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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5

       북부에 비하면 제국 동부의 지세는 안락했다.

       

       평야, 평야, 그리고 또 평야.

       

       제국 곡창지대의 절반이 이곳에 있었다.

       

       땅이 평평하다는 것은, 대규모 마법진의 건설도 쉽다는 것.

       

       “다 그렸다.”

       

       로즈마리는 후우, 한숨을 쉬고는 작업을 갈무리했다.

       

       구 블랜튼 공작의 영지인 ‘티키오네’.

       

       이곳의 한 밀밭에서 10km에 이르는 마법진을 며칠에 걸쳐 완성했다.

       

       이른바 미스터리 서클이라고 불리는 기술.

       

       스크롤과 마법진 제작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그녀만이 벌일 수 있는 기예였다.

       

       남부로 이어지는 마법진을 구축한 뒤 북부 전선으로 돌아온 로즈마리는 곧장 하스펠트의 막사를 찾았다.

       

       “다 했어. 후퇴 준비나 해.”

       “알겠어요.”

       

       북방군의 후퇴 루트는 단순했다.

       

       북쪽에서 북동쪽으로 빠진 뒤, 그대로 남하하여 동부 지역으로 철수.

       

       그곳에서 로즈마리가 건설한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여 남부 티림스 강까지 이동한다.

       

       최종적으로는 서방군과 합류, 강을 도하하여 엘프국으로 도망칠 예정이다.

       

       공간이동진은 거리와 인원 수에 비례해서 시전자의 마력을 잡아먹기 때문에 로즈마리에겐 이 정도가 한계였다.

       

       “전황 보고해 봐.”

       

       지칠 대로 지친 로즈마리는 축 늘어진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마왕군의 공격이 심해지고 있어.”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도 아나 봐요. 이쪽만 집중해서 노리고 있어요.”

       

       당연히 알고 있겠지. 마왕이 어떤 존재인데.

       

       에테르가 배신했으니, 그 아래에 있던 로즈마리도 숙청 대상이다.

       

       인간을 돕는 일까지 벌였으니 이제 마왕군으로는 못 돌아간다.

       

       로즈마리는 결의를 굳혔다.

       

       ‘될 대로 되라지.’

       

       아니, 결의가 맞나…?

       

       아무튼,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하스펠트와 로즈마리는 후퇴 작전을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온 건 새벽 무렵이었다.

       

       “기습입니다─!!”

       

       마왕군 별동대가 봉우리를 넘어 측면을 타격했다.

       

       수가 적어서 어떻게든 막았지만, 큰 휴손을 입고 말았다.

       

       “보급 창고 세 곳이 전소했습니다.”

       “사령관 각하, 철수일을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창고가 불타는 장면은 모두가 보았을 터. 

       

       사기 저하는 필연적이었다.

       

       “이번 습격으로 인해 탈영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군. 도망치는 것들은 그 자리에서 전부 사살하라.”

       

       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 이상 도망치는 군인이 늘어나서는 안 됐다.

       

       그 뒤로 군영에서는 사람의 비명이 몇 시간씩 이어졌다.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모조리 처리한 이후, 군심은 다잡혔으나 불리한 상황은 전혀 뒤집히질 않고 있었다.

       

       사실상 로즈마리가 아니라면 곧바로 무너질 수준이었다.

       

       ‘만약 내가 도망치면 북부는 끝장이고, 나도 금방 따라잡히겠지.’

       

       그러면 언니도 못 보고 죽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절대로 그렇게 되긴 싫었다.

       

       “야, 오늘이 날이야. 빨리 준비하라고.”

       

       반강제로 제국군과 생사를 함께하게 된 로즈마리는 철수를 명령했다.

       

       절멸급 마수에게 지시를 받는다는 게 장교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데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결국 그 말을 따라야만 했다.

       

       그렇게 동부로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예상대로 마왕군은 대규모 추격을 감행해왔다.

