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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5

        

         

       또박또박 쓰인 짧은 문장.

       잉크가 부족한 펜으로 쓴 것인지 중간중간 흐릿한 부분이 있고, 힘을 주어서 쓴 것인지 눌린 자국이 군데군데 보이는 문구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글씨체.

         

       하지만 어째서일까?

         

       남자는 그 문구에서 피비린내가 풍긴다고 느꼈다.

         

       ‘이건, 뭐야. 빌어먹을.’

         

       글씨를 계속 보고 있자면 글씨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문양이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짙은 피비린내는 코를 찌르고 점막을 쑤시며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폐에 피비린내와 함께 찐득한 무언가가 들러붙는 느낌이 든다.

       기도가 곰팡이에 뒤덮여 썩어가는 느낌이 들고, 폐에 들러붙은 피비린내가 몸의 안과 밖을 모조리 감싸면서 자신이 피바다 안에 빠져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저주받은 물건을 손으로 집고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남자는 지네가 팔을 타고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그 수첩을 집어던져 버리고 말았다.

         

       철퍽.

         

       수첩은 남자의 손에서 떠나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소리 역시 범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수첩이라면 ‘턱’ 이나 ‘타앗’ 정도의 가벼운 소리가 나야 정상이었는데, 물에다가 담갔다가 빼기라도 한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찰싹 달라붙었다.

         

       게다가 어찌 되먹은 것인지 수첩은 닫히지도 않았고, 그 문구를 그대로 드러낸 채 활짝 펼쳐져 있었다.

         

       ‘소름 끼치네, 제기랄.’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일회용 숟가락을 두 개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게처럼 이용해 조심조심 수첩을 들었다.

         

       맨손으로 잡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것을 들고 쓰레기통까지 이동했고, 쓰레기통에 오물을 버리기라도 하듯 거칠게 가져다 버리곤 그대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소름이 끼치는 물건을 어떻게든 자신의 눈앞에서 치웠다는 생각에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쓰레기통의 뚜껑을 슬쩍 열어 안에 제대로 버려졌는지 확인하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서 카페 밖으로 나갔다.

         

       저 소름 끼치는 물건이 있는 곳에서는 더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찜질방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뜨끈하게 몸을 녹이면서 마음을 추스르기로 했다.

         

       거기에는 사람도 많은 편이니, 괴한을 만났을 때의 공포를 충분히 희석할 수 있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이, 이건 뭐야….”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괴한을 만났던 것은 악몽처럼 그의 뇌리에 틀어박히긴 했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잘 돌아갔다.

         

       괴한이 준 수첩은 카페에다 갖다 버렸고, 그 카페에는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괴한을 만났던 길은 절대로 이용하지 않았으며, 그 길에서 최대한 먼 곳에 있는 길을 통해 빙 돌아서 집에 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이게 왜 여기 있어…?”

         

       남자의 눈앞에는 수첩이 있었다.

       괴한이 준 수첩이 말이다.

         

       수첩을 버릴 때 그랬던 것처럼, 첫 페이지가 활짝 펼쳐진 상태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를 이토록 경악하게 만든 것은.

         

       “여긴 내 집인데….”

         

       그 수첩이 그의 집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집의 구석에서 발견한 것도 아니다.

       이것 보라는 듯 책상 한가운데에 활짝 펼쳐진 채 있었다.

         

       남자는 그 모습이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끔찍한 저주를 뿌리고 다니는 괴물이, 먹이를 먹기 위해서 활짝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

         

       수첩이 펼쳐져 있는 것은 괴물이 어서 제물을 달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고, 저 수첩이 저기에 있는 것은 자신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르렁거리는 저음으로 엄포를 놓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는 그것이.

       그것이 너무나도 참을 수가 없었다.

         

       괴물과의 동거?

       저주받은 물건과 동거?

         

       그걸 어떻게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뿌드득.

         

       남자는 이를 빠득 갈면서 공포를 이겨내었다.

       그는 싱크대로 향해 집게를 하나 집어 들고는 책상으로 향해 집게로 천천히 수첩을 들었다.

         

       철퍽.

         

       그러자 묵직하고 축축한 느낌의 수첩이 집게에 힘없이 딸려 나왔다.

         

       남자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고 부엌으로 향했고, 가스레인지를 켠 후 거기에 수첩을 가져다 댔다.

         

       치이이익.

