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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1

       “제국법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조건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차기 황제를 정하는 것은 철저하게 황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는 고유의 권한입니다.”

        

       “그건 쉽게 짐작할 수 있소. 그건 벨부르도 마찬가지니까.”

        

       제국은 ‘일단은’ 입헌군주국이다. 말만 입헌군주국이지 사실상 의회가 황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형태이긴 했지만, 덕분에 일단 법적으로는 의회와 황실의 역할이 분리되어있다.

        

       국가를 다스리는 전반에 대한 권리는 의회에, 그 국가의 정통성을 지킬 의무는 황실에.

        

       그렇기에 차기 황제를 정하는 것도 황실의 고유한 권리였다. 물론 그렇다고 황제 마음대로 막 정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황실 내부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제국의 황실, 즉 황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나와 앨리스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황족 중에서 차기 황제에 대해 의견을 말할 만큼 가까운 혈족들은 죄다 황제가 직접 끌어내려 버렸거나, 아니면 권력투쟁에서 알아서 나가떨어졌다. 심지어 앨리스의 어머니마저 사망한 지 오래고.

        

       황제 본인은 지금 전범으로 벨부르에 임시로 갇히어있는 상황이고, 그 아이들도 대부분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황제의 피가 섞인 클레어는 본인이 팬그리폰이 아니라 그레이스 가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중이고.

        

       ……정리하자면, 지금 ‘제국에서 황실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는 모든 황족’이 여기 와 있다는 소리다.

        

       결코 과장도, 농담도 아니다.

        

       조금 뒤늦긴 했지만, 그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나는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했다. 지금 상황이라면 나나 앨리스가 하는 말은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문자 그대로 황실의 의지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지금까지의 선례들을 따르자면, 일반적으로 차기 황제는 황실의 피를 이은 자식 중 첫째가 맡아왔습니다. 개인의 능력을 보고 뽑는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인격적, 능력적인 문제가 없다면 보통 장남이, 장남이 없다면 장녀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옆에 서있는 앨리스를 흘끗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제게는 이미 능력이 부족하지 않은 손위 친족이 있으므로, 저를 차기 황제로 대우하시는 것은 지나치게 이른 판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다행히 나의 말은 제대로 먹혀들어 간 모양이다.

        

       현실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국민의 눈에 부족한 존재이거나, 인기가 다소 떨어지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정통성으로 보자면 도저히 반박할만한 이유가 없어서 그 인기가 떨어지는 존재가 그대로 왕의 자리에 올라버리는 경우.

        

       만약 왕이 정말로 친정을 펼치는 왕정국가라면 차라리 더 능력 있는 이를 왕의 자리에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입헌군주국에서 왕에게 남은 것은 ‘정통성’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상황일수록 왕실은 더욱 정통성에 목을 매는 법이다.

        

       정 왕을 바꾸려고 한다면 일단 선왕이 잠깐이라도 왕위에 앉았다가 다음 왕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앨리스와 내가 그런 짓을 할 생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제1 황녀의 생각은 어떻소?”

        

       벨부르 황제가 앨리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때까지도 생각에 깊게 잠겨있던 앨리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아직은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사태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하나하나 정리하고 난 뒤에야 비어있는 황제의 자리를 어떻게 할지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아주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그보다는, 제 아버지의 처우에 대한 논의를 먼저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담담하게 말하는 앨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벨부르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타국의 왕위는 그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지. 혼자 지레짐작하고 있던 것은 사과하도록 하겠소.”

        

       “아닙니다. 타인의 시선에서는 오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말대로 일단 급한 일부터 하나하나 처리하도록 할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부르 국왕은 내 쪽으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결국 오해는 제대로 풀지 못한 걸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오해할만한 상황이긴 해. 그런 신화를 가진 국가에,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온 거니까.

        

       그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나라는 것이 영 달갑지는 않지만.

        

       *

        

       “하아…….”

        

       방으로 돌아온 앨리스는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듯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날짜로만 따지면 우리가 루테티아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다만 그사이에 우리가 기억하는 기나긴 시간이 끼어있었기에, 나는 앨리스의 저런 모습을 엄청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신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세상이었기 때문일까. 그 세상 속에서 있었던 일들은 긴 세월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한밤중에 꾼 꿈처럼 몽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어제’의 일을 ‘10년 전’의 일처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그 세상 속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모두가 그랬을 거다.

        

       “생각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로 너 때문에 말이야.”

        

       내가 앨리스 방에 준비되어있는 손님맞이용 의자에 앉자, 앨리스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그리고 앨리스의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 때문이 맞긴 했으니까.

        

       “정말,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던 주제에 신화 속의 장면을 재현해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원망하는 말 같았지만, 의외로 목소리에는 진짜 원망하는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불과 1년 정도 전만 하더라도 앨리스는 나를 엄청나게 시기했었는데.

        

       “황제 자리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하지?

        

       아, 황제의 상황 말인가. 그리고 제국에 돌아가서 우리가 겪어야 할 온갖 곤혹스러운 질문들에 대해서도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그나마 벨부르는 다른 나라였으니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제국은 또 다르니까.

        

       하지만 나의 표정을 본 앨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황제 자리가 비었는데 그게 안 중요해?

        

       물론 제국의 귀족들이 정말로 비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아닐지는 나도 모른다. 황제의 신병을 다시 인도받아 그 자리에 다시 앉히려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나나 앨리스가 그 자리에 앉으면 어떻게든 조종해보겠답시고 나서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그보다.”

        

       앨리스는 나의 질문을 딱 자르듯 말했다.

        

       “네 능력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제 능력은 이젠 사라졌습니다만.”

        

       “알고 있어.”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어? 혹시 그 능력을 써서 날 도울 생각은 없냐고 물어볼까 봐?”

        

       어……

        

       음, 앨리스가 그럴 성격은 아니긴 하지.

        

       “그게 아니라, 네 능력이랑, 내 돌아온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침대에 퍼져있던 앨리스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렇다고 정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양손으로 침대를 짚고 편하게 앉은 자세로 나를 보면서 앨리스는 말했다.

        

       “……어린 시절에 나보다 성적이 더 잘 나왔을 때 말이야.”

        

       아.

        

       그때의 이야기인가.

        

       확실히 반칙이나 다름없는 짓이기는 했다. 남들보다 공부할만한 시간을 훨씬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니까, 그냥 시험 문제를 본 다음 시간을 돌렸으면 되는 거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한 거야? 시험 볼 때마다 그랬잖아.”

        

       앨리스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 겪는 일들을 요행으로 넘기다 보면 언젠가 내 행동 원칙에 큰 구멍이 뚫려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래서 기왕 배우는 김에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나에게는 시간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저 얕은 연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배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제대로 이해한 지식의 덕을 몇 번이나 봤으니까.

        

       무엇보다, 옆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앨리스를 두고 그런 반칙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알고 있다. 사실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반칙일 뿐이지.

        

       “노력하는 황녀님을 보고 있으니,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 들켰다. 여기서 더 숨기려고 해봐야 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앨리스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나에게 무한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지금은 뭘 해도 앨리스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는 최대한 빨리 써서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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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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