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8

       학교생활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린다.

         

       황자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뻗치는데, 거기에 옛 악연까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단지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하고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0에 수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세상이 날 억까하는 게 맞다.

         

       무시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위치에 하스펠트가 있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맞대게 될 텐데…….

         

       [전 주인님과의 재회는 최악이었따….]

         

       넌 아가리 좀 하고.

         

       클리온 황자와 하스펠트 교수,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자유로워지는 근본적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학교 내에서 인맥을 잔뜩 만들어두는 것. 여차했을 때 날 변호해줄 사람을 모아야 한다.

         

       지금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고는 로테나 프레이, 헤를라인 선생님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는 아예 이름도 모르는 상태다. 딱 하나, 저 엘프만큼은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고.

         

       그래도 일단은 학급 전체 앞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보니 하스펠트도 나만 신경쓰진 않았다. 하스펠트 교수는 신입생의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가 뭐였는지는 기억 안 난다. 중요한 건 다섯 번째였다.

         

       “다섯째, 우리 학교는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교내에서의 연애를 일절 금지하고 있습니다.”

         

       오, 저건 괜찮네.

         

       그러자 뒤에서 ‘탁’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의자를 잡아끌었다.

         

       “세상에 그런 조항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나 했더니, 색욕에 미친 황자였다. 클리온 황자는 현 틸레트의 학칙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교외에서 그러는 것까진 학교에서 막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교내에서만 시행하는 학칙이에요. 불만 있나요?”

         

       3년간 노예생활을 해왔던 나라면 알 수 있다. 저 눈빛은 히스테리 게이지 50%일 때 보이는 눈빛이다.

         

       “불만이 있다면 이사회에 직접 찾아가시길 바라요.”

       “쯧.”

         

       볼수록 가관이다. 어떻게 된 게 공부하는 곳에서까지 여자 타령을 하냐.

         

       불행하게도 저 녀석이 집적거리려는 여성에는 나도 포함됐다. 그 점이 엿같았다.

         

       그나마 학생 신분으로 있는 동안에는 황자의 지랄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틸레트라는 이름의 방패는 그만큼 견고했다.

         

       문제는 졸업 이후였다. 졸업하고 나면 신분제의 울타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평민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틸레트를 졸업한 평민은 황제가 특별대우를 해 준다. 쉽게 말해서 귀족으로 추서한다. 못해도 남작 작위는 받을 수 있겠지.

         

       그래봤자 황자 밑에서 기어야 하는 건 똑같다. 작위를 하사받으니 오히려 평민보다 눈치를 더 봐야 할지도.

         

       [그러게요. 졸업하면 뭐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죠?]

         

       뭘 고민하나. 일 잘못되면 엘프나 수인의 나라로 튀어야지.

         

       아니면 그 전에 황자를 어떻게든 처리하든가.

         

       내 목표는 졸업 전까지 공계마도를 제외한 나머지 마도를 모두 익히는 것이다. 공계마도는 엘프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에서 완성해도 늦지 않는다. 애초에 엘프들이 그쪽 전문이기도 하고.

         

       인생계획을 점검하고 있던 사이에 조례시간이 끝났다. 드디어 담탱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 적어도 몇 시간은.

         

       **

         

       조례가 끝나자마자 1교시가 시작됐다.

         

       “첫 수업은 마수의 이해입니다. 원래는 기초화계마도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어제 입학식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이리 바뀐 것이니 참고하길 바라요.”

       “아, 첫날부터 수업이야?”

       “설마. 오티만 하고 진도는 안 나가시겠지.”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특별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학구열에 불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야 그렇지. 청춘이 얼마나 값진 것인데. 여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해서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에 합격했는데, 숨 돌릴 틈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의 처사도 없이 수업을 나가는 건 매정한 처사였다.

         

       딱 한 명에게만 빼고.

         

       “신난다. 뭘 배울까?”

         

       옆자리에 앉은 로테의 눈동자가 벌써부터 똘망거렸다.

         

       얘는 진짜다….

         

       [당신이 할 소린 아닌데요. 자기도 책 펴놓고 있으면서 왜 살리에르 영애한테만 그래요?]

         

       난 싫어도 해야 하니까. 이게 다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다.

         

       로테와 나는 각자 가져온 책을 읽으며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막간을 보냈다. 이 수업이 끝나고 나면 점심시간이니 식사도 할 겸 교보재를 사러 갈 생각이다.

         

       미닫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닫혔다.

         

       교실 안으로 들어온 건 다부진 체격을 한 중년 남성이었다. 

         

       턱수염이 가슴우리 위쪽까지 닿는 마초 선생님이었다. 공사장에서 돌아다니는 골렘들과는 다르게 상반신과 하반신을 균형 있게 조지신 모습이시다.

         

       로브를 두르고 있더라도 그 위로 튀어나오는 압도적인 근육량을 다 숨길 순 없었다. 옷감이 찢어질 듯한 이두박근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입 밖으로 스며나왔다.

         

       딱 봐도 ‘나 군인이오’ 라며 선전하고 있는 나이스 바디. 역전의 용사가 따로 없으신 선생님이 교탁 앞까지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두 만나서 반갑구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나와 로테는 재빨리 귀를 틀어막았다.

         

       [110데시벨 측정되었습니다. 음량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고막에 무리가 왔겠는데요.]

         

       “이번 학기 너희들에게 ‘마수의 이해’ 과목을 가르치게 된 알렉스 노엘하임이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

       “저기, 선생님…?”

       “음, 거기 남학생! 뭔가 질문이 있느냐?”

       “혹시 이거 실기 과목인가요?”

