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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9

     꿈을 꾼다.

     황금빛으로 저물어가는 노을빛 백사장에서, 나는 그 어떤 베개보다도 포근한 곳에 머리를 뉘인 채 눈을 감고 있다.

     눈 앞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다.

     “깜빡 잠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스….”

     그 그림자는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굴곡으로서-

     “꿈이군요.”

     잠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망각했다.

     “실례했습니다, 공주님.”

     “흐응.”

     몸을 일으키자,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질적인 그녀가 나를 향해 볼을 부풀리고 있다.

     “그래요. 현실 속 공주님과는 이제 차이가 나서 이걸로 구분할 수 있다는 거죠?”

     공주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나를 게슴츠레 바라본다.

     “그렇게 큰 게 좋으셨으면, 나랑 왜 결혼하셨대?”

     “키우기 전에 이미 성장이 얼추 끝나버린 상태에서 만나버렸지 않습니까.”

     “어머, 제 탓이라고요?”

     “그래서 키워드렸습니다만.”

     “하, 정말이지.”

     공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래서, 데이트는 잘 다녀왔어요?”

     “네. 공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진짜로 덮쳐버릴 뻔 했습니다.”

     이곳은 백은으로 물든 세상.

     꿈 속이기에, 나는 잠시나마 공주를 만나서 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저를 덮치는 건가요?”

     “이미 덮친 거 아니었습니까?”

     “어머나, 아쉬워라. 눈치채지 못했으면 한 번 더 할 수 있었는데.”

     “한 번 더 할 수는 있습니다만, 꿈 속의 공주님을 상대로 그러기에는 조금.”

     “저는 그냥 당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인 건가요?”

     “그런 셈이죠.”

     공주가 키득거리며 느긋하게 백사장을 걷기 시작한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미 현실 속 그녀와 저는 너무나도 달라졌으니.”

     “그래도 당신이나 그녀나, 둘 다 ‘아스타시아’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흐음, 그럴까나. 어쩌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공주가 두 팔을 벌리며 내게로 몸을 돌렸다.

     “한 번도 아이를 가지지 않았던 저. 하지만 현실 속, 지금의 아스타시아를 상대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황제를 죽일 겁니다.”

     과거와 현재의 공통점.

     “당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아스타시아 또한 아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은 불임이 아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아이를 가지기를 거부했고, ‘아이가 태어나기 어렵다’라는 걸 무려 7년이나 이어나갔다.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7년 동안 참았죠. 과연 지금은 어떨지.”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어요. 현실 속 그녀와 당신의 관계는 이미 13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미성년자였습니다만.”

     “그렇게 진한 관계를 이어왔고, 상황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과연 그게 쉬울까요?”

     “쉽지는 않겠죠.”

     17살에 만나 20살에 연인이 되어, 27살까지 아이를 낳지 않고 버티다가 처형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13살에 만났고, 20살에 결혼할 예정이다.

     첫 만남으로부터 10년 뒤에 처형당하는 게 수순이라고 한다면, 황제는 23살까지 아이를 낳지 않으면 아스타시아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황제가 후손에 대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건 아스타시아가 나이를 점차 먹어감에 따라, 황제 기준으로 ‘가장 완벽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육체적 나이’를 지난 뒤로도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언제까지 제가 ‘아스타시아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라거나, ‘연인끼리의 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습니다’라고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맞아요. 이미 해봤으니까.”

     “황제는 의심하게 되겠죠.”

     “혹시나 회귀 이전에도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닐까. 그게 회귀의 계기가 된 건 아닐까. 뭐, 자세한 건 엄청 다르긴 하지만!”

     공주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과거와 달라지기 위해서라도, 황제를 죽여야겠네요?”

     “당연하죠.”

     “당신을 위해 모든 길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인데도?”

     “황제가 바라는 길과 제가 걷고 싶은 길은 다릅니다.”

     나는 공주의 손을 붙잡았다.

     “황태자도 차기 황제도 필요없습니다. 지브롤터의 사람이 아니게 되더라도, 당신 단 한 사람만 제 옆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흐응….”

