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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9

    자유 도시 연합의 지배자, 거대한 지렁이는 절망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지하에 내려온 회색 사신은 마치 천벌을 내리러 온 신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절망과 종말이었다.

    회색 사신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수조 안의 아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입에서는 울퉁불퉁한 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돌들은 아이들의 육체와 생명, 그리고 영혼으로 빚어진 것들이었다.

    정말 잔혹한 광경이었지만, 회색 사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를 가려주던 아늑한 어둠의 장막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공간에 뚫린 구멍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와, 지하의 어둠을 찢어발겼다.

    그 공간의 저편에는 탐욕스러운 악마들이 가득했다.

    악마들의 작은 손들은 공간의 틈새로 튀어나와, 아이들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돌을 탐욕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단,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마치 그 돌들이 악마들에게는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마련된 붉은 수조 안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 갈색빛이 도는 검은 액체는 어떤 독보다도 짙고 진흙보다 더 질척거렸다.

    불행히도 그 액체에 닿은 아이들은 내장이 녹아내리면서 입으로 검은 액체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회색 사신이 지하에 발걸음을 새길 때마다, 지하 시설의 핵심적인 토대가 붕괴하고 있었다.

    한때 도시 규모의 지하 시설을 견고하게 지탱해 주었던 철근과 콘크리트는 하얗게 탈색되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달에 닿고자 했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아, 격이 깎여나간다.’

    회색 사신의 시선 아래에서 격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돌을 토하며 죽어가던 거대 지렁이에게, 회색 사신의 시선이 닿았다.

    거대 지렁이를 바라보던 회색 사신은 천천히 손을 펼치고.

    다시 꾹 쥐었다.

    그것이 자유 도시 연합을 지배하던 3마리의 지렁이들의 최후였다.

    그렇게 지렁이들은 저런 괴물에게 닿고자 했던 것 자체가 실수였다고, 통탄하며 죽어갔다.

    ***

    지하도시 연합, 지하 깊숙한 곳.

    ‘아.’

    ‘자유 도시 연합’이라는 곳을 아우르던 오브젝트를 파괴하자,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머리 위에 떠올랐던 ‘죽음을 보는’ 헤일로도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통통.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장작이 있는 심장 부위를 두들겼지만, 헤일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헤일로는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격이 낮은 오브젝트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치 검은 시체가 씹어먹었던 것처럼 굉장히 강한 오브젝트도 격을 낮춰서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해주는 멋진 헤일로였다.

    게다가 몸이 갈라지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은 완벽한 헤일로!

    나는 심장 어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헤일로를 꺼냈던 감각을 떠올리며 다시 꺼내려고 했다.

    뭔가 장작 안쪽이 간질간질한 것을 보면 전보다는 꺼낼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꺼낼 수 없었다.

    아쉽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징그러운 지렁이들이 잔뜩 살고 있던 자유 도시 연합의 지하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별사탕들.

    그리고 그것을 미니 사신 정원으로 주워가려고 탐욕적으로 돌아다니는 황금 사신들.

    수조 안에 있던 액체는 모두 핫초코가 되어버렸고, 지하를 이루는 콘크리트도 모두 마시멜로가 되어버렸다.

    사실상 ‘미니 사신 정원’화 했다.

    뭐, 전처럼 기괴하고 칙칙한 지하보다는 미니 사신 정원이 낫지.

    ‘슬슬, 돌아가야겠네.’

    그런 나의 시야에 황금 사신이 들어왔다.

    황금 사신은 자기 몸통만큼 커다란 별사탕을 안고서 뚜방뚜방 미니 사신 정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황금 사신이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던 별사탕을 기습적으로 뺏어 먹고, 주황 사신이 죽은 척을 하고 있던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히히.

    ***

    주황 사신이 있었던 곳에 도착하자, 탁 트인 전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방 안에는 다양한 미니 사신들이 꾸물꾸물 돌아다니고 있었고, 티라노를 찾기 위해 뚫었던 구멍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구멍을 통해서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하지만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던 도시는 이제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지저분한 건물들은 새하얗고 폭신폭신한 마시멜로로 변해 있었고, 네온사인은 형형색색의 막대 사탕으로 변했다.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에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메카 티라노의 잔해가 모여들고 있었다.

    미니 사신들이 조각 하나하나를 들고서, 뚜방뚜방 옮기고 있었다.

    작고 가벼운 조각들은 황금 사신이 옮겼고, 크고 무거운 조각들은 검은 사신이 옮겼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그 모습을 신기한 눈초리로 구경했다.

    그렇게 조각을 잔해 더미에 올려놓은 미니 사신은 명복을 비는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염원을 보냈다.

    ‘다음 생에는 튼튼한 간식으로 태어나기를.’

    그러면서 품 안에 있는 별사탕을 공물처럼 잔해 더미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티라노는 영원히 미니 사신 정원 소속 간식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야광 간식이 없으니까.

