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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

       내가 시원스레 까버린 마리엘의 비밀은 사실 대미궁에 명계의 문이 열린 것 만큼이나 중대한 문제였다.

        갤러리의 파딱은 정보부에서 기를 쓰고 찾으려 하는 2급 수배서 명단에 올라와 있는 인명.

        최고 관리자인 주딱에게 닿기 위한 뇌관일 뿐 아니라 사실상 갤러리를 운영하는 공범에 가까운 존재다.

        따라서 마리엘의 입장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입을 막아야 했다.

       

        “악! 잊어! 잊으세요! 머리, 머리 이리 대요!”

       

        첫 단계는 물리적인 폭력.

        흡사 다이빙을 하듯 몸을 날리더니 고사리같은 손으로 내 머리를 콩콩 때렸다.

        시야가 흔들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신비의 파편이 새겨진 살덩이가 눈앞에서 출렁이자 기억은 더욱 또렷해졌다.

        연약한 완력으론 나를 밀어낼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마리엘은 놀랍게도 두뇌를 쓰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관리인!”

        “네.”

        “관리인이 이걸로 절 때려요! 빨리!”

       

        원칙의 시계탑을 이용해 내가 위치노트를 보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려는 속셈인가.

        허나 그런 얄팍한 수에 당할 내가 아니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버리자 마리엘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든 신비를 발동시키려 애썼다.

       

        가슴팍에 박치기를 하거나, 내 턱을 깨물거나, 온몸을 들이 밀어가며 위치노트의 모서리로 자신을 때릴 것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입술이 부딪힐 뻔 했지만,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암묵적으로 움직임을 멈췄기에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여자를 때리는 쓰레기가 될 기회여요!”

        “전 그런 사람 되고 싶지 않은데요.”

        “제게 딱콩 한 번만 해주면 홀크로프트가 소유하고 있는 죽음의 협곡을 떼어주는 것이에요!”

        “필요없어요. 멸지(滅地)잖아요 거기.”

        “그, 그럼 결혼……! 그래, 결혼이어요! 홀프로프트의 여자는 대대로 아이를 잘 먹이고 내조도 뛰어나기로 사교계에서 평판이 좋았던 것이에요!”

        “…….”

        “어떤가요!? 관리인 인생에서 유일하게 이런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할 기회를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당장……!”

       

        오, 마지막 건 진짜로 한 대 쥐어박을 뻔 했다.

        어차피 내가 그녀를 공격하게 되면 어떤 약속이든 없던 일이 되어버릴 테니 전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결국 창문에 습기가 맺힐 정도로 격렬한 몸씨름 끝에, 신비로 과거를 덮을 수 있는 시간도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내게 약점을 잡혀버린 마리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잉잉 눈물을 짜냈다.

       

        “어디 보자 여기서 제일 가까운 치안대 사무실이…….”

        “아아악! 살려주는 것이에요!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정말로?”

        “네?”

       

        금박이라도 입힌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칼과 한 번 깨물면 영영 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희끗한 살결.

        나는 뒤늦게 이불을 끌어다 그 두 가지를 숨기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뭐든지 들어주신다니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군요. 갤러리의 관리자였다는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하시겠죠?”

        “관리인?”

        “비밀을 지켜드리는 대가로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아니, 부탁은 아니네요.”

        “서, 설마……!”

       

        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이불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려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가까이 파고들었다.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운 채 끌어안듯이 몸을 밀착한 상태.

        차마 나를 밀어내지 못한 손이 자꾸만 가슴께로 향한다.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지그시 노려보자 붉어진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과, 관리인. 너무 가까워요. 숨결이 닿으니까 그만……!”

        “마리엘.”

        “히끅! 네에……!”

       

        나는 설탕과 우유 냄새를 풍기는 마리엘의 상체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선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윽고 체념한 듯한,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조금의 기대를 담은 눈동자가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서서히 거칠어지는 숨결이 목구멍 안을 간질일 정도로 서로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앞으로 이주일 안에 마법 세 개 만들어 오세요.”

