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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6

       수십 척에 달하는 증기선이 티림스 강에 정박한다.

       

       바다도 아닌 강에 무역선이 잔뜩 들어온다는 게 보통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티림스 강은 대하(大河)였다.

       

       상대적으로 좁은 강폭에 나란히 늘어선 무역선들.

       

       그중 가장 안쪽으로 들어온 선수(船首)에 초록 눈을 한 엘프가 타고 있었다.

       

       고개를 치켜든 헤를라인이 입을 떨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호, 호르데 군이잖아! 여긴 어떻게 온 거니…?”

       “말씀드리자면 길어요! 일단 타세요!!”

       

       그래, 정황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모처럼 내려온 동아줄이다. 일단 잡고 보아야만 했다.

       

       제국군은 마왕군이 추격망을 완전히 좁혀올 때까지 승선하고 또 승선했다.

       

       자그마치 백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컨테이너 선박에 탑승했다.

       

       투두두두!

       

       어느덧 마왕군의 추격대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놓치면 마왕님을 볼 면목이 없어!!

       

       쫓는 쪽이나, 쫓기는 쪽이나.

       

       다급하긴 마찬가지였다.

       

       “공계마도사 5만 명은 속히 민간인을 한 명씩 데리고 먼저 이동하라. 상황을 보아 강 중간에서 랜딩을 시도한다!”

       “알겠습니다!”

       

       레너윌의 지시에 따라 10만 명이 먼저 빠져나갔다.

       

       이후 남은 피난민을 깡그리 모아 무역선에 집어넣었다.

       

       배 하나에 대략 2만 명.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승선 규모였다.

       

       “후우.”

       

       간발의 차였다.

       

       정말 가까스로 전부 태우는 데 성공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또 누군가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으이구, 사랑한다 내 제자! 반년 키웠다고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구나!”

       “수, 숨 막혀요, 선생님……!”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에서 시작된 헤를라인의 폭풍 허그.

       

       커다란 미드에 얼굴이 파묻힌 버멜은 그대로 질식사할 뻔했다.

       

       “미, 미안. 선생님이 너무 세게 안았니…?”

       “괘, 괜찮아요. 콜록.”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클라이스는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자신도 메리가처럼 학생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엔 플레어에 미쳐 있었기에 학생을 돌보거나 후학을 기를 생각을 미처 못했다.

       

       ‘저렇게 안아주면 학생들은 다들 좋아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에테르를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땐 사죄의 포옹을 하자고 생각한 클라이스였다.

       

       “그러면 이제 얘기해 주겠니?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아, 그건….”

       

       그때였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바로 옆에서 낑낑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샌드위치처럼 붙어 있는 엘프였는데, 눈이 오팔이나 투어말린처럼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보기 드문 은빛 머리카락까지.

       

       탄산수처럼 톡톡 튀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당신은….”

       “세실 르네이. 일리야드 마도 아카데미의 총장이에요. 그쪽은 메리가 헤를라인 교수님이신가요?”

       “저, 그걸 어떻게…?”

       “수년 전에 교환학생으로 오셨잖아요? 어엿한 교수가 되시다니, 비록 타교 사람이지만 저 르네이는 기쁘답니다.”

       

       헤를라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를 기억하고 계세요? 아니, 그보다도 저는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진실한 교육자는 모든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있어야 하는 법이랍니다.”

       

       세실 총장은 우수한 학생을 일일이 기억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 기준에선 헤를라인도 그 범주에 속했다.

       

       세실은 후후,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이 패퇴하고 있으니 구원을 하러 가야 한다고 제가 일러드렸어요. 결국 나라의 높으신 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죠. 이렇게 해운사에서 튼튼한 배를 대여받는 것도 가능했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총장님은 생명의 은인이세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사라면 저 말고 거기 있는 제자분에게 하세요.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테니까요.”

       

       그렇다.

       

       마왕군의 행동패턴을 꿰고 있었던 버멜이 세실에게 간언했기 때문에 제국군이 살 수 있었다.

       

       “정말이니? 고마워, 호르데 군.”

       “당신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헤를라인을 포함하여 주변인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버멜.

       

       하지만 마냥 편안할 수는 없었다.

       

       지금 버멜의 머릿속에는 칭찬에 의한 기쁨이나 쑥쓰러움보다는, 누군가를 향한 미안함과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미안하다, 에테르.’

       

       이쪽 일이 더 급해서 당장 도와주지 못했다. 정부 설득에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자칫하면 헤를라인과 하스펠트, 살리에르를 포함하여 제국의 핵심 인물을 전부 잃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수도로 돌아가면 바로 꺼내줄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주기를.

       

       […….]

       

       

       **

       

       

       [(속보) 제국군 대규모 후퇴, 티림스 강 하류로 철수 예정….]

       

       “기어코 일이 터졌구나.”

       

       수도에 핵이 떨어졌다는 걸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보름이 조금 넘었다고 제국이 완전히 패퇴했을 줄이야.

       

       로즈마리가 수도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걱정된다.

       

       신문 기사를 천천히 넘겨보던 중, 아카샤가 난데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새끼들.”

       

       욕하는 걸 보니 또 시작이구나.

       

       “야, 이거 봤어? 제국 수도에 핵폭탄 떨어진 게 네 잘못이란다.”

       “봤어. 저번 설문조사 결과잖아.”

       

       제국 수도가 내 원자폭탄에 의해 궤멸한 이후로, 카우렐리아에서 내 여론은 더욱더 나빠졌다.

       

       국민의 80퍼센트 가까이가 나를 당장 잡아 죽이라고 간원했단다.

       

       더불어 금안족에 대한 범죄도 늘어나고 있고.

