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79

       이틀 뒤.

       ​

       겨우 버멜을 만날 수 있었던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

       안 그래도 흐물흐물했던 면상이 아예 반쪽이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

       “하룻밤 사이에 애인이라도 만들었냐?”

       ​

       처음에는 정기라도 빨린 줄 알았다. 부인한테 밤새 짜인 뒤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의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

       그러나 버멜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부인했다.

       ​

       “헛소리.”

       ​

       하긴, 히든피스 모으느라 뭐 빠지게 구르던 녀석이 여자를 사귈 리 없지.

       ​

       “그런데 왜 그리 안색이 안 좋아?”

       

       내 물음에 버멜은 잠시 침묵했다.

       

       혹시 이 녀석도 정령의 샘에 들어갔다 나온 건가?

       ​

       생각해 보니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

       버멜과 마지막으로 만난 지 40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왔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설마.

       ​

       “에이.”

       ​

       아니, 아니겠지. 조금 전 생각은 너무 김칫국이다. 얘랑 나랑 얼마나 깊은 사이라고.

       ​

       마왕을 잡으면 그걸로 끝나는 계약 관계다. 내가 녀석에게 그렇듯이, 이 녀석도 나한테 필요 이상의 연민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

       정령의 샘에서의 일은 내 일이었으니, 버멜도 딱히 참견할 생각은 안 할 것이다.

       ​

       만약 내가 시한부인 것을 알더라도 그전에 마왕을 잡을 계획을 궁리할 녀석이니까.

       ​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버멜을 독촉했다.

       ​

       “무슨 일 있었냐니까?”

       “…너 오늘 아침에, 소식 못 들었어?”

       “뭐.”

       “하아…. 진짜 모르는 모양이네.”

       ​

       버멜이 탄식하며 뉴스 기사를 보여주었다.

       ​

       [검찰, 절멸급 마수 ‘아카샤’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 ‘도주 우려 있어….’]

       ​

       이건 또 뭐야.

       ​

       아카샤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비구속 수사라서 조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는데….

       ​

       이건 아예 감방에 묶어놓겠다는 소리 아닌가?

       

       법은 잘 모르지만 카우렐리아 정부에서 내 쌍둥이를 어떻게 대하려는 건지는 가늠이 된다.

       ​

       기사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카우렐리아 연구조사기관 설문조사]

       ​

       [Q. 최근 투항한 마왕군 간부, 상천(上天) 에테르의 구속영장 발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1. 당장 구속에 찬성한다 : 44%]

       [2. 구속에 절대 반대한다 : 36%]

       [3. 마왕을 쓰러뜨린 후 구속해야 한다 : 13%]

       [4. 모름&무응답 : 6%]

       ​

       지금 조져야 한다고 말하는 깐프놈들 44퍼센트에, 토사구팽하려는 인간 이하 새끼들이 13퍼센트.

       ​

       이 둘이서 과반이기 때문에 국민 여론은 내게 불리한 쪽이다.

       ​

       “에테르, 다음은 네가 될 거야.”

       ​

       버멜이 경고했다.

       ​

       소시민 물리학자에 불과했던 내가, 판타지 세계에서 구속 위기까지 겪고 있다니. 미칠 노릇이구나.

       ​

       “수사라고는 해도 아카샤에겐 이미 실형이 내려졌어. 마수라는 건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니까.”

       “시발, 나 콩밥 먹는 거냐?”

       ​

       여기서 한 짓이라고는 스태프로 몇 명 실신시킨 거랑, 플레어와 원자폭탄을 만든 일이 전부인데.

       ​

       나는 사람 한 명 제대로 죽여 본 적 없는 선량한 마수인데!

       ​

       어시스트 넣었다는 죄목으로 구치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

       억울하다.

       ​

       “애초에 이게 말이 되나?”

       “네가 정말 투항했으면 일단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국민 상당수는 지금도 그리 생각하고 있어.”

       “나한테는 앨리스 언니가 있는데?”

       ​

       나는 엘프들이 따르는 정령왕의 비호를 받고 있단 말이다.

       ​

       “정치에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지 마. 일부러 억까하는 놈들도 분명히 있으니까.”

       ​

       정령의 말을 그렇게나 잘 따르는 나라가, 지금 와서 제정 분리를 운운하다니.

       ​

       웃기는 일이었다.

       ​

       “참고로 두 달 뒤에 총선이야.”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

       그래, 다 표 때문이었구나.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왕이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부 분열이라니. 얘네도 한 번 터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

       그래도 세상은 멸망하면 안 된다. 로테, 프레이, 유피엘이나 레니냐, 아카샤나 블루베리를 위해서라도….

       ​

       그렇지.