        “엑?”

       

        나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신비의 파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

       

        마리엘은 마치 마른 행주마냥 쥐어 짜면 짜낼 수록 성과를 뽑아내는 타입이었다.

        파딱의 업무를 모조리 몰아줬는데도 시작의 층을 건너뛴 나와 같이 대미궁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수련의 층에 머무는 동안 내게 바칠 마법을 만들어오라 단단히 일러둔 뒤, 가벼운 마음으로 기숙사를 나왔다.

       

        이제 남은 두 사람을 구할 차례였다.

       

        ‘시엔은 요즘 뭐 하지?’

       

        예전엔 시시콜콜한 질문이나 밖에서 보기 민망한 사진들을 보내곤 했는데 마법제 이후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부탁이 하나 있는데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지금 뭐해?

        수련이 최고야 : 지그ㅁ 바ㅃㅏ

        ====

       

        오랜만에 위치노트로 메시지를 보내 보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당장 답장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왜? 마법제에서 나한테 개털리고 폐관수련 중?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근데 네가 못해서 진 건 아니야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해주학파가 좀 사기잖아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연금학파를 선택한 수습생이 제대로 된 마법사로 자라날 수 있을까? 지금도 난 잘 모르겠어

        초전도체은발미소녀 : (비참하게 얻어터진 경기 후 사진)

        수련이 최고야 : 히13갸ㅔㅂ들 너죽우ㅕ버릴ㅇ그야

        ====

       

        시엔은 최소 39층에 있었기에 본인이 직접 내려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후보로 놔두고 점찍어둔 나머지 한 명을 찾아가기로 했다.

        마리엘은 협박으로, 시엔은 친분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었지만 마지막 한 사람만큼은 둘 다 통하지 않았다.

       

        “비나 님 잠깐 괜찮으신가요?”

        “무슨 일이죠 사감?”

        “제가 이번에 수련의 층에 올랐는데 긴히 부탁드릴 일이…… 지금 뭐 하세요?”

       

        엡실론 관의 복도에서 마주친 비나는 자판기 앞에 서서 끊임없이 버튼을 누르던 중이었다.

        처음엔 자판기가 고장나서 저러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얼음물’ 이외의 모든 음료를 뽑아서 품절시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사고의 끝에 도달한 행위인지 애써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내게 비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마감된 커다란 여행가방이었다.

       

        “받으세요. 안 그래도 사감을 찾고 있었어요.”

        “어디 가십니까?”

        “얼마 전 미궁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조사위원회가 발족됐어요. 장소는 44층의 ‘공역(空域)’. 저도 니플헤이르의 일원으로서 위원회에 참가해야 해요.”

       

        대미궁에 마족이 침입했다는 사실에 마탑의 윗선인 마도 가문들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됐다.

        본래 칠현자의 직계까지 참석하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그녀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칠현자이신 밀로네 님께서 직접 소집을 천명하셨어요. 그분의 직계인 저 역시 글레시아 학파를 대표하여 공역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럼 강의는 당분간 쉬어야겠군요. 이 짐은 승강기까지 들어다드리면 될까요?”

        “아뇨, 사감이 가지고 따라오면 돼요. 안은 함부로 열어보지 마세요.”

        “따라오라고요?”

       

        나는 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는 음료수 병들을 잠시 내려다 보았다.

        어쩌면 과한 갤질이 천재적인 순혈 마법사의 머리를 망가뜨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례지만 저는 아직 11층까지밖에 못 올라가는데요.”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사감은 제가 바보인 줄 아나요?”

       

        비나는 고개를 휙 하고 돌리더니 그대로 나를 지나쳤다.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가자 장갑을 낀 손이 처음 보는 종이 두 장을 내보였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공역이 개방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에요. 수습생을 받는 시기엔 하층에 자원을 집중하느라 대부분의 가문들은 중층에 오를 준비가 안 되어 있거든요.”