       “흠, 실기는 아주 가끔 치른다! 기본적으로는 이론 과목이지!”

         

       그러니까.

         

       뭔가…. 야외 체육시간에 봐야 할 선생님이 보건체육을 가르치러 들어오신 느낌인데. 

         

       “어제 입학식에서 있었던 마수 습격 사건을 두고 이사회에서 우선 이 과목부터 가르치라는 지시가 있었다. 특히 너희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으니까 말이야. 훌륭한 마도사가 되기 전에 중급 마수한테 목숨을 잃으면 저승에서 얼마나 억울하겠나!!”

         

       큰일이다. 이 선생님은 2시간을 풀타임으로 강의할 생각이다. 

         

       아이들도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안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칠판에 교재 및 참고도서명을 적은 알렉스 선생님은 곧바로 강의에 들어갔다.

         

       “음, 마수가 총 다섯 단계로 분류된다는 건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사실이지. 이 과목에서는 그런 진부한 이론보다는, 실제 상황에 기반한 대처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대처법이라면, 매뉴얼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마수는 등급별로 대처해야 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 또한 같은 등급에 속한 마수라도 어떤 행동패턴을 보이느냐에 따라 세부적으로 처치해야 하는 방법이 다르지. 이 모든 건 다 너희가 전장에서 개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커리큘럼이니 안전교육이라 생각하고 받도록!”

         

       이건 딴짓 안 하고 들어도 괜찮겠다. 처음 배우는 내용이니까.

       

       [오. 그러면 어제 드레이크와 대치했을 때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이 어떤 급의 마수인지도 이 과목을 통해 알게 되겠네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매뉴얼만으로 거기까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우선 만나자마자 도망가야 할 녀석들부터 알려주겠다.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마수는 무조건 재앙급 이상이니 제군들은 섣불리 덤비지 말고 후퇴하라, 알겠나?!”

         

       아니네?

         

       [역시 어제 만난 건 절멸급이겠네요.]

         

       잠깐. 재앙급일수도 있잖아.

         

       나는 손을 들어 질문 의사를 밝혔다.

         

       “그래, 학생! 무엇이 궁금하니?”

       “재앙급과 절멸급을 구분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입학시험에는 마도이론만을 공부했기에 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몰랐다. 그저 남들이 분류해놓은 기준에 따라 그렇구나 하고 넘겼을 뿐이지. 심지어 나는 중급 마수와 상급 마수의 경계선도 잘 몰랐다.

         

       “좋은 질문이군! 보통 마수의 급을 따지는 건 그 마수가 실질적으로 낸 피해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대도시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이면 재앙급으로 분류되고, 나라 하나를 거덜낼 수 있으면 절멸급이라고 이름 붙이지.”

       “그럼 절멸급 마수가 멸망시킨 나라가 있나요?”

       “당연히 있지! 서쪽의 수인 왕국이나, 현재는 마수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엘랑카야 산맥의 이름 없는 공국도 절멸급 한 마리에 초토화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륙사를 공부하면서 한 번 훑어봤던 기억이 난다.

         

       서쪽의 수인들이 지금의 연합체를 구성하기 이전에 그들이 만들었던 왕국 하나가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번성해온 그 맹수의 나라가 단 며칠 새에 아무런 예후도 없이 멸망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 수인 왕국을 침공한 절멸급이 가는 길마다 굵직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비를 맞은 자들의 몸은 철로 변했고, 그 철이 신체를 점점 잠식해 온몸이 금속으로 뒤덮인 수인들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고 전해진다.

         

       알렉스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테가 이어서 손을 들었다.

         

       “나라마다 국력이 다른데 그러면 기준에 혼동이 생기지 않나요? 어쩌다가 약소국 하나가 마수 하나에 무너진다면 그 마수도 절멸급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오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군! 그래서 요샌 새로운 분류기준을 도입하고 있지!”

         

       다음 순간, 알렉스 선생님의 입에서 이질적인 단어가 튀어나왔다.

         

       “자네는 혹시 구천지대계(九天之大械)라는 표현을 아는가?”

       “구천지대계요?”

         

       처음 들어본다.

         

       “가장 높은 하늘인 구천을 지배하는 여덟 기계라는 의미지. 마수들은 모두 철괴와 마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기계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어!”

         

       태초에 모든 마수를 만들어낸 마왕이 있었다.

         

       그 마왕을 보좌했던 직속 마수의 수는 아홉이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그 구전으로부터 구천(九天)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현재 그 마수들은 인간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마왕의 부활을 위한 의식을 준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쉽게 얘기하지. 언제든지 제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나, 마왕의 부활이 우선이라 그걸 미루고 있는 녀석들. 그 구천의 마수들만을 ‘절멸급’이라 부르기로 최근 마도사협회에서 결정을 내린 상태야.”

         

       방금 배운 내용을 정리하자면, 절멸급 마수를 판단하는 조건은 세 가지.

         

       ─ 안녕. 내 말 들리니?

         

       사람 말을 할 줄 알며.

         

       ─ 그래. 제국놈들은 잘 모르겠지만 수도는 반쯤 우리 손에 떨어졌어.

         

       나라 하나를 단신으로 멸망시킬 힘을 지니고 있는데.

         

       ─ 근데 말이야, 그러면 너무 시시하다고 아랫것들이 계속 땡깡을 쳐 피우잖아. 마왕님 부활시키는 게 애새끼들 장난도 아니고, 뭔 재미를 그리 찾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인류 멸망보다는 마왕 부활에 주력하는 마수.

         

       “간접적으로라도 마주해선 안 된다. 개중에는 사람의 의사까지 조작하는 놈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역시, 그 녀석은 절멸급이 맞았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