       

       구천지대계 6석과 3석.

       

       그리고 사천 중 하나인 파스모의 정예군까지.

       

       거의 5백만이 넘는 마수의 무리가 후퇴하는 제국군을 앞다투어 쫓아왔다.

       

       – 아악!

       – 밀지 마라!

       – 도와줘! 살려줘!!

       

       식량도 불타 제대로 먹지 못한 제국군.

       

       반면에, 연료만 있다면 어디까지고 추격할 수 있는 괴물들.

       

       후퇴 행렬은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붕괴하고 있었다.

       

       “로즈마리 양! 어떻게 못 하나요?”

       “동부로 가면 대규모 마법을 여러 번 전개해야 하는데 내가 쟤들을 어떻게 도와? 동정 말고 빨리 움직여!”

       

       – 으아아악!!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사상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사망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마수에게 밟혀 죽거나, 먹혀 죽거나, 배고파서 죽거나, 탈수로 말라 죽거나, 과다출혈로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거나, 비행체의 사격을 맞고 죽거나, 혹은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시체는 언덕을 이루었고, 걸쭉한 핏물은 하천을 형성했다.

       

       약한 자는 넘어졌고, 강한 자는 일어섰다.

       

       보름에 걸친 행군.

       

       수백만에 달했던 북방군이 동부에 도착할 땐 겨우 30만으로 줄어있었다.

       

       쿵, 쿵, 쿵, 쿵.

       

       “로즈마리─!!”

       

       추격해 오는 마수들 중 인간의 언어를 내는 존재가 있었다.

       

       구천지대계 3석,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

       

       “마왕님께서 네년을 잡아 오라고 명령하셨다! 어찌 우군의 정을 버리고 미천한 종족의 편에 섰단 말이냐!!”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쩐다?

       

       이미 대규모 마법진 안에 30만 명이 전부 들어왔다.

       

       “마왕님께서 기다리시는데 어딜 가느냐! 당장 돌아와서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라!!”

       

       낙오자가 없는지 최대한으로 확인한 로즈마리는 마법진을 활성화하기 전에 빽 고함을 내질렀다.

       

       “좆까─!! 난 언니한테 갈 거야!!”

       

       

       **

       

       

       레너윌은 얼마 남지 않은 군을 이끌고 티림스 강에 도달했다.

       

       “병사들이 지쳤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조금 전엔 죽을 뻔했으니…….”

       

       후퇴인 이상 마왕군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의 맹공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제국군을 한 명도 남김없이 말살하려는 듯한 공세.

       

       “…날 죽이려는 게 분명해.”

       

       의외의 답은 로즈마리의 입에서 나왔다.

       

       동부에서 30만에 달하는 군대가 이곳 남부로 순간이동했다. 로즈마리가 쌓아놓은 마력을 전부 들이부은 결과였다.

       

       덕분에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다.

       

       “고맙네. 내 하스펠트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사례하지.”

       “좀, 조용히, 좀…….”

       

       로즈마리는 헥헥대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지금이라면 인간들에게 당해도 반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들에겐 반격할 이유도, 역량도 없었다.

       

       사기는 바닥까지 내려갔으며, 마왕군은 점차 넓게 퍼져서 수도와 동부까지 전부 장악한 상태였다.

       

       이제 제국의 유일한 영토는 남부, 토츠펠 공작의 영지뿐이었다.

       

       “메리!”

       “클라이스!”

       

       다행히 서부군은 북방군에 비해 비교적 적은 손실로 후퇴를 완료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추격대가 안 붙었어?”

       “어, 응…. 이상하게 우리는 끝까지 안 따라오더라고. 아니지, 참.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메리가 헤를라인과 클라이스는 진득한 포옹을 나누고는 재빨리 망명 일정을 잡았다.

       

       티림스 강, 그리고 브릴뤼움 강의 상류.

       

       이 두 강을 건너야만 카우렐리아로 갈 수 있다.

