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8

     

    “후우.”

     

    나는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직 머리가 핑 돌지만 집중해야 했다.

     

    카밀라와 대치하며 아셀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뻗은 손에서는 황금빛 마나가 일렁인다.

     

    “아셀라, 대체 무슨 생각이더냐?”

     

    카밀라가 분노를 간신히 삭이며 말했다.

     

    아셀라는 내가 아는 잔혹한 악녀로서의 태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마마마, 제 신하들은 모두 추후 승계에 사용할 중요한 비품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그게 감히 내 마법을 막은 이유가 된단 말이냐?”

     

    “비품을 망가뜨려 제 파벌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행위를 제가 지켜보고만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하, 네 파벌이라고?”

     

    카밀라가 코웃음을 쳤다.

     

    “네 파벌이라니. 이 황실 어디에 네 파벌이 있다고? 이 궁의 기사와 시종 모두 황비인 내게 충성을 바치고 있잖느냐?”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모르죠. 하지만 더는 아니에요.”

     

    “너, 그게 무슨…!”

     

    아셀라는 핏줄이 돋은 카밀라를 무시하고는 문을 향해 가볍게 명령했다.

     

    “기사들, 입장해.”

     

    즉시 쾅 방문이 열리고 아셀라의 호위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아셀라를 보호하며 감싸는 기사들.

     

    카밀라의 퇴거 명령과 아셀라의 입장 명령은 상호 충돌한다.

     

    하지만 기사들은 아셀라의 명령을 따를 것을 선택했다.

     

    이 월광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너, 아셀라. 어느 틈에…!”

     

    “어마마마야말로 선택하실 때입니다. 지금처럼 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의 제3 황녀파의 편에 서실 것인지, 앞으로도 제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셔서 뒤안길로 물러나실 것인지.”

     

    그녀의 협박을 들은 카밀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눈동자에서 탁한 흑색의 마나가 소용돌이친다.

     

    아셀라도 이번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듯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둘 사이에서 전류가 튀듯, 마나의 흐름이 점점 격해진다.

     

    잠시 간의 대치 끝에, 마침내 카밀라가 몸을 틀어 밖으로 나갔다.

    전속 호위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황실의 모녀갈등은 살벌하네.’

     

    괜히 나만 사이에 껴서 손해봤다.

     

     

    [No. 058 : 마법 고문 14% → 0%]

    [삭제됨]

     

     

    이 바보 같은 배드엔딩 때문에.

     

    그래도 또 하나 지울 수 있었다.

     

    나름 만족스럽다.

     

    “쿨럭, 쿨럭.”

     

    숨을 몰아쉬느라 나오는 기침을 손등으로 막았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타냐가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내저었다.

     

    고문이나 다름없는 실전형 공격 마법을 딸에게 사용해왔다니, 황비도 도통 제정신은 아니다.

     

    배드엔딩이 삭제됐다. 앞으로 그녀가 마법으로 아셀라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이다.

     

    덕분에 내가 고문당할 미래도 사라졌다.

    미리 싸게 체험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공자.”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아셀라가 내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불러놓고는 어째 아무 말이 없이 노려보기만 한다.

     

    이번엔 뭐가 그리 불만일까.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 황비와 관계가 틀어졌으니 책임이라도 져야 하나 보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왜 그랬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묻는 아셀라.

     

    그리 물어봐도 엔딩리스트는 설명할 수 없으니 정석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주치의로서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황녀님의 옥체에 갈 부상을 방지하는 일 또한 제 업무 범위지요.”

     

    “그게 다야?”

     

    “그게 다죠.”

     

    내 대답에 아셀라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스트레스의 알기 쉬운 증상입니다. 휴식을 취하고 햇빛 쬐기를 추천…”

     

    “시끄러워.”

     

    “그럼 조용히 있지요.”

     

    “…아프진 않았어?”

     

    거짓말 안 하고 드럽게 아팠어요.

     

    …흠.

     

    이 질문의 의도는 뭘까.

     

    어쩐지 아셀라는 내 눈치를 보는 낌새다.

