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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

       황폐함이란, 쇠락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누군가의 흔적으로 보이는 잡동사니, 옛 문명이 묻힌 토사 위를 활보하는 괴물들. 그리고 모래바람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별.

       

       한때 찬란했던 것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시대. 그나마 남은 것을 두 손으로 주워섬기고, 빼앗기지 않으려 꼭 쥐지만, 결국에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고 마는. 

       

       곱씹을 희망에는 이미 단물이 다 빠져 오히려 쓴맛이 나고, 다가오는 절망에 한탄하기에는 생존에도 급급한 그러한 시대에. 한 소년이 황폐한 대지를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에스페로입니다. 모두가 페로라고 줄여 불렀습니다.

       

       이 시대에서 움직이는 것은 셋 중 하나입니다. 괴물이거나, 관성이 남아 저도 모르게 움직이거나, 아니면⋯⋯ 정말 드물게도 희망을 품었거나.

       

       소년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장물아비 노파에게서 얻게 된 나침반. 노파는 이 나침반이 낙원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배곯을 걱정이 없고, 자신과 다음, 그리고 그다음 세대까지는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낙원을.

       

       죽을 날이 다가오는 노파의 고약한 장난일지도 몰랐습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먼저 낙원을 차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년은 믿었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소년은 광야를 걸었습니다.

       

       때때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약탈자들에게 쫒기기도 하고, 괴물을 피해 모래 구덩이에 숨어들기도 하고. 고생스러운 나날이었지만, 허무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침반에 표시된 거리는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여행도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크르르르⋯⋯ 으르륵.”

       

       “⋯⋯⋯⋯.”

       

       변이종 늑대. 엉성하게 이족보행을 하는 커다란 늑대가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습니다.

       

       변이종 늑대의 고약한 점은, 색적능력이 뛰어나고 빠르다는 것입니다. 소년이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전투 능력도, 아티팩트도 없는 작은 소년이었으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습니다. 소년 스스로도 이를 알았습니다.

       

       행운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행운이 오면, 언젠가는 불운이 옵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행운과 불운은 번갈아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운이 다했나 봐요. 아빠. 엄마.”

       

       소년은 푸념이나 한번 내뱉고, 다음 ‘행운아’를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체인으로 꼬아 목걸이처럼 만들어 둔 나침반을 벗어냈습니다. 이대로 착용하고 있어서는, 소년과 함께 변이종 늑대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버릴 겁니다. 누군가가 찾아내기도 어렵고, 어쩌면 망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리 벗어서, 최대한 멀리 던져두기로 했습니다.

       

       어느 운 좋은 생존자가 나침반을 발견해서, 그 사람이라도 낙원에 다다를 수 있기를. 그가 죽어 나간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행복한 삶을 누려주기를.

       

       소망을 담아, 던졌습니다.

       나침반은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흉터투성이의 손에 잡혔습니다.

       

       “⋯⋯어?”

       

       “그쪽의 작은 신사분,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빛바랜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 목에 두른 숄과, 가슴골이 깊이 패인 붉은 드레스가 특징적이었습니다. 어디를 봐도 전투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복장── 이지만. 

       

       저렇게 입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의 강함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살려주세요!”

       

       “후후,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크아아아아아아-!!”

       

       변이종 늑대가 어린아이 한 명 정도는 너끈히 삼킬 법한 커다란 입을 벌렸습니다. 흉흉한 이빨이 단두대처럼 닫혀왔습니다.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한 발짝 걸어서 늑대의 공격을 피해내더니.

       

       터엉-!

       

       손등으로 가볍게 턱주가리를 후려갈겼습니다. 늑대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습니다. 그러자, 가슴팍에서 보라색으로 점멸하는 심장이── 약점이 드러납니다.

       

       “다들 몸 어딘가에 핵이 있지 뭐예요? 잠깐 무력화시키면 드러나는 것도 같고.”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변이종 늑대의 가슴에 손을 박아 넣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습니다. 퍼엉, 하고 마력의 잔재가 흩어집니다. 늑대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죽었습니다.

       

       그녀는 주저앉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일레인이라고 해요. 작은 신사분의 이름은?”

       

       “에스페로⋯⋯ 페로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페로. 저는 이곳에 대해서 잘 몰라요. 아주 먼 곳에서 왔거든요⋯⋯. 정보를 얻고 싶은데, 신사분이라면 숙녀의 곤란함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겠죠?”

       

       윙크.

       

       페로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년의 행운은 조금 더 이어지려나 봅니다⋯⋯.

       

       ==============================================================

       

       바위 그늘의 뒤편, 두 사람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앉았습니다.

       

       소년 페로는 주홍빛 온기에 전율했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면 변이종들이 눈치채고 습격을 해 오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입장에서는 불을 피우기 힘듭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자그마치 몇 개월 만에 보는 불빛이었습니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늑대 고기도 정말로 설레는 것이었습니다. 바위 아래의 풍뎅이 따위를 먹어가며 연명하던 페로에게 있어서, 잘 구워진 고기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후후.”

       

       “⋯⋯⋯⋯.”

       

       일레인은 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는 페로를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습니다. 페로는 어쩐지,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묘하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페로는 허둥대다가, 나뭇가지에 꿰인 늑대 고기 꼬치를 집어 일레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 와중에, 눈을 마주치니까 부끄러워서 시선을 내렸다가, 깊이 패인 계곡을 목격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돌렸다가⋯⋯.

