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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

28화. 가자. 우리 차례다.
     
     
     
     
     
     
     
     
     
   강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여왕 흉내라도 내는 건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같잖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시에 평양에서 쫓겨나 언데드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박시연.”
     
   그러자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희번덕거리며 강호를 노려봤다.
     
   “감히 내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무엄하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재난 매뉴얼 패치(Ver.3) 업데이트]
   [각성 종 목록]
   [즉시 완료]
   [즉시 반영]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내용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박시연의 정보가 주르륵 쏟아졌다.
     
   [이름]: 박시연.
   [종]: 휴먼 / 서큐버스
   […]: ……
   [특성]: 몽환 술사.
   [등급]: Lv. 21.
   [강화]: 15%
   [속성]: 정신 지배. 일체화.
   [전문 기술]: 몽마. 환마.
   [기본 효과]: 매혹.
   [보조 기술]: 숙주화.
   [제한 효과]: 방공망 구축.
   [아이템]: 무기고(일반/한정).
     
   처음으로 ‘아이템’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그 외에도 의아한 내용이 다수였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확정된 변이상태였다.
     
   ‘혈청 주입으로 1차 변이, 자기장 피폭으로 2차 변이체가 됐다. 저 여자처럼 확정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걸까?’
     
   강호는 자신을 기준으로 박시연의 정보를 분석했다.
   여러 의미로 강호 일행의 각성 상태와는 결이 달랐다.
     
   ‘그나저나, 이젠 하다 하다 서큐버스까지.’
     
   강호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고 여전히 자색 기운을 풍기고 있는 그녀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남자들 눈동자가 다 동태눈깔이었다.
     
   ‘몽환, 혹은 환각 상태.’
     
   전부 뭔가에 취해있었다.
   그것이 꿈이든 최면이든,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박시연의 이능력일 것이다.
     
   그사이 박시연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뜻을 거역한 강호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무엄하고 괘씸해서 안 되겠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변하더니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흘린 신음에 강호는 깜짝 놀랐다.
   고속도로에서 찰나에 졸음운전이라도 한 것처럼, 잠깐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 환각?’
     
   박시연이 나신으로 자신을 감고 있는 걸 봤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한 감각이고 기분이었다.
   실제 겪은 기분이랄까.
     
   ‘역시, 서큐버스의 환몽.’
     
   경계심을 각오하던 순간, 강호는 다른 이유로 움찔 놀랐다.
   종 보관소에서 지겹게 들었던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린 것이다.
     
   삐이이이. 삐이이잉.
     
   “무슨 일이냐! 또 온 것이야?”
     
   박시연도 잔뜩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러자 뭔가를 급히 확인한 이정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며칠 지났다고 벌써…. 전부 당장 지휘실로!”
   “네!”
     
   모델 같은 훤칠한 경호원들의 호위와 의전을 받으며 박시연이 훅, 하고 사라졌다.
   단상 아래나 주위로 비상 출입문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뒤이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때까지도 강호와 일행은 엉거주춤 방어 자세로 급변하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들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봐요.”
   “익숙한 것 같은데요.”
     
   당장 크게 혼쭐이라도 내줄 것 같던 분위기였는데, 다 빠져나가고 그 큰 공간에 강호 일행만 덩그러니 남았다.
   잠깐 황당한 기분으로 이제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이, 단상 뒤쪽 문이 다시 열렸다.
     
   덜컹.
     
   “뭐 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정훈이 되돌아와 챙기지 못한 물건 챙기듯 강호 일행을 불렀다.
     
   “따라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나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지.”
     
   반대나 다른 의견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정훈을 따라나섰다.
     
     
   강호 일행이 이정훈을 따라간 곳은 높은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성의 구조를 가진 곳이니 성루나 감시탑 같은 기능의 장소인 것 같았다.
     
   “와. 정말 탁 트인 곳이네요.”
     
   리사가 신기한 듯, 하지만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그 작은 소리를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박시연이 들었다.
     
   “평양 시내 전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녀는 여전히 전방 아래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갑자기 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드르르륵. 드르륵.
   펑.
   퍼퍼펑.
     
   순식간에 성문 앞과 성곽 주위로 불꽃이 튀기고 연기가 자욱해졌다.
   강호는 강화된 시력으로 재래식 군용 화기에 몸뚱이가 갈려 나가는 좀비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되지 않았다.
     