     

    막스면 모를까, 내가 다쳤나 걱정할 리는 없을 텐데.

     

    아닌가.

     

    설마 진짜 걱정하고 있나?

     

    그 아셀라가 나를?

     

    에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제 강인한 육체에는 흠집도 못 낼 허약한 위력이더군요.”

     

    “풉.”

     

    지금 비웃었냐.

    그래, 내 근력 구려.

     

    “황녀님에겐 큰 부상이 될 수도 있는 마법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황비전하의 특별수업은 그만두시죠.”

     

    “그건… 후우.”

     

    “애초에 이 궁은 황비님이 아니라 승계권자인 황녀님의 것 아닙니까.”

     

    “그대의 말이 맞아. 그래도….”

     

    아셀라가 말꼬리를 흐렸다.

     

    “어마마마니까….”

     

    작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소리지만 똑똑하게 들었다.

     

    주치의가 된 후로 아셀라의 의외의 면모를 많이 알게 된 느낌이다.

     

    “황비전하와의 언쟁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지셨습니까.”

     

    “공자,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고.”

     

    “주의하지요.”

     

    홱 몸을 돌리고 팔짱을 낀 아셀라는 꽤 초조해 보였다

     

    시녀장 누님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황녀님께서 황비전하와 이만큼이나 충돌하신 일은 처음이에요. 많이 놀라셨을 수도 있어요.”

     

    “저도 놀랐는데 좀 위로해주세요.”

     

    “그런 부탁은 황녀님께 해보세요.”

     

    “단두대랑 데이트하게 되겠네요.”

     

    시녀장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말을 이었다.

     

    “내일은 황녀님께서 마법 수업이 있으셔요. 선생님께서 소식을 전해주시면 더 좋아하시지 않겠어요?”

     

    왜 굳이 내가?

     

    “마법 수업은 궁정 마법사와 진행합니까?”

     

    “네.”

     

    모처럼 시녀장 누님이 조언해줬으니 따르기로 했다.

     

    “황녀님.”

     

    “아직 안 갔어?”

     

    “내일은 마법 수업이 있으십니다.”

     

    “마법 수업… 그랬구나.”

     

    마법이라는 말에 아셀라의 볼이 탱글 튀어 올랐다.

     

    그러고 보면 아셀라는 마법을 참 좋아한다.

     

    “공자도 동행할 거지?”

     

    “예, 당분간은.”

     

    “흐응, …무슨 마법을 보여줄까.”

     

    아셀라는 황궁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미소를 내보이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

     

     

    “크윽, 허억, 허억.”

     

    4층에 위치한 내의원 사무실은 올라올 때마다 숨이 턱 끝까지 들어찬다.

     

    왜 하필 4층에 배정됐나 했더니 저층은 이미 기존 파벌들이 다 쓰고 있어서 빈자리가 없다고 한다.

     

    약세 파벌은 구석탱이로 꺼지라는 소리다. 당연한 소리긴 한데 열 받는다.

     

    “내의원에서 파벌을 키우면 1층으로 사무실을 옮길 수 있겠지. 내가 이사 가고 만다.”

     

    “선생님이 근력을 키우시면 될 일 아닙니까.”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으니 타냐가 나를 타박했다.

     

    “단장이 업어줘.”

     

    “등이 안 비어서요.”

     

    타냐는 사람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박스를 두 개나 등에 짊어지고 올라온 참이었다.

    그러고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

     

    “본가에서 도착한 소포입니다.”

     

    쿵, 타냐가 박스를 내려놓았다.

     

    아직 황궁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첫 소포가 도착했다.

     

    슈프레 상단의 직인이 붙은 명세서를 떼어내니 발송인엔 ‘네리아 고트베르크’라고 적혀 있다.

     

    시기를 보면 거의 내가 떠나자마자 보낸 듯한데, 정말이지 성실하다.

     

    박스 하나에는 직접 하나하나 곱게 뜯어낸 장미꽃잎과 대량의 벌꿀사탕, 버드나무 껍질 등 여러 재료가 들어있었다.

