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8

       프란체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에덴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거 맞나?”

       “…네.”

       “그럼 빨리 결정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프란체의 혼처 명단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도 딱히 확인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 명단 문서가 남아있나?

         

       “저번에 내가 건네줬던 명단은 어디에 뒀지?”

       “침대 옆 서랍에 있습니다.”

       “가져와라.”

         

       프란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침대에 서로 부둥켜 안고 숨어있던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일순 표정이 일그러진 프란체였지만, 금방 무표정을 되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명단을 확인하고, 지금 여기서 결정해라.”

       “아직 이 사람들이 누군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넉넉히 준 거 같은데.”

         

       눈을 얕게 뜨고 프란체를 노려보는 에덴. 그는 프란체의 대답을 재촉했다.

         

       “지금이라도 확인해라. 괜찮은 가문의 사람들로 선별한 것이니 데카르트 공작가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일은 없을 거다.”

         

       차가운 목소리. 날카로운 말투. 나는 저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귀족의 결혼이 대부분 권력과 힘에 의한 정략혼이라 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확인해야 한다.

         

       만약 프란체가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미친놈이라 폭력을 당하거나 몹쓸 짓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거다.

         

       원래부터 그런 족속들이니까. 그러니 지금까지 프란체가 받는 모든 고통을 만들었고, 방관했겠지.

         

       “왜 대답이 없지? 빨리 명단을 확인하거라.”

       “네…….”

         

       프란체는 마지못해 명단을 펼쳤다.

         

       “…전부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쁜 사람들입니다만.”

       “사교계의 평판이 중요한가? 그 가문이 어떤 걸 가졌는지가 중요하지.”

         

       저 새끼가 저걸 말이라고…….

         

       “프란체 데카르트. 너의 위치를 잊지 말아라. 그들의 평판이 어떻든 간에 너에게는 과분한 사람들이니.”

         

       저게 진정 동생에게 하는 말인가? 프란체가 사생아였더라면, 입양아였더라면 사람에 따라서 저런 취급은 받을 수도 있다. 진정한 가문의 일원이 아니니까.

         

       하지만 프란체는 명실상부 데카르트 핏줄을 완벽하게 이어받은 공녀다. 나는 아직도 저들이 프란체를 싫어하는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고 해서, 저렇게 싫어할 일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프란체와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프란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소 공작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혼처를 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덴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지? 너는 데카르트 공작가를 나가고 싶어하는 게 아니었나? 그리고 너의 나이를 생각해라. 더이상 영애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니까.”

         

       에덴의 말이 어느 정도 맞긴 하다.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다고 해도 프란체는 엄연히 성인. 더이상 데카르트 영애가 아닌, 레이디 데카르트다.

         

       현대 시대라면 모를까,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이자 역사 속에서만 기록되어 있는 세계. 20살이면 한참 전에 혼처를 결정해야 하는 나이.

         

       프란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에덴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그렇습니다.”

       “그건 데카르트 공작가를 나가서도 가능할 거 같은데.”

         

       아랫입술을 꽉 깨문 프란체.

         

       “데카르트 공작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일? 그게 뭐지?”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허, 에덴이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는군. 혼인하기 싫어서, 내가 보여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닌가?”

         

       혀에 칼날이 달린 듯한 날카로운 말투.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 새끼의 뺨을 풀스윙으로 갈겨버리고 싶다.

         

       에덴 데카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아무튼. 빠르게 결정해라.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다. 일주일 이내에 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혼약을 진행시킬 테니 그리 알도록.”

         

       쿵. 문이 닫혔다. 그제야 나와 카자르는 침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우,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그게 문제냐? 폭풍이 지나갔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요.”

         

       나는 조용히 프란체의 곁으로 다가갔다. 덜덜 떨리는 손. 분함을 이기지 못해 깨물다 살짝 찢어진 입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

         

       그녀의 표정에는 여러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지 알 것만 같았다.

         

       “명단에 있는 자들을 전부 죽이고 오겠습니다.”

         

       헉! 소리를 내며 카자르가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니. 제정신이에요? 제국에서 수사가 나오면 어쩌시려고…!”

       “소드 마스터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명단에 있는 귀족들을 다 죽여요? 열 명은 되어 보이는데?”

         

       나는 카자르의 말을 무시하고 프란체에게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들을 전부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렴.”

         

       프란체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명단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공작님을 뵈어야겠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프란체가 일어섰다.

         

       “나 혼자 만나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 * *

         

         

       프란체는 공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섞여 손에 떨림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왼손으로 떨리는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후우…….”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으면 공작님은 들어주실 거다. 그리고 기회를 한 번만 달라고 하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프란체는 그리 생각하며 문을 두들겼다.

         

       “공작님, 프란체 데카르트입니다.”

       ―들어와라.

         

       덜컥. 집무실의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사각사각. 만년필이 백색소음을 일으켰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집무실. 공작은 평온을 유지하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긴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탁. 사각거리던 만년필이 멈췄다.

         

       “부탁?”

       “네.”

       “말해보거라.”

         

       풀썩. 프란체는 예정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으며 쿵, 부딪혔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무릎은 왜 꿇는 것이지? 무슨 부탁을 하려고?”