   “지난 2차 웨이브보다 수가 더 많습니다.”
     
   누군가의 보고에 이정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놈들 수가 계속 배 이상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3차 웨이브는 포탑으로는 버티지 못합니다.”
     
   그에게 들었던 설명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반복된 대규모 좀비의 출현.’
     
   그때마다 박시연이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다 막아냈다고 했다.
   지금 돌아가는 걸 보니, 이제 곧 그녀의 이능력을 구경할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전면 방호 창을 개방해라.”
   “네.”
     
   구우우우우.
   텅.
     
   박시연이 로브처럼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끌며 앞으로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KARDASH.”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는 소리가 언어인지 주문인지, 고대어인지 외계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딴 걸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구오오오오.
     
   그녀의 몸에서 음파 같은 것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어느새 성 주위를 포위하듯 빼곡하게 몰려든 좀비들이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했다.
     
   좀비의 상태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저들끼리 꼭 끌어안고 뒹굴거나 서로를 물어 뜯기도 했다.
   강호는 적지 않게 놀랐다.
     
   ‘영혼이나 정신이 없는 좀비까지 현혹한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이 정도 대규모 환각을 펼칠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녀의 등급이 Lv.20인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런데, 새로운 양상이 목격됐다.
   좀비 무리 중앙으로 사람이 달려든 것이다.
     
   “사람! 생존자예요!”
     
   리사가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곧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퍼펑!
     
   자폭이었다.
   그가 달려들었던 좀비 무리와 함께 깨끗하게 사라졌다.
     
   “……!”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더니 곧 불꽃놀이라도 하듯 사방이 펑, 펑 터져나갔다.
     
   경악한 리사가 강호를 바라봤다.
   강호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정신 지배.’
     
   죽은 자들에게는 적아 구분에 혼란을 주는 현혹 정도였지만, 산 사람은 정신 지배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인간 병기로 활용했다.
     
   “왜, 왜 굳이 사람을…?”
     
   리사도 그런 사실을 알고 끔찍한 괴물을 보듯 박시연을 바라봤다.
     
   “똑같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거라면, 굳이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가요?”
     
   레이나도 참다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 말에는 이정훈이 답해주었다.
     
   “다릅니다. 다르니까 쓰는 겁니다.”
   “뭐가 다른 거죠? 폭탄도 화약 아닌가요? 그냥 쏘면 될 것을 왜….”
     
   이정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폭탄 아닙니다. 저 많은 좀비를 벌써 한 달 가까이 겪고 있는데, 포탄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되자 온갖 못된 짓을 일삼던 자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호는 열심히 두 팔을 펄럭이고 있는 박시연을 돌아봤다.
     
   ‘숙주!’
     
   폭발 물질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박시연이 사람에게 심어놓은 그녀의 에너지 기폭제일 것이다.
     
   ‘그래서 눈동자가 온통 검게….’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많은 사람을 언제까지,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아마 잠깐일 것이다.
     
   각성 초반, 리사는 화염을 쏟아내고 기력이 바닥 나 이후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박시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 지배를 속성으로 가진 만큼, 기력이나 체력이 아닌 정신력 소모가 상당할 것이다.
     
   ‘아무리 Lv.21이라고 해도….’
     
   강호는 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좀비 무리를 가만 바라봤다.
   확실히 그 수가 많이 줄어있었다.
     
   ‘여태껏 이 여자가 이렇게 버텨냈구나.’
     
   선과 악, 정과 사, 그렇게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살고 봐야 하는 생존의 문제다.
   그게 뭐든 한 가지 분명한 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3차 웨이브를 막으면, 더는 없는 건가?”
     
   갑작스러운 강호의 질문에 이정훈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도 확신이 없던 것이다.
     
   “내가 아까 말했지. 언데드는 좀비만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아직….”
     
   그의 대답이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스하아아아.
     
   뇌를 자극하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에 강호와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리치!”
     
   강호는 저도 모르게 뭔가에 이끌리듯 박시연의 옆으로 갔다.
   다른 일행들도 앞다퉈 그리로 갔고, 성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적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리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와버렸어!”
   “강호씨?!”
     
   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한 그날의 기억에 몸을 떨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목각인형처럼 홀려 죽고, 그 죽은 이들이 언데드가 돼 리치를 따르는 모습.
     
   강호도 난감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슬쩍 돌아보니, 박시연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강호는 그녀에게 낮게 말했다.
     