     “제가 걷고 싶었던 건 언제나처럼, 당신과 함께 걷는 길이니까요.”

     “그 말, 현실의 아스타시아가 들었어야 하는데.”

     공주가 내 손을 잠시 잡은 뒤, 내 가슴을 향해 가볍게 손을 두드렸다.

     “자, 그러면 나의 왕자님.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벌써?”

     “후후. 할 일이 있잖아요?”

     “하아….”

     잠시, 꿈을 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결국 꿈이며, 동시에 과거죠. 현재를 살아가는 당신에게는 할 일이 있고.”

     그림자가 드리운다.

     언제나와 같이 붉은색의 바람이 불어와, 세상을 뒤덮는다.

     

     이 붉은 궤적은 아마도, 내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피가 아닐까.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회귀 전의 공주가 죽었던 순간에 흩뿌려지던 그 피의 기억이.

     “꿈에서 깨어나야해요.”

     “5분만 더, 자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지금 현실에서의 일이 너무나도 많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공주가 그림자가 드리운 붉은 폭풍 속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늘, 또 사고 터졌나봐요.”

     “하….”

     “이번에는 새로운 사고. 과거에는 없었던, 또다른 사고.”

     공주가 귀에 손을 대고 귀를 쫑긋 세운다.

     “저는 당신의 무의식이고, 당신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존재죠. 당신이 자는 사이에도 귀를 열고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몰래 들은 걸, 당신에게 말해주는 사람이죠.”

     백은의 공주가 현재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 건, 전부 내가 자는 와중에도 현실의 일부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

     “저기, 문 너머에서 부하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네요. 깨워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공주.”

     나는 공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다시 만날 때는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러 오겠습니다.”

     “어머, 저한테 묻는 거예요?”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런 건 현실 속 공주님을 상대로 상의하시고.”

     짝.

     “깨어날 시간이에요, 잠꾸러기 왕자님.”

     

     * * *

     “…….”

     일어났다.

     

     언제나와 같이, 꿈속에서 일어날 때마다 나는 여러모로 상쾌하면서도 찝찝함 속에서 일어난다.

     “…….”

     언제나와 같이,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한다. 

     지브롤터 성의 내 방이기는 하지만, 제국식 마도공학 시설을 일찌감치 도입한 덕분에 내 방에는 따로 나갈 필요 없이 가볍게 몸을 씻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쏴아아.

     

     언제나와 같이, 빠르게 몸을 씻어낸다.

     자는 사이에 몸에서 배출된 노폐물을 닦아내고, 땀을 흘리며 젖은 옷을 바구니에 담으며, 클리닝 마법이 들어있는 마도구를 이용해 1차 정화를 하여 옷을 말끔히 닦아낸다.

     덜커덩.

     그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은의 향기가 바깥을 향해 빠르게 나가고, 방 안으로 시원한 지브롤터의 공기가 스며든다.

     시간은 아마도 새벽 4시 정도로 온 세상이 어둡지만, 불과 1시간, 혹은 2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여명이 떠오를 것이다.

     이 새벽에 급하게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씻는 게 뭐냐고?

     그냥, 아스타시아가 너무 매력적이었다는 것이 문제겠지.

     딱히 문제될 건 없다.

     부끄럽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남자라면 다 겪는 현상이니까.

     단지.

     “로버트 경. 무슨 일인가?”

     [어, 음….]

     내 방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로버트 경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대면보고할 일이 아니라면, 밖에서 해도 상관없나?”

     [그렇기는 합니다만…사안이 조금 특이하면서, 새로운 경우라.]

     “새로운 경우?”

     [예.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음….]

     로버트는 좀처럼 말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곧 무언가를 결심한듯 목을 가다듬었다.

     [거짓된 황금에 취한 이들이 가사상태에 빠졌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니, 이걸 가사상태라고 봐야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

     [거짓된 황금을 마셨습니다.]

     “……??”

     그걸, 마셨다고?

     “무슨 소리인가?”

     [황금의 기사를 죽이자마자 바로 그 황금을 마셨다고 합니다.]