        “그렇죠?”

        “그럼에도 앞으로 마탑의 행보를 정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가문이 위원회에 참석해야 해요. 이건 그를 위한 ‘급행’의 티켓이에요.”

       

        ‘급행’이란 본래 정상적으로 등반을 한 이들만 접근할 수 있는 마탑의 다른 구역까지 한시적인 이동을 허가해주는 장치였다.

        물론 한 번 올라가면 다시 열차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잘못했다가는 본인의 실력보다도 아득히 높은 층에 평생 갇히는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등반에서 자유로운 그녀에겐 굳이 이런 티켓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혹시 저를 위해서 준비하신 겁니까?”

        “……짐을 들 사람이 필요해요.”

       

        비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걷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그리고 수준 높은 마법사들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사감에게도 나쁜 기회가 아닐 거에요.”

       

        그녀를 따라 도착한 플랫폼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

       

        마탑에서 마도가문이라 하면 크게 둘을 일컫는다.

        칠현자의 핏줄을 이은 순혈과 그렇지 못한 백가(百家).

        어느 쪽이 더 많냐고 한다면 당연히 백 개가 넘는 가문들의 연합인 백가 쪽이었다.

       

        급행을 타기 위해 대기중인 플랫폼에도 순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에도 빛이 나는 외모를 지닌 사람은 비나와 그녀의 친구인 크리스티나뿐이었다.

       

        “꺄악! 왜 이렇게 늦었어 비나! 사감 님도 오랜만이에요!”

        “오래간만입니다. 위치노트는 잘 쓰셨나요?”

        “그게요~ 비나한테 잠깐 빌려줬었는데 그새 영구 정지를 먹었더라고요! 사유가 뭐, 뭐라더라? ‘-글평- ’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

        “저런, 여기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되도록 다른 사람에겐 넘기지 마세요.”

       

        가벼운 인사 이후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벨이 울리며 탑승이 시작되었다.

        순혈 마법사 둘과 함께 타는 만큼 당연히 자리는 일등석이었다.

        급하게 챙겨온 개인 짐을 승무원에게 맡긴 나는 비나의 가방만 들고 두 사람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새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늘어 있었다.

       

        “글레시아의 빛나는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역까지 저희 셀루시아 가문에서 보필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감사하지만 저희는 이미 일행이 있거든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백가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로브의 문장 아래에는 1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남자는 내 몰골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아니, 고작 사용인 하나를 데리고 공역에 들어가신다고요!? 그것도 이 마나의 기운은 더럽고 추잡스러운, 으음……!”

       

        로브에 가려진 목 아래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은 정령문이었다.

        확실히 정령사들은 순혈 마법사에게 끌리는 반면 나 같이 모험가 활동을 많이 한 이들에겐 본능적인 거부감을 품는 듯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그에게 어떤 경위로 묻게 된 피인지를 차분히 설명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열차가 출발해버릴지도 모를 노릇.

        나는 위치노트를 꺼내어 그의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이, 거기! 보아하니 귀족은 커녕 모험가 나부랭이인 듯한데 욕심은 접어두고 이쯤에서…….”

        “급한 연락이 오신 것 같은데 받지 않아도 괜찮으신가요?”

        “뭐? 어디…… 아아아악!!!!”

       

        위치노트를 확인하자 마자 눈을 가린 채 바닥을 뒹구는 백가의 남자.

        한 번 본 순간 시신경에 달라붙어 최소 한 달간 지워지지 않는 개조 전술핵의 위력은 플랫폼 바닥을 정령사의 눈물로 적시기에 충분했다.

       

        “저흰 타죠. 곧 출발할 것 같으니.”

        “그, 그럴까요?”

        “그것도 제가 받아드릴까요?”

        “어머, 고마워요!”

       

        나는 크리스티나의 가방까지 챙겨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후 대책으로 그의 계정을 악질들이 암약하고 있는 ‘핵융합 게시판’에 초대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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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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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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