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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

       

       

       “후으읍···!”

       

       -빠악!

       

       

       고정되어있던 샌드백이 부숴지며 내용물을 흩뿌렸다.

       

       쯧.

       

       갈아야겠네.

       

       주위를 둘러보자 망가지고 부서진 훈련기구들이 늘어져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살짝 미안함을 느끼며 종을 흔들었다.

       

       딸랑, 딸랑.

       

       종이 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다가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아, 할아범. 미안해, 이것 좀 치워달라고 해 줘.”

       

       “알겠습니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잊히지가 않아서.

       

       무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싸우지 못했던 게 분했다.

       

       시우에게 모든 걸 맡기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던 게 분했다.

       

       ···사람을 죽여, 떨고 있던 친구를 위로해주지 못해 분했다.

       

       그때의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떨고있었다.

       

       처음으로 시체를 봤다는, 사소한 이유 하나 때문에.

       

       

       -빠악! 빠악! 빠악!

       

       

       짜증을 담아 순식간에 한 대.

       

       능력을 사용해 속도를 더욱 가속해 두 대, 세 대, 네 대.

       

       마지막 남은 샌드백마저 참혹하게 모래를 흩뿌리며 망가지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그 빌런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시체를 봤을 때의 충격은 이제 없어.

       

       ···하지만, 충격을 받은 친구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짜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심한 년.

       

       뭐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냐.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놓고, 정작 친구를 도와주는 걸 포기하다니.

       

       이래서야 말만 앞선 쓰레기잖아.

       

       

       “···아, 손 더럽게 아프네.”

       

       

       손에서 통증이 느껴져 시야를 돌리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가씨, 이걸.”

       

       “고마워, 할아범.”

       

       

       할아범이 준 연고를 손에 대충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성능 좋은 약이니 내일 아침이면 낫겠지.

       

       

       “아가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최근, 울분을 푸시는 것 같아서.”

       

       

       ···말할 수 없었다.

       

       할아범은 나를 굉장히 아낀다.

       

       그런데 내가 빌런과 아카데미에서 만났다니, 말했다가는 아카데미에 난리를 피워대겠지.

       

       그랬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볼 게 뻔했다.

       

       대충 얼버무려야겠네.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 짜증 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렇습니까. 부디,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도움이라.

       

       그러고보니 지금껏 나와 유시우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르테가 두려웠으니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수상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를 빌런 취급하는 미친년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녀라는 걸 밝히지 않고 조언을 구한다면?

       

       ···한 번 물어볼까.

       

       

       “있지, 할아범.”

       

       “네, 아가씨.”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아멜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보아온 집사를 보았다.

       

       ···그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의 해답을.

       

       아르테는 어째서, 유시우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내 이야기는 아니고, 내 친구 이야긴데 말이야.”

       

       “네.”

       

       “···걔가 조금 이상해.”

       

       “어떤 점이, 말씀이십니까?”

       

       

       으음···.

       

       어떤 점이 이상하냐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중요한 사건들은 말할 수 없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상한 점이라.

       

       한참을 고민해도 어떻게 그녀의 수상함을 이야기해야 할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다행히도 할아범은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주었다.

       

       ···아, 생각났다. 이렇게 말해볼까.

       

       

       “어떤 남학생에게 유독 관심이 많아.”

       

       “남학생, 말씀이십니까?”

       

       “응.”

       

       

       할아범이 갑자기 몸짓을 단정히 하기 시작했다.

       

       뭐지?

       

       입꼬리도 씰룩거린 것 같은데.

       

       착각인가?

       

       

       “흠, 흠. 실례. ···그래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아, 응.”

       

       

       ···별일 아니겠지.

       

       아멜리아는 대충 넘기기로 했다.

       

       

       “그게, 그 애가 시우라는 남자애한테 이상할 정도로 시선을 많이 보내.”

       

       “흠, 시우···. 아, 같은 반 학생 유시우 군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맞긴 한데. 할아범이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아는 방법이 있답니다.”

       

       

       맨날 똑같은 말이네.

       

       뭐, 딱히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뒷조사라던가 한 거겠지.

       

       어렸을 때부터 내 주위의 남자애들은 다 조사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나 보네.

       

       ···뒷조사라고 하니 갑자기 제프리의 말이 떠올랐다.

       

       한번이라도 그녀의 정보를 조회한다면 이상함을 느낄 거라는 그 말.

       

       설마, 그녀까지 찾아본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섬뜩함이 목 아래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르테는 알아? 아르테 이시스.”

       

       “아르테 이시스? 같은 반 여학생인가요?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한번 찾아볼까요?”

       

       “아니, 관둬. 찾지 마. 내가 이미 찾아봤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찾아보진 않은 모양이네.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제프리가 그렇게까지 기겁을 했던 사람이야.

       

       그는 정보상이다. 자신의 위기에도 당연히 민감해.

       

       아무리 우리 집이 잘 산다고는 해도, 정보상이 그렇게까지 기겁을 하는 사람을 집 안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 친구가 시우라는 남자애한테 관심을 보내는데, 정도가 심한 것 같아서.”

       

       “···정도가 심하다?”

       

       

       아.