       

       “이거 완전 또라이 새끼들 아니야?”

       “말조심해, 카샤.”

       “…너 왜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프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녀석들을 싸고도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귀 좀 빌려 달라는 신호였다.

       

       “……설마 그러겠냐?”

       “……?”

       “다 연기지, 연기.”

       

       아카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나와 얘가 같은 존재이긴 하더라도,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다.

       

       대표적으로 ‘나’는 지구의 지식까지 포함된 존재지만, 아카샤는 순수 판타지 버전의 나라는 것.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온갖 더러운 꼴 다 본 나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았다.

       

       “조만간 상황이 역전될 테니까 잘 봐둬.”

       “뭐가 어떻게 역전되는데?”

       “여기 신문 기사를 봐.”

       

       나는 그러면서 내가 읽고 있던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여주었다.

       

       “티림스 강을 통해 탈출…. 이게 왜?”

       “정말 모르겠어?”

       “인간 놈들이 개처발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 잠깐.”

       

       아카샤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

       

       우리는 씩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거지.”

       “그런 속담이 있어?”

       “…내가 방금 만들었어.”

       “뭐야 그게.”

       

       나는 아카샤와 낄낄거리며 침대를 뒹굴었다.

       

       그렇게 밥 먹고 종이학이나 접으며 지내다가 하루가 또 지났다.

       

       더럽게 지루하구나.

       

       “…윽!”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또 이런다.

       

       목울대 너머로 찝찔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세면대로 달려갔다.

       

       “커, 허윽…! 허어윽……!”

       

       피가 한 바가지 쏟아져 나왔다.

       

       여전히 검은빛이 우세했으나, 이전에 비하면 붉은 기운도 또렷해진 상태.

       

       “흐읍…!”

       

       핏물을 몇 번이고 뱉어내자니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여나가는 감각이었다.

       

       홱.

       

       입가를 닦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카샤는 세상 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카샤가 눈치라도 챈다면 일이 성가셔진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세면대를 깨끗이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얇은 이불을 덮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문득 버멜이 보고 싶어졌다.

       

       “개새끼.”

       

       같은 빙의자면 구해주러 와야지, 어디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마왕 잡을 때까지 긴밀히 협력하기로 약속까지 나눈 사이인데 얼굴 한 번 비추러 안 오다니.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

       

       

       카우렐리아 최대의 항구 도시, ‘프란코’.

       

       닷새에 걸친 항해 끝에 1백만에 달하는 제국인들이 이곳에 도달했다.

       

       백여 시간 만에 육지를 밟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흙을 집어먹기 바빴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목숨만큼은 건졌다.

       

       그 사실이 제국인들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을 지폈다.

       

       하나는 안도감이었으며, 또 하나는 좌절감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복수심이었다.

       

       레너윌을 포함한 지휘부는 잃어버린 국토를 수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까드득 갈았다.

       

       “전 부대를 집결하라. 식사를 마친 뒤 바로 메르헤름으로 출발한다.”

       

       카우렐리아의 수도, 메르헤름.

       

       피난민이 된 이상 수도로 가서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있었다.

       

       황제를 비롯한 실제 행정부가 궤멸했기에 제국은 사실상 레너윌이 지도하는 유랑국가가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피난민 중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중년 남성도 있었다.

       

       “아버지, 식사 안 하세요?”

       “로르웰이구나. 아빠는 가장 마지막에 할 생각이란다.”

       

       남자의 이름은 ‘크롬웰 살리에르’.

       

       살리에르 가문의 가주이자, 로테와 로르웰 남매의 아버지 되는 남자였다.

       

       그는 평소대로 서부 국경을 수비하다가 이곳까지 후퇴했다.

       

       어찌어찌 제 목숨은 살았지만, 마수의 손에 도륙당하던 영지민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버지, 지난 날은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로르웰이 등을 토닥여 주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영지민을 전부 데려오지 못했다. 그 점이 고통스러워서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배급이라도 도와야겠구나.”

       “또 이러신다. 여기 오면서 얼마 드시지도 못했잖아요?”

       

       크롬웰은 제발 밥부터 먹으라는 아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귀족은 권리가 있는 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도 쫄쫄 굶고 있는 아랫사람이 많을 텐데, 그들에게 보리죽이라도 나눠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했다.

       

       봉사를 위해 급식소를 찾아 헤매던 중, 엘프 하나가 크롬웰에게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대뜸 나타난 그가 죽그릇을 내밀었다.

       

       “변변찮지만 드시지요, 백작님.”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드리세요.”

       

       크롬웰은 그대로 그릇을 밀어냈다. 청년은 입을 슬쩍 벌린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듣던 대로 대덕(大德)이시군요.”

       “그리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나저나 절 아십니까?”

       

       크롬웰은 그러면서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의미를 두고 던진 시선은 아니었다.

       

       “……!”

       

       정령.

       

       엘프 청년의 머리 위로, 흰 머리카락을 지닌 바람의 정령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격이 보통이 아니다.

       

       아무리 못해도 최상급.

       

       단 하나, 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흠결이었지만. 크롬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

       

       정령은 고개를 까딱이며 청년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아다녔다.

       

       계약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계약을 하면 나타나는 ‘마력파 동조’ 현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관심만 두고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

       

       엘프 청년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했다.

       

       어느덧 바람의 정령은 쿡쿡 웃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저, 백작님?”

       “아, 음. 어디까지 얘기했죠?”

       “제가 백작님을 알고 계신다는 것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청년이 다시 죽그릇을 내밀었다.

       

       “드시지요. 굶은 채로 수도에 가시면 따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크롬웰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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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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