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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9

    죽음을 유영하는 것은 끝없는 늪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그것은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저 편에서 끈적하게 달라붙는 손아귀들, 자신을 원망하는 수많은 삶의 흔적들, 그리고…….

     

    “으음.”

     

    오늘따라 꿈자리가 사납다고 생각하며 눈을 살며시 뜨자, 시선에는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비치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거대한 악룡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죽음과 상실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위, 시가르마타.

     

    자신의 아이를 마중하기 위하여 저승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결국 자식과 만나지 못한 비련의 부모이자,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게 되어버린 폭군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파르바티’였다.

    무려 5000년이라는 시간동안, 저승에서조차 자식을 만날 수 없던 시가르마타는 현재 그 어느때보다 간절하겠지.

     

    파르바티의 심장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아린세이아의 모든 것이 ‘잊혀진’ 지금, 아린세이아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지닌 열쇠가 바로 그녀 뿐이었으니까.

     

     

    그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되뇐다.

     

     

    “아린세이아는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곳이다.”

     

     

    잃어버린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빛나던 반지들 중 하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툭, 투둑.

     

    반지의 붉은 보석 부분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불길한 소음.

    아니나다를까, 실 같은 금이 반지를 감싸더니, 이내 손가락에서 툭 떨어지고 만다.

    그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다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손가락이 하나 잘려나갔군.”

     

    검지손가락, 세이어인가.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녀석은 손가락 중에서 가장 위험한 업무를 맡겼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예상보다 빨라.’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회수한 영혼으로부터 죽음의 기억을 훑던 찰나…….

     

    멈칫.

     

    그는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이마를 짚었다.

     

    “……함정이군.”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기억의 주입을 끊고 세이어의 영혼과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그것은 꽤나 정교한 계약함정이었다.

    마치 영혼에 숨긴 폭탄.

     

    이 방식은……. 꽤나 참신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 흑마법사들이라면 절대 대응할 수 없겠어.’

     

    그러나 이 방식은 자신이 딱히 인간이 아니더라도 꽤 효과적이었다.

     

    만일 자신이 영혼을 완전히 분리운용하며 기억을 읽기 전 한차례 선별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꼼짝없이 함정에 빠지고 말았을 테니까.

     

    “에이레스에는 확실히 무언가 있다.”

     

    딜런트의 경우도 그렇고, 이번에 세이어까지…….

    마치 에이레스에 자신을 방해하는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에이레스에는 손가락들이 더 필요하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그는 이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메를린……. 인가.”

     

    계약마법의 함정을 깨닫고 세이어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전, 간신히 읽은 기억의 단편.

     

    죽음의 인형사 메를린…….

     

    세이어는 어째서 그 이름을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녀가 현 상황에 관련이 있는 건가?

     

    그의 고민은 사실 그리 길지 않았다.

     

    ‘뭐……. 위험요소는 하나라도 배제하는 편이 좋겠지.’

     

     

    인형사는 제거될 것이다.

     

    —————-

     

    “휴우, 이제야 다 되었군! 수고했네, 리브!”

     

    그렇게 리브와 함께 자신의 아공간에 리치의 시체를 깔끔히 집어넣은 루크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월영석 목걸이에 다시 ‘열쇠’를 숨겼다.

    언제 봐도 참으로 만족스럽고 유용한 아티팩트가 아닐 수 없다.

     

    인간 크기의 물건 하나 담으면 꽉 차는 아공간 주머니와는 차원이 다른 아티팩트가 바로 이 ‘열쇠’다.

     

    이미 한번 과거 아린세이아로 좌표를 고정시킨 ‘열쇠’는 언제 어디서든지 충분한 마나만 있다면 아린세이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힐 수가 있었으니까.

    열기만 하면 거의 무한한 크기의 장소와 마나가 제공되는 것이다.

     

    비록 순수 마나만이 가득한 현대와는 달리 아린세이아의 마나는 여신이 통치한 시기가 길기 때문에 잔향이 많이 남아서 신성력 비율이 높아 몸에 직접 받아들여 서클을 다듬기엔 효율이 그닥 별로였지만.

     

    신성력이란 것은 근본적으로는 마나와 같지만, 원래 이미 신이라는 필터를 한번 거치고 난 상태의 마력.

     

    마나 그 자체가 그냥 물이라고 한다면, 신성력은 차와 비슷하다.

    그냥 마셔도 괜찮고, 어쩌면 차가 더 건강에 좋을 수도 있지만, 물이라는 것 자체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찻잎에서 우러나온 성분도 불순물이다.

     

    따라서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서클에 섞어버리게 되면 서클에 큰 영향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몇번의 여과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 시간을 따져보면 그게 그리 대단한 효율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마나를 끌어다가 곧바로 써버린다면 모를까, 서클에 담기엔 부적합하다.

