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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3

    예린은 이른 새벽, 창밖으로 비치는 푸른빛 아래 세희 연구소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뭘 가지고 갈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마치 놀이공원에 가는 아이처럼 들뜬 마음으로 회색 사신과 함께 가지고 놀 장난감을 고르는 중이었다.

    환기를 위해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는 도시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근길에 오른 직장인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또각거렸고, 자동차들이 부드럽게 엔진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거리에는 이른 아침 특유의 조용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공동현관에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잘 다녀오십시오”라는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소리는 수많은 새벽의 소리 중에서 예린의 귀에 가장 또렷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인간이 말한 것 같지 않고, 조금은 기계적이고 이질적이었다.

    예린이 사는 건물의 주인이 여러 가지 잡일을 처리하기 위해 배치한 관리자형 협회 인형이 내는 목소리였다.

    푸른색의 각진 제복을 입은 채 절도 있게 움직이는 그 인형은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호두까기 인형을 연상케 하는 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인간과의 정서적 교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가정용 인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점점 많아지네. 협회 인형.”

    예린은 작게 중얼거리며 불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니 사신들이 싫어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예린은 저 인형들이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특히 인간과 흡사한 고가형 인형일수록 그 불길한 느낌이 심했다.

    다른 오브젝트처럼 인간을 습격해 올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금 더 꺼림칙한 무언가였다.

    오히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예린은 현관문 쪽에서 튀어나온 황금색 얼굴에 정신을 차렸다.

    히히.

    예린을 마중 나온 황금 사신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협회 인형 때문인지, 회색 사신이 모든 연구원에게 제공하는 황금 사신 마중 서비스였다.

    뚜방뚜방.

    씩씩한 걸음걸이로 앞장서서 나아가는 황금 사신을 따라 현관문을 나서며, 예린은 뒤돌아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예린이가 인사한 곳에는 하얀 아귀와 납 인형이 있었다.

    밤 10시면 잠들어 버리는 황금 사신 대신, 야간 경비를 위해 제공된 하얀 아귀였다.

    하얀 아귀는 의자 위에서 잠든 것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납 인형의 무릎 위에 놓여있었다.

    예린은 그 모습을 보면서, 푸른 새벽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평원.

    그곳에서는 협회 인형 사태로 특별 대사면을 받은 하얀 아귀들이 잔뜩 뛰어놀고 있었다.

    내 근처가 아니라면 손쉽게 잠들어 버리는 황금 사신을 대신하기 위해서 하얀 아귀들을 사면해 주었다.

    하얀 아귀들은 그 숫자가 많으면서 크기도 작은 데다가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가진 우수 경호원이었다.

    물론 황금 사신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새 나라의 어린이인 황금 사신은 밤 10시면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어 버리니 심야 경호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뭐, 모자라는 전투력은 미니 사신들처럼 나를 부르라고 하는 것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이름하여 하얀 아귀 비상 방범 벨!

    사실 이런 방법보다 미니 사신들을 서울에 잔뜩 풀어서 협회 인형들을 죄다 박살 내는 편이 쉽겠지만,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게, 내가 볼 때는 별로 해로워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미니 사신들이 무지 싫어하는데도, 색채 우주에서 내려오는 해로운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미니 사신들이 너무 싫어하니까, 세희 연구소 인원들에게 경호 아귀를 배치했다.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 이벤트도 하나 있어서, 인형 파괴를 보류 중이기도 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전단지를 손에 들고 내려다보았다.

    <대한민국 최초! 한국 오브젝트 협회 주최 인형 박람회 개최 확정!>

    <오브젝트 박람회 = 실패? NO!>

    <한국 오브젝트 협회가 선보이는 차별화된 인형 박람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세요!>

    <전시 품목>

    <가정에서 활용 가능한 다양한 가사도우미 인형>

    <건설 현장에서 중장비를 대체할 수 있는 초대형 인형>

    <의료 현장에서 활약할 첨단 의료 보조 인형>

    <교육 분야에 혁신을 가져올 교육용 인형>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할 실험실 보조 인형>

    <그 외에도 수많은 인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는 한국 오브젝트 협회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미래를 향한 대한민국의 도전, 한국 오브젝트 협회와 함께하세요!>

    <문의: 한국 오브젝트 협회 (전화: ■■-■■■■-■■■■ / 이메일: info@■■■■.■■■)>

    오브젝트 박람회!