       

       결국은 눈을 질끈 감고 고기 꼬치를 내민다는 묘한 포즈가 되었습니다.

       

       “아하핫⋯⋯!”

       

       일레인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페로는 더욱이나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부끄러움의 무한 동력이었습니다. 소년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습니다.

       

       일레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미안해요, 페로. 저는 잘생긴 신사분을 보면 웃음이 나는 병에 걸렸거든요⋯⋯.”

       

       페로는 잘생긴 신사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당연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닥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나 길게 드리워졌을 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 저요?”

       

       “네, 작고 잘생긴 신사분.”

       

       “⋯⋯아, 아닌데요.”

       

       “맞는데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페로 역시도 얼굴이 발갛게 익을수록 고개가 내려갔습니다. 일레인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2황자나, 3황자에게도 이 정도로 귀염성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싶고.

       

       일레인은 소년을 이대로 울려보고 싶다는 음습한 욕망에 따르는 대신, 생산적인 주제로 넘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알아내야 할 게 많았으니까.

       

       하루 동안 세상을 떠돈 일레인은, 이 세계가 상당히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괴물들뿐이었고, 간혹 보이는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잔해뿐이었으니.

       

       그러나 이 근방이 유독 위험한 것인지, 아니면 세계 전체가 이 꼴인지는 미지수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주친 괴물들은 처리하기 쉬웠지만, 그렇지 않은 괴물이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좀 더 소소한 걱정거리로는, 사용하는 단어나 제스처의 의미가 다를지도 모릅니다. 이 자그마한 소년에게 어떻게 정보를 캐내면 좋을까⋯⋯ 일레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기로 합니다.

       

       “페로, 제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줄래요?”

       

       “기, 기억을 잃어버리셨나요⋯⋯?!”

       

       기억상실 코스프레.

       

       제국 수호 방위국의 요원이 타지의 민간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둘러댈 때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검증된 무기답게, 이 소년에게도 먹힌 듯 보입니다.

       

       “네. 이름은 기억하지만⋯⋯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니까, 음⋯⋯, 어디부터 설명하면 좋담⋯⋯.”

       

       소년은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설명하다 보니 두서가 없고 난잡했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 씀씀이만큼은 잘 느껴졌습니다.

       

       일레인은 머릿속에서 정보들을 차곡차곡 요약해 정리했습니다.

       

       1) 변이체라고 불리는 괴물들에 의해 인류는 쇠락의 길을 걷는 중. 

       2) 국가는 멸망한 지 오래이며, 커다란 단체라고 해 봤자 부족 사회 수준.

       3)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은 주로 숲이나 동굴에서 숨어 사는 중.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이후, 일레인은 소년 페로에게 관심을 두었습니다.

       

       “당신이 하루 동안 헤매서 처음 만난 사람이에요. 페로, 여기는 원래 이렇게⋯⋯ 인적이 드문가요?”

       

       “아, 네. 아무래도 변이체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지형이니까요. 식량을 구하러 멀리 나온 사냥꾼이 아니면, 이런 황무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요.”

       

       “그러면 페로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요? 사냥꾼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저는 낙원을 찾고 있어요.”

       

       “낙원이요?”

       

       “네. 안전하고, 식량이 아주 많은 곳이래요. 그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쫒아가면 찾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일레인은 만지작거리던 나침반을 살펴보았습니다. 붉은 화살표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화살표 아래로 남은 거리가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제법 잘 만들어진 아티팩트로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심심풀이 삼아 속이려 만들었다기에는 만듦새가 좋았으니, 낙원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꽤 높았습니다.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세계에서 안전과 식량을 보장한다라. 무척이나 달콤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게 진짜라면⋯⋯ 정말 소중한 물건인 거네요.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 왜 던졌나요?”

       

       “변이체한테 먹히면, 다른 사람이 나침반을 찾기 힘들 테니까요.”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나요? 그렇게 남을 배려해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텐데.”

       

       결국 자신이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 의문에 대해서, 소년 페로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운 좋은 누군가가 제 몫까지 행복해 줄 테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페로의 행복에 끼어들어도 되겠죠?”

       

       “물론이에요!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그리고, 낙원에는 다다음 세대까지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 있다니까, 두 명이 들어가서 살아도 한참이나 남을 거예요!”

       

       “상황에 따라서는 부족할지도 몰라요?”

       

       “⋯⋯?”

       

       

       일레인은 손목의 시계 문신을 바라보며 임시 목표를 정했습니다. 이 세계가 환상이어도, 현실이어도. 낙원에 도착해서 안전을 보장받는 건 괜찮은 선택지로 보였습니다. 즐거운 동행이 될 것 같기도 했고요.

       

       또, 중간에 위험한 일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미끼 역할이 하나쯤 필요했으니까.

       

       ===============================================================

       

       낙원까지 남은 거리.

       약 400km.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2.03)

    인제 보니까 작가의 말도 안 남기고 그랬네요… 저어가 자격증 시험 준비때문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되게 덤벙거리는 나쁜 버릇이 있어가지구…

    셀프 통조림하고 시험 준비 겸 비축분을 쌓는 시간이었답니다. 연참은…! 죄송하다는 말씀밖엔 드릴 수가 없지만! 다음주의 원활한 정시 연재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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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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