       ​

       흑주를 만들 연구단을 소집하기 전에 우선 아카샤와 면회를 가져보는 게 좋을 듯하다.

       ​

       ​

       **

       ​

       ​

       면회 접수는 생각보다 쉬웠다.

       ​

       그래도 일단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가족끼리 서로 만나게 해주더라.

       ​

       “시간제한은 20분입니다. 그때까지 편히 이야기 나누십쇼.”

       ​

       덜컥.

       ​

       의욕이 없어 보이는 공무원 엘프가 문을 닫고 나간 뒤.

       ​

       우리는 유리창 하나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정말로’ 모든 게 똑같은 쌍둥이 여동생.

       

       나와는 달리, 그녀는 며칠 사이에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

       “테르.”

       “카샤.”

       “테르야….”

       “카샤야….”

       ​

       목소리가 많이 잠겼네.

       

       절멸급 마수라고는 해도 힘들었겠지. 검찰 조사는 기본 몇 시간은 끌고 가니까.

       ​

       아카샤는 억울하다는 듯 책상을 마구 두들겨댔다.

       ​

       “테르야, 나 여기서 좀 꺼내 줘.”

       “미안하다. 지금 내 능력이 부족해서.”

       “하아….”

       “하아….”

       ​

       아카샤는 당연히 연구 인력으로 넣어야 한다. 그녀의 고유마도인 백야(白夜)가 있어야만 흑주도 최대 출력을 낼 수 있으니까.

       ​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

       “언니가 생각을 고쳐먹은 건 환영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투항했으면 안 됐어. 조금 더 괜찮고 유리한 방법을 찾았어야지.”

       “눈앞에서 로테가 죽고 있었잖아. 내가 그때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

       “없었어도 찾았어야지. 이 빡대가리 언니야.”

       ​

       뭐?

       ​

       아무리 그래도 자기 분신과도 같은 사람한테 빡대가리라니.

       ​

       “내가 빡대가리면 너도 빡대가리야.”

       “말 다했어?”

       “아닌데? 더 할 건데?”

       ​

       아카샤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마주 보는 공간 사이로 찌릿, 하며 섬전이 튀었다.

       ​

       그렇게 우리는 말싸움으로 5분가량을 날려 먹었다.

       ​

       “됐다, 이렇게 싸워서 뭐 하냐.”

       “다 좋으니까 일단 꺼내 달라니까? 여기 밥 더럽게 맛없어.”

       “조금만 기다려 봐.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

       이걸 어떻게 한다.

       ​

       문득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앨리스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내가 눈치를 주자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

       “…신기하네요. 설마 ‘더미’가 존재했을 줄은.”

       ​

       스르륵.

       ​

       내 곁으로 내려온 앨리스가 아카샤를 유심히 살폈다.

       ​

       “얼굴도 똑같아, 성격도 판박이에요. 그런데 머리카락 색은 완전히 정반대…. 여신님의 의도가 보여요.”

       “갑자기 뭐야? 알아듣게 설명해.”

       ​

       나와 아카샤의 독촉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앨리스.

       ​

       곧 그녀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

       “두 사람은 사실 동일 인물이에요.”

       “뭐?”

       “뭐?”

       ​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

       “이것 봐요. 동시에 똑같은 반응 보이는 거.”

       

       그야 말이 안 되니까.

       ​

       아카샤와는 기억이 존재하던 시절부터 함께 붙어 다녔는데, 어떻게 동일 인물이란 말인가.

       ​

       “동생이 알아듣게 쉽게 설명하자면… 그래요. 여신께서 당신이라는 파일을 복사 붙여넣기 한 거예요.”

       “왜?”

       “음,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한 포석일까요? 아마 디버깅 작업을 하다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신 거겠죠.”

       ​

       앨리스가 아카샤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

       “당신은 사실 이쪽 세계선에 존재해선 안 되는 인물일 거예요. 여신님께서 잠깐 테스트하느라 만들어 놓으신 존재일 뿐이죠.”

       ​

       폭풍과도 같은 앨리스의 발언. 아카샤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

       그리고 그런 표정을 지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고 보니, 버멜은 아카샤의 존재를 전혀 몰랐었지.

       ​

       “내가 아카샤고, 아카샤가 나라….”

       ​

       혼란스러웠다.

       ​

       그래도 앨리스가 말한 것이니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은 혼(魂)을 보고 사람을 구분한다고 하니까.

       ​

       물론 이런 걸 알았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어쨌건 아카샤는 이곳에서 꺼내야 한다.

       ​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

       우리는 똑같은 타이밍에 앨리스에게 따졌다.

       ​

       방금 자신이 알려준 정보가, 아카샤를 여기서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느냐고.