     

     

     

    사실 대기중에 퍼진 신성력은 자신보다는 리치에게 훨씬 더 민감한 사안이다.

    신성력에 흑마법이 정화라도 되어버리면…….

     

    별로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 같다.

     

    ‘뭐어, 그래도 리치는 방부처리도 확실하게 했고……. 아무튼 대기에 퍼진 신성력에 다 정화되어 버리기 전에 연구를 끝내면 되겠지.’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시체를 메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모습에 리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비록 아름다운 고향인 아린세이아에 더러운 리치의 시체가 들어가긴 했지만, 주인이 기쁘다면야 아무래도 어떤가.

    이제는 자신이 지켜야 할 여왕도, 국민도 없으니 말이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루크는 곧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을 보니, 막차시간은 아직도 꽤 남아있었다.

    아마도 지금 출발하면 여유롭게 버스에 오를 수 있겠지.

     

    “자아, 그럼 얼른 돌아가자꾸나. 파이리스가 기다리겠다.”

    “…….”

     

    그렇게 루크가 발걸음을 시작하자, 리브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

     

    좋은 기분으로 리엔느 숲을 걷던 루크의 표정은 어느샌가 밤 만큼이나 어두워졌다.

    이번 일로 희생된 민간인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전투의 끝은 언제나 통쾌한 일만 가득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또 쓰러진 채 나무에 기대어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강제희생으로 검은 화염을 불러낸 것은 사실 시체들 중에서도 소수.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시체가 루크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반겨주었다.

     

    아마도 매복하고 있던 것을 리브가 찾아내 처리한 것들이겠지.

    그중엔 루크가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연주를 들었던 사람, 피시방에서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게임을 흘끔흘끔거리던 사람, 마트에서 스쳐지나갔던 사람, 백화점에서 시식하던 중에 소시지를 구매해갔던 사람, 멜론 빵을 사간 빵집에서 줄을 서 있던 사람, 통학 중에 버스에서 봤던 사람…….

     

    비록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긴 하지만, 루크의 머리는 그들의 얼굴들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걷자 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안타깝군.”

     

    루크는 탄식했다.

     

    그는 항상 몇 곡 듣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방에 넣고는 빠르게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나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루크가 그를 붙잡고 어째서 항상 그리 바쁘게 뛰어가느냐 묻자, ‘일에 늦어서 그렇다’며, 끝까지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고, 많은 돈을 넣지 못해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던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추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였다.

    집에 과거에 자신이 실수로 진 빚이 있어서 그토록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나 때문에 다들 힘들게 산다며 힘없이 웃던 삶에 지친 가장이었다.

     

    “…….”

     

    스쳐지나가는 단역처럼 보여도, 어딜 가느냐 물어본다면 반드시 대답이 가능한 존재들이다.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목적이 있는 존재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그들을 살릴 수 없거늘.

     

    자신은 마법사이지, 성직자가 아니었다.

     

    현대에는 여신도 없고, 성녀도 없다.

    그러니 신성력은 당연히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임당했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루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부디 그들의 영혼이 바른 길로 인도될 수 있도록.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니까…….

     

    ‘라고, 나는 정녕 확신할 수 있는가?’

     

    루크는 눈을 떴다.

    아니, 오히려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비록 마법사의 자아를 지녔다곤 하나, 자신은 여신의 그릇.

    현대까지 남아있는 마지막 성녀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불쌍한 희생자들을 이대로 그냥 두고 간다는 것은, 수많은 가정의 파멸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영웅적이라 부를 수 없겠지.

     

    자신에게는 때마침 신성력도 준비되어 있고, 그것을 다루기 위한 자격도 주어져있다.

    그러면 이제 자신이 그럴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

     

    그리고 루크가 그것을 고민하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자신이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지갑에 동전이 있고, 적선을 원하는 빈자가 있다면 지갑을 열어 동전을 꺼내면 될 일이다.

    너무나 단순하지 않은가?

     

    다짐한 루크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리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할 일이 있다.”

    “……?”

     

    리브는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버스를 타러 가려던 것이 아니었느냐며 물어오는 것만 같다.

     

    “지금부터, 대규모 리저렉션을 실행할 생각이야.”

    “……???”

     

    리브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는 듯 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게 마치, ‘주인님은 마법사가 아니었나요?’라고 항의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루크는 그 반응에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신성력은 한번도 다뤄본 적 없지만…….’

     

    마법사가 신성력을 다룰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해본 적 없다.

    하지만, 그래도 루크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생각해보니 그토록 우둔했던 레니에도 잘만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이것은 이제 자존심에 대한 문제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쟤도 했는데 내가 못하겠냐는 오만한 생각!

    그건 싫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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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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