     

     

    ―오라버니! 오늘 저택에선 날씨가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 서두로 시작하는 손편지도 동봉되어 있어서 정독한 후 품속에 넣어놨다.

     

    다른 쪽에는 지역특산품인 커피콩이나 육포 등 먹을 걸 바리바리 싸놨다.

    특히나 육포는 보리스가 준비한 물건이란다.

     

    “육포 좋지.”

     

    단백질은 신체에 중요하다.

    내 몸은 특히 더 원하고 있을지도.

     

    타냐의 튼실한 상완근과 내 얄상한 이두근을 비교해보니 은근 필요성이 느껴진다.

     

    “근력 강화제라… 스테로이드가 가장 직관적이긴 하지.”

     

    부작용도 심한 호르몬이지만 이전 주치의 시험같이 몸을 쓸 일은 앞으로도 또 있을 예정이다.

     

    단기적으로 근력을 강화할 약제를 비상용으로 준비해놓을 필요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연금술 랭크에서는 아직 화학 구조식까지 원하는대로 건드리긴 힘들어.”

     

    이 단계를 넘기면 여러 약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약은 결국 화학이 기본이다.

     

    “우선 오늘은 아셀라의 마법 수업 참관.”

     

    무려 ‘현자’라고 불리는 대마법사.

    제국의 궁정 마법사 ‘시모어’를 만날 시간이었다.

     

     

     

    ***

     

     

     

    “하하하, 이게 누구야. 아셀라! 오랜만에 조그만 마법 천재를 만나니 늘어진 궁둥이가 다 방방 뜨는군!”

     

    현자 시모어는 콧수염을 우스꽝스럽게 꼬아놓아서 광인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오랜만에 가르침을 받습니다, 스승님.”

     

    반면 아셀라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시모어에게 인사했는데, 내게는 정말이지 기묘한 모습이었다.

     

    마치 공원 노숙자에게서 카포에라를 배우는 여자 중학생같이 위화감이 큰 그림이랄까.

     

    나는 둘의 마법 수업을 호위기사, 시종들과 함께 견학했다.

     

    “허허, 오랜만이라 기억도 안 나는군. 어디까지 했었더라. 아, 다중평면에서 수식 충돌 없이 진을 그리는 방법이었지. 고위계 마법 개발엔 반드시 익혀야 하는 기술일세!”

     

    수업 중인 아셀라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유난히 반짝였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는 지식을 갈구하고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실습에 들어간다.

     

    ―파즈즈즈…

     

    아셀라가 공중에 그려가는 기묘한 도형과 술식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도형 버전으로 만들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뭐라고 설명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그렇다.

     

    중간부터는 아예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아셀라는 중간중간 나를 흘긋 돌아봤다.

    내가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는지 감시라도 할 양인지.

     

     

    두 시간쯤 후 시간이 되었기에 사탕을 꺼내 하나 입에 물었다.

     

    그러니 시모어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거, 맛있는가?”

     

    “고트베르크 후작령의 명물입니다. 하나 드릴까요?”

     

    “줘보게.”

     

    마침 네리아가 보내줘서 합성하지 않은 원본 사탕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 꺼내 시모어에게 넘겼다.

     

    그는 입안에 사탕을 넣더니 와그작, 단숨에 깨물어 삼켜버렸다.

     

    나이에 비해 이빨이 튼튼하시네.

     

    “드실만 하셨습니까?”

     

    “하하하, 나야 모르지.”

     

    “모른다?”

     

    “나는 현자일세. 자네는 아셀라의 새 주치의라지.”

     

    “라스 고트베르크입니다.”

     

    시모어가 씨익 웃으며 내게 몸을 붙였다.

     

    노숙자상과 다르게 체취가 나쁘진 않았다.

     

    그가 싱글거리며 내게 말했다.

     

    “자네, 대단한 재능이 있구먼.”

     

    현자 칭호가 그냥 주어진 건 아닌지 감이 좋은 노인이었다.

     

    “주문에는 관심 있나?”

     

    그가 내게 물었다.

     

    흠.

     

    “근력강화 비약 제조 주문도 있습니까?”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