       ​

       “구속 해제를 요청해볼 만해요. 어쨌거나 이 논리대로라면 백발의 당신도 제 자매이니까요.”

       ​

       생각해 보니 그렇다.

       ​

       앨리스와 내가 친자매인데, 정령이나 지구와는 아무런 연이 없는 아카샤도 나와 친자매라면 그게 무슨 개족보란 말인가?

       ​

       카우렐리아의 검찰도 이 점에서 의문을 느꼈기에 아카샤를 가둬 놓고 수사하는 중이다.

       

       오히려 나와 아카샤가 같은 데이터였다는 걸 안다면, 바로 풀어줄지도.

       ​

       “동생의 생각이 맞아요. 둘이 사실은 동일 인물이었다는 점을 토대로 네 정령왕의 보증을 받으세요. 그렇게만 되면 백발의 동생은 이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걸 국민이 믿을까?”

       

       팩트가 존재하는 것과, 팩트를 믿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마력파와 혼의 검사 결과가 일치할 테니 믿을 사람은 믿을 거예요.”

       “흠.”

       “흠.”

       ​

       적어도 아카샤에 대한 호의 여론을 형성할 수는 있겠지.

       

       나와는 달리 비호하는 정령이 없는 아카샤는 거의 만장일치로 이렇게 붙잡힌 것이었으니.

       

       “알았어. 일단은 얘기해 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며 면회를 끝내려고 하던 때였다.

       

       “잠깐만.”

       ​

       탁.

       ​

       책상에 손을 짚으며 일어난 아카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서, 불안하고도 애석한 감정이 드러난다.​

       

       “거기 정령.”

       “앨리스라고 불러요, 동생.”

       “앨리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래서 만약 마왕이 죽고 세상이 안정을 되찾으면….”

       ​

       아카샤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린다.

       ​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

       앨리스가 말을 더듬는다.

       ​

       “나보고 더미에 불과하다며. 그 디버깅 작업이 끝나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겠지.”

       “…….”

       “여신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삭제하게 되는 건가? 아니면 어디일지도 모르는 세계로 추방당하는 건가?”

       ​

       웃기지 마. 아카사갸 이를 갈며 그리 덧붙였다.

       ​

       그녀의 금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래, 정령은 입을 다무는 게 긍정이라고 하지. 내 말이 사실이긴 한가 보구나.”

       ​

       아카샤는 입매를 비틀며 삐딱하게 앉았다.

       ​

       나도, 앨리스도.

       ​

       그녀의 분노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할 수 없었다.

       ​

       어떤 심정인지 전부 알고 있다. 또한 공감하고 있다. 그녀와 나는 거의 동일한 존재라고 하니까.

       ​

       “카샤.”

       “테르, 만약 여신이 나나 너를 지워버린다고 하잖아? 나는 다시 마왕의 편에 설 거야.”

       “이러면 곤란해.”

       “하나뿐인 친족과는 떨어지고 싶지 않아.”

       ​

       설령 그것이, 다른 세계선의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

       아카샤는 그런 뒷말을 순간적으로 삼킨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 같아도 그렇게 말했을 테니까.

       ​

       “아, 젠장.”

       ​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

       지구에 살던 남자로서의 자아와 이곳 아렌스에 살던 소녀로서의 자아를 겨우 합쳐냈는데.

       ​

       그래서 더는 존재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

       흑주만 만들면 전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

       ​

       – 스파게티 코드라고 부르는데. 저는 그런 거, 되게 싫어합니다.

       ​

       여신은 데이터 낭비를 극도로 싫어하는 존재다.

       ​

       백야(白夜)라는 본래 쓰임새를 다하면 아카샤를 삭제하려고 하겠지.

       ​

       초월자인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아카샤를 처분하는 것은 수능 끝난 수험생들이 문제집을 버리는 것이나 진배없다.

       

       언니.

       

       [단순히 중복을 싫어하실 뿐이에요. 둘 사람 모두에게 손을 대실 정도로 박하시지는….]

       

       그래, 그거다.

       ​

       아무런 위안도 변명도 없이 면회실을 나가려던 나는, 면회가 종료되기 10초를 남긴 시점에서 아카샤에게 다가갔다.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

       “아카샤, 너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

       “……?”

       ​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는 듯,  눈썹이 슬쩍 찌푸리는 그녀.

       

       아카샤는 나와 여신의 계약 내용을 모른다. 그러니 멀뚱거리고 있을 수밖에.

       ​

       존재가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는 눈앞의 자신을 위하여, 나는 일말의 거짓 없이 아는 정보를 전달했다.

       ​

       “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남을 거야.”

       ​

       그것은 추측성 발언 따위가 아닌,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

       왜냐하면.

       ​

       삭제되는 건 나일 테니까.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