    야광 티라노는 허약하고 재생 능력이 없더라도, 영원히 야광 공룡이야!

    건물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푸른 사신의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주황 사신의 애착 인간이 보였다.

    굉장히 안심한 표정으로 지쳐 잠든 인간.

    표정을 보아하니, 주황 사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나 보네.

    그 인간의 품속에는 주황 사신이 굉장히 단단히 안겨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달을 만들어 내는 도중에 격이 깎여나가서, 크기가 줄어든 줄 알았는데….

    달을 소환해서 그런 걸까?

    크기가 줄어든 것은 그대로였지만, 오히려 격은 상승해 있었다.

    황금 사신들도 그 격의 상승을 느낀 건지, 주변으로 몰려들어서 칭찬을 시작했다.

    ‘대단해!’

    황금 사신의 칭찬 세례를 받은 주황 사신은 애착 인간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지쳐 잠든 애착 인간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그리고 높은 돌멩이 위에 올라가서, 잘난척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금 사신들은 만세를 하고 폴짝폴짝 뛰기까지 하며 칭찬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대단해!’

    ‘동생 대단해!’

    황금 사신보다 조금 작아서 붉은 사신만 해진 녀석이 왕관까지 쓰고 그러고 있으니 조금 웃겼다.

    나는 그런 주황 사신에게 다가가서, 그 녀석의 왕관을 들어 올렸다.

    ‘!’

    하지만 왕관은 벗겨지지 않았다.

    어디서 주워서 뒤집어쓴 줄 알았는데, 머리에서 뿔처럼 돋아난 거였네.

    좀 특이한 뿔 같은 걸까?

    내가 왕관을 잡고 있는 것이 불편한지, 주황 사신은 버둥거리다가 하늘을 날아서 애착 인간의 품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황금 사신은 그 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쉽다니?’

    역시 황금 사신은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칭찬할 거리가 있을 때, 칭찬을 못 하면 아쉬워하는 녀석들이라니.

    이해할 수가 없군.

    황금 사신의 미스터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더니, 강풍이 불어왔다.

    휘이잉.

    탑이 워낙 높아서 그런지,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시멜로로 만들어진 탑은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마치 안전장치가 없는 놀이기구 같은 느낌이라서 그런지, 황금 사신들은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나저나 마시멜로인데도 용케 안 무너지고 있네.

    역시 미니 사신 정원산, 오브젝트 마시멜로답군.

    콕콕.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나에게 황금 사신 하나가 다가와서 내 볼을 찔렀다.

    ‘엄마! 바람개비!’

    나는 황금 사신의 요청에 마시멜로 탑을 커다란 ‘황금 사신 풍차’로 만들어 주었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미니 사신 정원과 연결된 만남의 장소.

    애착 인간이 없는 황금 사신들은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생겼다며, 히히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제임스 타워 공사 현장.

    제임스는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퍼져있는 CCTV를 긁어모아서 정교하게 이어 붙인 것 같은 동영상이었다.

    “이건, 정말 예상외로군.”

    온몸이 붉게 물든 회색 사신이 시선을 돌릴 때마다, 세계가 뒤틀리고 물들어 가고 있었다.

    회색 사신 머리 위에 떠오른 눈을 닮은 헤일로가 바라볼 때마다, 세계는 과자로 변하고 있었다.

    콘크리트는 마시멜로가 되었고, 강물은 핫초코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오브젝트들은 별사탕으로 변해서 흩어졌다.

    특히 ‘자유 도시 연합’의 오브젝트들은 인간처럼 생겨서 더욱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야말로 핵폭탄 이상으로 위험한 ‘특급 오브젝트’ 회색 사신의 진면목으로 보였다.

    다행히도 미니 사신과 인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작전은 성공이야.”

    사실 제임스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약간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한국 뉴스에 오브젝트 위험지역이 나오면, 회색 사신은 그곳으로 향할 확률이 높다.>

    그런 가설을 세우고, 조금 무리를 해서 뉴스에 ‘자유 도시 연합’을 내보냈으니까 말이다.

    한국 오브젝트 협회는 병적일 정도로 해외 오브젝트 소식을 방송하길 꺼려서, 방송 허가를 받기가 꽤 힘들었다.

    사실 회색 사신의 이런 성향이 최근에서야 확실해진 것도, 한국 협회의 성향 때문이었다.

    오브젝트 사건 사고를 은폐하고 숨기는 데만 급급하니, 원….

    그래도.

    그래도 인류 구원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군.

    제임스는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손에 든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보고서의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류 구원 시나리오 ③>

    <지구 전역의 미니 사신 정원화 시나리오와 예측되는 부작용.>

    그리고 그 밑에는 사인펜으로 휘갈긴 메모가 한 줄.

    <절대로 티라노사우루스를 건드리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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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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