    물론 오브젝트 중에서 ‘인형’만을 다룬 박람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과연 이번에는 사건이 안 터질 것인가!

    나는 조그마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이 박람회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즐거운 오브젝트 박람회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미래가 오기를 빌었다.

    만약 인형들이 정말로 해로워서 죄다 부숴야 하더라도, 이벤트가 끝난 다음에 해야지.

    히히.

    나는 여러 가지 인형들이 소개된 전단지를 다시 읽어보다가, 곱게 접어서 옆에 있는 아귀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수많은 하얀 아귀가 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설마 사면을 받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간악한 하얀 아귀 지옥> 이후로 괴롭히지 않아서 그런 건가?

    그래서 하얀 아귀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하얀 아귀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뭔가를 바쁘게 찾아다니는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내 주변을 서성이는 부류였다.

    뀨히히.

    뭔가를 생각하며 음흉한 미소를 흘리는 하얀 아귀들을 보니,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 주황 사신을 기다리고 있구나.

    주도적인 배신자인 주황 사신의 말로를 기대하며, 주황 사신을 찾아다니고 있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하얀 아귀들에겐 안타깝게도 주황 사신은 이미 나와 사법 거래를 통해 사면받은 지 오래였다.

    히히.

    고개를 돌려서 안뜰 방향을 바라보자, 커다란 황금상이 보였다.

    주황 사신들이 자유 도시 연합에서 훔쳐 온 황금뿔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티라노사우루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트리케라톱스의 조각상이었다.

    티라노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영역인 것처럼, 굳이 트리케라톱스로 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황금상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서울 송파구 인근 제임스 타워.

    그곳은 식량, 자재, 연료 등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어서 분주했다.

    하지만 그 분주함 속에는 인간의 숨결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있어야 하는 곳에 대신 뭔가 섬뜩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협회 인형들이었다.

    제임스는 인형의 현장 입장을 거부하려 했지만, 이제 모든 공사 현장과 힘든 일은 인형들이 담당하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제임스는 타워 내부로는 절대로 인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제임스 타워 주차장에 잔뜩 쌓인 물자를 타워 내부로 옮기는 것은 제임스와 미국에서 따라온 직원들이 직접 수행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

    제임스는 CCTV를 살펴보며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화면에는 한 인형이 천천히 걸어가다가 굳게 닫힌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타워 내부로 진입할 방법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제임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제는 이런 인형이 한두 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인형들이 서로 다른 출입문을 딱 한 번씩 확인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인형을 조율하고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이 행동이 ‘한국 오브젝트 협회’에서 한 짓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좀 어설픈 산업 스파이 정도로 치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 이것이 협회와 무관한 일이라면?

    서울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제임스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오와 열을 맞춰서 움직이는 인형들이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CCTV 화면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해서 그런 걸까.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들의 눈에는 어딘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섬뜩한 광채가 어려있는 것 같았다.

    과연 저것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까.

    ***

    철컥철컥.

    푸른 제복을 입은 인형이 예린이 떠난 건물의 텅 빈 복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마치 순찰하듯이 인형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오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현관문 앞을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곤 했다. 

    끼이익.

    기름칠이 덜 된 기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를 흘리며 푸른 인형은 고개를 돌려 예린의 현관문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이내 다시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납 인형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하얀 아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얀 아귀가 보기에도 저 인형들의 행동이 수상했으니까.

    인형의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하얀 아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하얀 아귀를 감싸던 방의 어둠이 갑자기 걷히며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황금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아귀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고개를 들어 빛을 마주한 아귀는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호기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올린 아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납 인형의 가늘게 뜬 눈이었다.

    깊고 따뜻하지만, 어딘가 졸린 것처럼 보이는 납 인형의 눈동자.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보내는 눈길에 하얀 아귀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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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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