       

       특히 티림스 강은 상류부터 굉장히 깊고 넓기로 유명하다.

       

       얼마나 넓냐면, 거의 작은 바다라고 불러도 될 수준이었다.

       

       강의 하류는 남쪽의 ‘키렐’이라고 불리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을 통해 돌아가면 카우렐리아의 무역도시 하나가 나온다.

       

       어쨌든.

       

       패퇴하는 군에게 도하 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수영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이제 어떡하지?”

       

       하스펠트 자매의 시선이 로즈마리를 흔들었다. 제발 방법 좀 내 달라는 표정이었다.

       

       “…아.”

       

       그러나 로즈마리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맞다, 너희 이런 강 못 건너지.”

       “설마 네 기준에서 생각했던 거야?”

       “그므는.”

       

       항상 2% 부족한 계획을 짜내는 로즈마리였다.

       

       “처음부터 티림스 강 너머로 순간 이동하면 되던 거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그럴 만한 마력도, 시간도 없었다고. 나처럼 연약한 소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이 정도 해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로즈마리는 혀를 쯧쯧 차며 눈을 감았다.

       

       “우리가 직접 방법을 찾아야 할 거야.”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도사들은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주변의 나무를 깎아 뗏목을 만들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걸린다.

       

       비행 마법? 괜찮은 선택이지만, 해당 마도를 전개할 수 있는 공계마도사의 숫자가 너무나도 적었다.

       

       결국 온갖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모두를 강 너머로 옮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고드립니다! 마왕군이 남부 영지에 진입했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린 마왕군이 티림스 강 근처까지 도달했다.

       

       “……아무래도 죽을 사람과 살 사람을 골라야 할 것 같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요.”

       “나는 남겠다.”

       “아빠!!”

       “너희 둘이라도 공계마도사의 지원을 받아 강을 건너라. 아비는 여기서 배수진을 치마.”

       

       레너윌은 가능한 많은 사람이 도망갈 수 있도록 후방을 볼 계획이었다.

       

       이것은 곧 죽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누가 엘프국과 협상을 해요?”

       “토츠펠 공작이나 살리에르 백작이 알아서 해주실 거다. 아니면 너희가 해도 좋고.”

       “안 돼요. 이런 건 아버지가 해야 해요.”

       “…그래, 클라이스. 넌 여전히 여리구나. 가주 자리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

       “…….”

       

       클라이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클라라, 이 강을 건너면 그다음부턴 네가 하스펠트의 간판이다. 동생을 잘 보살피고, 꼭 후대를 잇거라.”

       “싫어요. 아버지가 축사 안 읽어주면 결혼도 안 할 거예요.”

       “…….”

       

       이번에는 레너윌이 고개를 떨구었다.

       

       하스펠트 가족의 대화를 들은 헤를라인이나 다른 마도사는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병신들.”

       

       이들이 멍청하다고 느낀 건 로즈마리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녀도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욕설까지 내뱉으며 레너윌을 조롱한 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멍청이들아, 신파극 찍을 시간 있으면 저쪽이나 봐.”

       “……!”

       

       로즈마리가 힘없이 가리킨 곳은 티림스 강이었다.

       

       모두가 그곳을 보고 있자니, 수평선 너머로 희뿌연 연기 수십 쌍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레너윌은 눈을 찌푸리며 그 연기의 정체를 살폈다.

       

       “배다…!”

       

       카우렐리아.

       

       엘프국의 국장이 찍힌 무역선 수십 척이, 산란기 송어처럼 강을 역행해 오고 있었다.

       

       “사, 살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마도사들이 환호하며 장비를 벗어던졌다. 가능한 무게를 가볍게 하여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헤를라인 또한 군용 장비와 스태프를 던져버리고는 민소매 차림이 되었다.

       

       “…저건.”

       

       가장 먼저 도착하는 상선의 뱃머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엘프 청년이었다.

       

       “선생님,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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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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