     “아니, 그걸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조사 중이지만, 초동 조사에 따르면 황금의 기사를 죽이고 난 뒤 그 배분 문제에서 거짓된 황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걸 냅다 마셔버렸다고 합니다.] 

     “…그걸, 마셔?”

     2달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애초에 황금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황금을 굳히기 이전의 상태가 언데드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액체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거, 시신의 피를 마시는 거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예. 그러고는 꿈에 들어간 것처럼 잠이 들더니, 그대로 일어나지를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누가 옆에서 건드리거나 깨우려고 해도, 무기력증을 보이며 어딘가 환각에 취해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그거, 백은?

     “…로버트 경.”

     [예, 도련님.]

     “10분 내로 준비하도록 하지.”

     나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으나, 아무래도 다른 이들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 * *

     1시간 뒤.

     나는 기사단과 함께 세이레네 백작령으로 향하는 경계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고생했네. 카를로스 경.”

     바이크를 몰고 도착한 곳에는 이미 야전병원과 비슷한 형태의 임시 천막이 펼쳐져있었고, 천막 안에는 어느 한 청년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건….”

     “피해자…는 세이레네 백작령 출신의 중급 기사, 윌리엄 테일.”

     “…….”

     아는 이름이다.

     회귀 전, 망국의 공주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석궁을 쏴대며 테러를 일으키던 혁명군의 일원이었다.

     제대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중년의 나이에 마스터급은 되지 않을까 싶은 대기만성형의 영웅.

     지금은 원석에서 깎여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는 사람입니까?”

     “세이레네 백작가에 소속된 기사 맞지? 출신이라고 하는 건….”

     “얼마 전에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추방되었다고 하면서 황금의 기사를 사냥하고 있거나, 아니면 진짜로 쫓겨나서 황금을 쫓기 시작했거나.”

     “자세한 건 세이레네 백작가에 추궁해봐야 알겠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어느 쪽이든, 세이레네 백작으로서는 관여하고 싶지 않을 테니. 그보다….”

     나는 기사 윌리엄의 얼굴 부분에 뒤덮인 황금빛의 무언가를 가리켰다.

     “누가 저렇게 만든 건가?”

     “모르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렇게 되었습니다.”

     “…….”

     코와 입을 덮는 듯한 금색의 덮개.

     덮개의 위로 연결된, 흡사 안경과도 같이 눈을 덮고 있는 황금.

     심지어 귀까지 뒤덮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라는 오감 중 네 개의 감각을 차단시키겠다는 고문용 마스크와도 같았다.

     혹은 무언가….

     “작은, 드래곤?”

     “예?”

     “아니. 그냥…느낌이 그렇다고.”

     얼굴을 덮는 크기의 드래곤이 날개를 펼쳐 눈을 덮으며 날개 끝으로 귀를 덮고, 코와 입은 하반신으로 틀어막은 채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딱히 정확하게 ‘그렇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부정형의 액체가 황금으로 굳어진 형태라 정말이지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지브롤터는 이런 마스크를 만든 적이 없다.

     만들었다면 좀 더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었지, 이런 형이상학적인 의식용 가면같은 물건을 만들지는 않았다.

     “…….”

     나는 오러를 휘감은 손으로 거짓된 황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 도련님. 위험합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지금 오러를 일으켜서 접근하는 게 아닌가.”

     딱히 구해줄 의무는 없지만, 여차하면-

     중얼, 중얼.

     “…응?”

     방금,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

     황금색 가면 아래,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 도련님! 일단은-”

     “잠깐만. 이 녀석, 잠꼬대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닌, 웅얼거리면서 뭔가 헛소리를 하는 듯한 소리.

     “…죽어…매국노….”

     “…….”

     “도련님. 죽일까요?”

     “아니.”

     나는 검을 뽑아드는 카를로스 경의 손을 밀어, 검을 검집으로 밀어넣었다.

     “좀만 더 들어보자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암살자라고 한다면-”

     “나라를……먹은…배신자…세이레네….”

     “……?”

     세이레네?

     “나…지브롤터의 기사…윌리엄 텔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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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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