       

       그러고보니 친구라고 말했는데 아르테의 이름을 꺼냈잖아.

       

       너무 노골적이었나?

       

       갑작스레 든 생각에 할아범의 표정을 살폈지만, 의문스러워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듯한 표정.

       

       눈치채지 못한 건가?

       

       다행이네.

       

       

       “응. 수업시간에도 자꾸 그 애한테 시선을 보내고.”

       

       “호오···.”

       

       “방과 후에도 틈만 나면 따라다니고.”

       

       “그렇군요. 다른 건?”

       

       “다른 거? ···으음, 아. 동아리도 그 애를 따라갔어. 시험도 같은 조였던가?”

       

       “···!”

       

       “게다가 같은 반 다른 친구들은 별로 관심 없어 보이는데, 유독 걔한테만 시선이 집중되어있더라.”

       

       

       이야기를 다 들은 할아범이 눈물을 훔쳤다.

       

       오늘의 할아범은 조금 이상하네.

       

       이 이야기에 울 포인트가 어디에 있다고?

       

       

       “그렇군요. 음, 아가씨도 드디어 그런 시기가···.”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의 이야기야.”

       

       “네, 그랬죠. 친구.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해한 거 맞아?

       

       뭔가 화나는데.

       

       지금은 내가 질문하는 입장이니 참아야겠지.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할아범은 알아?”

       

       “?! 서, 설마 모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뭐, 뭐야.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뭐 잘못했어?”

       

       “잘못···은 아닙니다만. 커흠, 죄송합니다. 잠깐 놀라서.”

       

       

       으흠, 흠.

       

       중대사항을 발표하기 전, 사회자가 목청을 가다듬듯이.

       

       쓸데없이 비장한 얼굴을 한 할아범이, 진지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가씨···아니, 친구분의 시선이 그 남학생에게로 가는 이유는···!”

       

       

       할아범이 한 이야기는, 나를 놀라게 했다.

       

       일리가···있어!

       

       역시 오래 산 사람에게는 무언가 있었다. 이게 연륜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고마워, 할아범!”

       

       “아뇨, 별말씀을.”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면 유시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친구를 도와줄 수 있다는 감정이, 그를 향한 미안함을 점점 녹여냈다.

       

       

       

       ***

       

       

       

       “유시우. 빨리 와봐. 급하니까.”

       

       “으, 응?!”

       

       

       시우는 당황했다.

       

       최근 며칠 동안 침울해져 있던 아멜리아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길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늘따라 평소보다 텐션이 높아 보였다.

       

       뭔가 기분 좋아 보이네.

       

       드디어 떨쳐낸 걸까?

       

       아멜리아가 이끄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아니, 그게.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아르테 이시스에 대한 대책을 말할 때뿐이었잖아.

       

       그렇게 말하려던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최근 그녀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으니까, 적당히 배려해야···.

       

       

       “알아. 아르테 이시스 때문이잖아.”

       

       “···괜찮아?”

       

       “뭐가?”

       

       

       다급하게 그녀를 향해 물어봤지만,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그녀가 의문을 표했다.

       

       완전히 떨쳐냈구나.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면 몇 날 며칠을 방에 박혀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감촉과 향기도 같이 떠올라서 강제로 우울한 감정이 끊긴 게 많이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무덤덤해졌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것도 없이 혼자서 극복하다니.

       

       

       “···뭐, 좋아. 오늘은 그녀가 왜 너를 감시하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니까.”

       

       “뭐?!”

       

       

       깜짝.

       

       아멜리아가 내뱉은 말에 시우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목적···!

       

       그녀의 목적은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의 방 안쪽의 아티팩트 유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는 연관성이 아예 없던, 나를 지켜보던 이유.

       

       그걸 알아차렸단 말인가?

       

       시우는 감탄했다.

       

       

       “그, 그걸 알아냈어···?!”

       

       “응. 할아범이 도와줬어.”

       

       “···할아범?”

       

       “내 집사. 걱정하지 마. 아르테의 일이라는 건 잘 숨겼으니까.”

       

       

       으음, 그런가.

       

       ···약간 찝찝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르테가 나를 감시하는 이유를 드디어 알 수 있었으니까.

       

       

       “그, 그래서. 그 이유가 뭔데?”

       

       “그건···.”

       

       

       그건?

       

       두근, 두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르테가 나를 감시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풀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랑이야.”

       

       “···뭐?”

       

       

       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아멜리아를 향해 되묻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독자님들은 보셨겠죠···!

    아름다운 팬아트가 도착했습니다!

    꺄아악 너무 예뻐!!!!

    K007님이 그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보셨겠죠···!

    표지가 완성되었습니다!

    HOMY님이 그려주셨어요!

    너무 예뻐!

    ***

    레이호시 님, 2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흑막 아니라고 전해주래요!

    자날정가구매흑우 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배고픈공돌이 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맛있게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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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Because I Have Narrow Eyes Doesn’t Make Me a Villain!

Just Because I Have Narrow Eyes Doesn’t Make Me a Villain!

실눈이라고 흑막은 아니에요!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Why are you treating only me like this!

I’m not suspicious, believe me.

I’m a harmless person.

“A villain? Not 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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