   “애썼다. 마무리는 우리가 하겠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승강기에 올라탔다.
     
   “가자. 우리 차례다.”
     
   
   
다음화는 08월 18일 08시 업데이트 됩니다.

28화. 가자. 우리 차례다.

강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여왕 흉내라도 내는 건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같잖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시에 평양에서 쫓겨나 언데드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박시연.”

그러자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희번덕거리며 강호를 노려봤다.

“감히 내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무엄하다!”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재난 매뉴얼 패치(Ver.3) 업데이트]

[각성 종 목록]

[즉시 완료]

[즉시 반영]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내용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박시연의 정보가 주르륵 쏟아졌다.

[이름]: 박시연.

[종]: 휴먼 / 서큐버스

[…]: ……

[특성]: 몽환 술사.

[등급]: Lv. 21.

[강화]: 15%

[속성]: 정신 지배. 일체화.

[전문 기술]: 몽마. 환마.

[기본 효과]: 매혹.

[보조 기술]: 숙주화.

[제한 효과]: 방공망 구축.

[아이템]: 무기고(일반/한정).

처음으로 ‘아이템’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그 외에도 의아한 내용이 다수였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확정된 변이상태였다.

‘혈청 주입으로 1차 변이, 자기장 피폭으로 2차 변이체가 됐다. 저 여자처럼 확정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걸까?’

강호는 자신을 기준으로 박시연의 정보를 분석했다.

여러 의미로 강호 일행의 각성 상태와는 결이 달랐다.

‘그나저나, 이젠 하다 하다 서큐버스까지.’

강호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고 여전히 자색 기운을 풍기고 있는 그녀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남자들 눈동자가 다 동태눈깔이었다.

‘몽환, 혹은 환각 상태.’

전부 뭔가에 취해있었다.

그것이 꿈이든 최면이든,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박시연의 이능력일 것이다.

그사이 박시연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뜻을 거역한 강호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무엄하고 괘씸해서 안 되겠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변하더니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흘린 신음에 강호는 깜짝 놀랐다.

고속도로에서 찰나에 졸음운전이라도 한 것처럼, 잠깐 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꿈? 환각?’

박시연이 나신으로 자신을 감고 있는 걸 봤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한 감각이고 기분이었다.

실제 겪은 기분이랄까.

‘역시, 서큐버스의 환몽.’

경계심을 각오하던 순간, 강호는 다른 이유로 움찔 놀랐다.

종 보관소에서 지겹게 들었던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린 것이다.

삐이이이. 삐이이잉.

“무슨 일이냐! 또 온 것이야?”

박시연도 잔뜩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러자 뭔가를 급히 확인한 이정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

“며칠 지났다고 벌써…. 전부 당장 지휘실로!”

“네!”

모델 같은 훤칠한 경호원들의 호위와 의전을 받으며 박시연이 훅, 하고 사라졌다.

단상 아래나 주위로 비상 출입문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뒤이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때까지도 강호와 일행은 엉거주춤 방어 자세로 급변하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들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봐요.”

“익숙한 것 같은데요.”

당장 크게 혼쭐이라도 내줄 것 같던 분위기였는데, 다 빠져나가고 그 큰 공간에 강호 일행만 덩그러니 남았다.

잠깐 황당한 기분으로 이제 뭘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이, 단상 뒤쪽 문이 다시 열렸다.

덜컹.

“뭐 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이정훈이 되돌아와 챙기지 못한 물건 챙기듯 강호 일행을 불렀다.

“따라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나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지.”

반대나 다른 의견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정훈을 따라나섰다.

강호 일행이 이정훈을 따라간 곳은 높은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성의 구조를 가진 곳이니 성루나 감시탑 같은 기능의 장소인 것 같았다.

“와. 정말 탁 트인 곳이네요.”

리사가 신기한 듯, 하지만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그 작은 소리를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박시연이 들었다.

“평양 시내 전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녀는 여전히 전방 아래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갑자기 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

드르르륵. 드르륵.

펑.

퍼퍼펑.

순식간에 성문 앞과 성곽 주위로 불꽃이 튀기고 연기가 자욱해졌다.

강호는 강화된 시력으로 재래식 군용 화기에 몸뚱이가 갈려 나가는 좀비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되지 않았다.

“지난 2차 웨이브보다 수가 더 많습니다.”