         

       가스레인지의 불길은 수첩을 태우기 위해서 혀를 넘실거렸다.

       뱀이 혓바닥을 내미는 것처럼 수첩을 연신 핥았고, 수첩을 한 줌의 재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10초가 지나고.

       3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음에도 수첩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축축해서 그런 걸까?

       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어떤 액체에 절여져 있기 때문일까?

         

       수첩에는 도저히 불이 붙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불이 붙을 기미는 고사하고 아예 그을음조차 일지 않았다.

         

       자신은 이런 불에도 끄떡없다고 자랑하기라도 하듯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더 해보라며 남자를 조롱하듯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 가스 불이 안된다면 이것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남자는 오기가 생겼다.

         

       아무리 저주받은 물건이니 괴물이니 하더라도 어차피 이것의 본질은 수첩에 불과한 것이다.

       수첩 주제에 불을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가.

         

       그는 철제 쓰레기통 하나를 들고 화장실로 이동해 간이 소각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자료들을 쫙쫙 찢어서 철제 쓰레기통의 밑바닥에 깔아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부었다. 그리고 휘발유가 어느 정도 차오르자 그곳에 수첩을 풍덩 담가버렸다.

         

       “제발 좀 타라.”

         

       그는 애원에 가까운 말을 하며 손에 들린 종이 뭉치 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철제 쓰레기통으로 떨궜다.

         

       화아아악!

         

       불이 붙은 종이는 쓰레기통에 떨어지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불길을 일으켰다.

       불이 번져나가며 위로 솟구쳤고, 자그마한 철제 쓰레기통 바깥으로 불길이 넘실거릴 정도로 끔찍한 화력을 뽐냈다.

         

       남자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불을 끌 수 있도록 소화기를 든 채.

         

       그렇게 남자는 불길이 쓰레기통 안의 휘발유와 종이를 모조리 태우고 사그라들 때까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멍하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

         

       남자는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물든 철제 쓰레기통을 발로 툭 건드렸다.

         

       텅그렁.

         

       그러자 철제 쓰레기통은 엎어지며 특유의 속이 빈듯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남자는 엎어진 철제 쓰레기통을 식히기 위해 샤워기의 물을 계속 뿌렸고, 그러자 쓰레기통은 수증기를 내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물을 뿌리기를 한참.

       쓰레기통이 완전히 식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남자는 조심스럽게 장갑을 낀 손으로 쓰레기통을 뒤집어보았다.

         

       새까만 잿가루만 우수수 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철퍽.

         

       쓰레기통은 남자의 기대를 배신하듯 무언가를 토해내었다.

         

       물에 담갔다가 뺀 듯한 소리를 내는 그것.

         

       “…씨발.”

         

       수첩이었다.

         

       심지어 아까와 똑같이.

         

       『 규칙 1. 제물을 바치면 정보를 얻는다. 』

         

       첫 페이지가 활짝 펼쳐진 상태였다.

         

         

         

        * * *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가 없다.

         

       수첩에서, 저 괴물에서, 괴한이 준 저 저주받은 물건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

         

       남자는 절망했다.

         

       ‘이럴 수는 없어.’

         

       불에 태워보았다.

       쓰레기장에 버렸다.

       돌과 함께 묶어서 바다에 버렸다.

       시멘트로 떡칠을 한 다음에 땅에 묻어도 보았다.

         

       하지만 수첩은 그의 모든 노력을 무시했다.

         

       불에 타지 않았고, 쓰레기장에 버려도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에게 돌아왔고, 돌과 함께 묶어서 버렸음에도 어디 헤지고 번진 자국 하나도 없이 그의 품속으로 돌아왔다. 시멘트에 떡칠해서 버렸음에도 그런 적이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그의 가방 안에 들어와 있기까지 했으니.

         

       도저히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진짜배기 저주받은 물건이야….’

         

       오컬트니, 괴담이니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영역의 것이 아니다.

         

       주물(呪物) 전문가나 주술사가 해결해야 하는 영역의 물건이었다.

         

       ‘주술사…. 빌어먹을.’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한국은 주술의 불모지라는 것.

       그리고, 주술사라는 존재에게 접촉하기에는 그가 너무 보잘것없었다는 것이었다.

         

       ‘저주받을 인생 같으니. 뭐 이렇게 배배 꼬여서….’

         

       돈이 있나?

       없다.