       “소 공작님께서 혼처를 강요하고 계십니다. 저는 아직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프란체. 혼인하고 싶어서 지금처럼 부탁할 때는 언제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혼인을 하게 되면 저는 자유를 빼앗길 것이고, 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릴 겁니다.”

         

       능력이라는 말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단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라. 무릎이 다 상하겠다.”

         

       프란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고 싶은 게 무엇이지?”

       “사업입니다.”

       “…사업?”

         

       데카르트 공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는데, 사업을 하겠다고?”

       “그리 큰 사업은 아닙니다. 작게 시작해서 천천히 번창해나갈 예정입니다.”

         

       사실 프란체도 사업에 관한 얘기는 잘 모른다. 진이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냥 들은 것을 토대로 말을 지어낼 뿐이었다.

         

       “작은 사업이라, 그게 지금 하고 싶다는 건가?”

       “네.”

       “그래서 혼처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공작이 흐음, 하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사업을 하고 싶다는 건 의외구나. 페르시아 소 공작과의 약혼이 깨진 영향으로 단순히 투정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너를 너무 어린아이로 봤구나.”

         

       프란체는 입술을 머금은 채 공작의 허락을 기다렸다. 만약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을 준비까지 마쳤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자신의 가치를 능력으로 입증할 수 있다면, 자신감이 있다면 기회는 주어야겠지.”

         

       의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그제야 프란체는 쿵쾅거리던 심장의 울림이 잦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대신 실패한다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만 나가봐라. 혼처에 대한 얘기는 내가 잘 말해두겠다. 사업 계획서는 나중에 제출하고.”

       “감사합니다.”

         

       프란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공작이 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라곤 부르지 않은 것이냐?”

         

       그 말을 들은 프란체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까지 딸이 무슨 짓을 당하건 관심도 없고 아비 노릇이라곤 절대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냐고? 그의 역겨움에, 위선에. 프란체는 일순 구역질이 치솟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집무실로 찾아가 라인과 에덴에게 온갖 욕설과 핍박을 들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채 부탁해야 이룰 수 있었다.

         

       돈을 사용하는 것도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릴 때까지 머리를 박았다.

         

       이게 프란체가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최선이었다.

         

       오래전부터 시작해 목구멍까지 올라온 감정이, 지금까지 쌓아온 응어리진 원한이 터져 나올 것 같다. 프란체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에 대해서 할 말은 없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공작은 말없이 프란체를 지켜볼 뿐이었고,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 집무실을 나갔다. 프란체의 눈빛에서 생기 따윈 돌지 않았다.

         

         

       * * *

         

         

       나는 테이블에 앉아 프란체를 기다렸다. 괜히 불안한 마음에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데 그녀는 잘할 수 있을까.

         

       카자르가 물었다.

         

       “왜 그리 불안해하시는데요?”

       “나 없이 공녀님이 잘 하실까 걱정돼서.”

       “에이, 공녀님이 애도 아니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저 사람은 얼마 전까지 시종이 괴롭혀도 아무 말 안 하던 사람이라고. 이런 말을 해봤자 카자르의 성격상 이해할 것 같지 않기에 그냥 말을 말았다.

         

       그러던 그때. 문이 열리고 프란체가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프란체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혼인을 미루는 데 성공했단다.”

         

       성공한 건가. 다행이었다. 나 없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저번에 사업을 할 거라고 얘기했지?”

       “설마 사업을 빌미로?”

       “그래.”

         

       흐음, 사업을 빌미로 혼인을 미룬 건가. 상관은 없다. 어차피 사업을 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그 사업 계획이 뭔지 말해주지 않으련?”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의복 사업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 근데 이 제국에서 의복 사업은 어려워. 이미 유명한 의류점이 있는데, 거기가 다 꽉 잡고 있거든.”

         

       드레스와 사치품으로 돈 지랄을 많이 하시던 공녀님이라 그런지 잘 알고 있군.

         

       “그건 괜찮습니다. 그 모든 의류점을 밟아버릴 만큼의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장인이 한 명 있거든요.”

         

       프란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인? 그런 사람이 있어?”

       “아직 세간에는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죠.”

         

       게임을 할 때 서브 퀘스트가 하나 있었다.

         

       그 퀘스트를 클리어한 나로서는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퀘스트의 이름은 ‘불운을 맞이한 천금의 재능’.

         

       빛을 보지 못한 세기의 천재를 착취라는 굴레에서 구출하고, 그의 재능을 개화시키는 게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보상으로 드레스와 정장을 고를 수 있었는데, 디자인도 좋고 성능도 좋아서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프란체에게 물었다.

         

       “사업하는 걸 허락 맡았다고 했죠?”

       “그래. 돈은 어차피 내게 들어오는 게 있으니 그걸 사용하면 될 거고, 외출도 자유로워질 거야.”

       “그럼 준비합시다.”

       “그 사람을 찾으러?”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사업을 무조건 성공시켜줄 사람입니다.”

         

       그때. 카자르가 “저기.” 하면서 손을 들었다.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얘가 남았구나.

         

       “이렇게 된 거 너도 따라와. 이제 너도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일원이니까.”

       “프란체 코퍼레이션……?”

       “내 이름이 붙은 그 싸구려 같은 말은 뭐니?”

         

       ……프란체 코퍼레이션이 어때서.

         

       “크흠, 아무튼. 준비합시다. 할 게 많아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