번 후기에 쓰려다가 잊고 쓰지 않았던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차기작은 몇 번 말씀드렸던대로 TS백합입니다. 배경은 중세 판타지고, 아마 로맨스 판타지 풍의 세계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진도를 다소 느리게 잡고 이야기 막바지에 주인공이 히로인과 이어지도록 할 생각입니다. 역시 이야기는 진짜 사귀는 부분보다는 썸타는 부분이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런가요?

    차차기작에 대해서는 사실 원래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한 독자분께서 암타물을 써볼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 ‘내가 TS암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설정이 세워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미 세워둔 내용이긴 했는데, 해당 태그를 붙이고 설정을 보충하니 그냥 아이디어였던게 서사가 생겨벼렸네요. 제가 다음 작품을 쓰는 사이에 다른 아이디어를 더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이상 차차기작은 판타지 세계관 배경의 TS암타물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 기다려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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