         

       빽이 있나?

       없다.

         

       인맥이 있나?

       없다.

         

       지위는?

       낮다.

         

       명성은?

       그것도 없다.

         

       하다못해 평판이라도 좋은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관적으로 보아도.

       남자는 도저히 주술사에게 접촉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

         

       하다못해 한국에 유명한 주술사가 있다면 같은 나라 사람인 걸 이용해서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을 텐데, 죄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아는 주술사도 방송에 나오거나 부자 옆에 붙어있는, ‘세속적인’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명성 높은 주술사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곤란을 겪을 사람이 아닌데. 제기랄.’

         

       지나가던 주술사의 도움?

       바랄 수도 없다.

         

       주술의 불모지에서 주술사를 얼마나 볼 수 있을 것이며, 본다고 하더라도 그 주술사가 남자의 어려움을 깨닫고 흔쾌히 도움을 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답이 없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는.

         

       “하아.”

         

       남자는 수첩을 버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에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박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두었고, 가방은 곧 버릴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곳저곳에 내팽개치고 다녔다.

         

       제발 누가 훔쳐 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수첩은 남자의 기대를 배반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자의 ‘선배’가 그 기대를 배반했다.

         

       “어이, 이제순이! 자료 잘 받았다. 그리고 저기 휴게실에서 네 가방 굴러다니길래 가져왔다. 거, 기자라는 놈이 말이야.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간수도 못 하고. 이게 기자 정신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어, 응? 나 때는 말이야. 이런 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내 물건 정리는 물론이고 사수, 선배 물건까지 다~아 도맡아서 했단 말이야.”

         

       인맥이 넘쳐난다는 것을 이용해 남자, 이제순을 한껏 부려 먹는 개자식이 휴게실에 집어 던진 가방을 들고 온 것이다.

       게다가 들고 온 것으로도 모자라서 설교를 시작했으며,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에서 그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다른 기자들은 피식피식 웃거나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파티션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었다.

         

       엿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기자라는 놈이 이딴 허름한 가방이나 들고 다니고. 기자는 말이야,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야, 사람을 만나는 직업! 사람을 만나는 직업은 뭘 해야 해? 추레하지 않게, 깔끔하게 다녀야 한다. 그래야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믿음을 줘서 인터뷰를 수월하게 따낼 수 있지 않겠냐? 그런데 이게 뭐냐. 어디 시장바닥에서 한 10년은 굴러먹은 것 같은 가방을 가지고 다니고 말이야. 어이구, 퀴퀴한 홀아비 냄새까지 나네. 어디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오래되었나 봐?”

       ‘이 개자식이.’

       “그리고 겉이 이러니 뭐…. 보자. 어이구 그럼 그렇지. 안도 아주 개판이야 개판. 먹다 남은 이온 음료에, 찌그러진 사이다 캔에…. 이야. 새 속옷이랑 입었던 속옷이 그대로 섞여 있네? 인마, 최소한 비닐봉지에 좀 싸 놓기라도 해라. 게다가 자료는 이게 뭐냐? 학창 시절 가정통신문이냐? 바닥에 처박혀서 꾸겨져서 아주 형체도 알아볼 수가 없네.”

       ‘개 같은 새끼.’

       “이건 또 뭐야? 이야 가지가지 한다. 우유 팩은 여기서 왜 나오냐? 너 진짜 초등학생이냐? 먹지도 않은 우유 팩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어이구 빵빵하게 부푼 거 봐라. 이거 터졌으면 아주 볼만했겠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수첩?”

         

       선배는 이제순의 가방을 제멋대로 뒤지며 온갖 방법으로 그를 갈궜다.

       모두가 들리는 곳에서,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가 마침내 수첩까지 찾아냈다.

         

       선배는 그 수첩의 감촉에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첫 페이지를 슬쩍 펼쳐보았다.

         

       그리곤 웃기는 것이라도 봤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물을 바치면 정보를 줘? 이상한 거나 들고 다니고 있네.”

         

       선배는 알만하다는 듯 이제순의 위아래를 훑어보고는 ‘열심히 해.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라는 경고를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이제순은 사라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빌어먹을 놈이. 개고생하며 자료 정리해서 줬더니, 칭찬은 못 할망정 이딴 짓거리나 해?’

         

       그는 자기 손에 들린 수첩을 바라보았다.

         

       ‘후회하게 해주마,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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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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