누군가의 보고에 이정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놈들 수가 계속 배 이상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3차 웨이브는 포탑으로는 버티지 못합니다.”

그에게 들었던 설명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반복된 대규모 좀비의 출현.’

그때마다 박시연이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다 막아냈다고 했다.

지금 돌아가는 걸 보니, 이제 곧 그녀의 이능력을 구경할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전면 방호 창을 개방해라.”

“네.”

구우우우우.

텅.

박시연이 로브처럼 치렁치렁한 긴 치마를 끌며 앞으로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KARDASH.”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는 소리가 언어인지 주문인지, 고대어인지 외계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딴 걸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구오오오오.

그녀의 몸에서 음파 같은 것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어느새 성 주위를 포위하듯 빼곡하게 몰려든 좀비들이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했다.

좀비의 상태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저들끼리 꼭 끌어안고 뒹굴거나 서로를 물어 뜯기도 했다.

강호는 적지 않게 놀랐다.

‘영혼이나 정신이 없는 좀비까지 현혹한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이 정도 대규모 환각을 펼칠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그녀의 등급이 Lv.20인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런데, 새로운 양상이 목격됐다.

좀비 무리 중앙으로 사람이 달려든 것이다.

“사람! 생존자예요!”

리사가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곧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퍼펑!

자폭이었다.

그가 달려들었던 좀비 무리와 함께 깨끗하게 사라졌다.

“……!”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더니 곧 불꽃놀이라도 하듯 사방이 펑, 펑 터져나갔다.

경악한 리사가 강호를 바라봤다.

강호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정신 지배.’

죽은 자들에게는 적아 구분에 혼란을 주는 현혹 정도였지만, 산 사람은 정신 지배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인간 병기로 활용했다.

“왜, 왜 굳이 사람을…?”

리사도 그런 사실을 알고 끔찍한 괴물을 보듯 박시연을 바라봤다.

“똑같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거라면, 굳이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가요?”

레이나도 참다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 말에는 이정훈이 답해주었다.

“다릅니다. 다르니까 쓰는 겁니다.”

“뭐가 다른 거죠? 폭탄도 화약 아닌가요? 그냥 쏘면 될 것을 왜….”

이정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폭탄 아닙니다. 저 많은 좀비를 벌써 한 달 가까이 겪고 있는데, 포탄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되자 온갖 못된 짓을 일삼던 자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호는 열심히 두 팔을 펄럭이고 있는 박시연을 돌아봤다.

‘숙주!’

폭발 물질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박시연이 사람에게 심어놓은 그녀의 에너지 기폭제일 것이다.

‘그래서 눈동자가 온통 검게….’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많은 사람을 언제까지,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아마 잠깐일 것이다.

각성 초반, 리사는 화염을 쏟아내고 기력이 바닥 나 이후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박시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 지배를 속성으로 가진 만큼, 기력이나 체력이 아닌 정신력 소모가 상당할 것이다.

‘아무리 Lv.21이라고 해도….’

강호는 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좀비 무리를 가만 바라봤다.

확실히 그 수가 많이 줄어있었다.

‘여태껏 이 여자가 이렇게 버텨냈구나.’

선과 악, 정과 사, 그렇게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살고 봐야 하는 생존의 문제다.

그게 뭐든 한 가지 분명한 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3차 웨이브를 막으면, 더는 없는 건가?”

갑작스러운 강호의 질문에 이정훈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도 확신이 없던 것이다.

“내가 아까 말했지. 언데드는 좀비만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아직….”

그의 대답이 마무리되기 전이었다.

스하아아아.

뇌를 자극하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에 강호와 일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리치!”

강호는 저도 모르게 뭔가에 이끌리듯 박시연의 옆으로 갔다.

다른 일행들도 앞다퉈 그리로 갔고, 성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적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고 있는 리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와버렸어!”

“강호씨?!”

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한 그날의 기억에 몸을 떨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목각인형처럼 홀려 죽고, 그 죽은 이들이 언데드가 돼 리치를 따르는 모습.

강호도 난감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슬쩍 돌아보니, 박시연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강호는 그녀에게 낮게 말했다.

“애썼다. 마무리는 우리가 하겠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승강기에 올라탔다.

“가자. 우리 차례다.”

다음화는 08월 18일 08시 업데이트 됩니다.


           


I Memorized the Disaster Manu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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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When a disaster strikes, I know what to do. Only I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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