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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6

       생각해보면 이쪽으로 와서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말을 쓴 일은 꽤 드물었다.

        

       황제의 아이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보고 철저하게 ‘폐하’라고 불렀었으니까. 사실 이건 아버지라고 부르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지위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지만.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는 ‘아버지’보다는 ‘황제’라는 지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에서 내가 쓰던 어머니라는 단어와 아버지라는 단어 모두 상대를 속이고 내가 더 유리한 곳에 있기 위한 단어였다.

        

       그레이스 가에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레이스 가는 자신들이 거둔 고아들을 모두 확실하게 키워서 자기네 사람으로 쓰니까. 그렇다고 무슨 고기 방패 같은 것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거처와 식량을 모두 제공하면서 제대로 된 사용인으로 대우해준다.

        

       하지만, 당시 내 기준으로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아무리 배곯을 일이 없는 사용인이라고 해도 결국 일개 평민이다. 황녀인 앨리스와 클레어를 만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컸다.

        

       그 두 사람과 제대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는 귀족이라는 신분이 필요했고, 나는 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레이스 가의 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 ‘클레어가 그레이스 가의 딸이 된’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그레이스 남작 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 과정은 그 과정 자체가 거짓투성이였다는 말이다.

        

       “어머니.”

        

       그런데도 나는 지금 그레이스 남작 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 실비아.”

        

       그리고 나의 말을 들은 그레이스 남작 부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다시 그레이스 가에 들어가 그 딸로서 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미 황녀라는 지위가 있었고, 심지어 황위 계승 순위가 황태녀 바로 다음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남작가의 딸이 되겠다고 하면…… 누가 들어주기는 할까?

        

       그리고 그 사실은 그레이스 남작 부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크게 체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 그 사실을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진짜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키운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그레이스 남작 부부에게 있어 나는 그런 자식이었다.

        

       정말로 그레이스의 피를 이은 레오가 있었지만, 나는 그레이스 가문의 딸로 있는 동안 레오와 비교해서 차별당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딸이라서, 싸우는 방법은 모르는 딸이라서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면 모를까.

        

       원래도 전혀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클레어가 그레이스 가에서 얼마나 사랑받으며 자랐을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어머니’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조건 없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건만 보고 양녀가 된, 말도 안 되게 타산적인 관계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괜찮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말했다.

        

       “그 이후로 혼자 많은 생각을 했어. 어째서 황녀라는 지위에 있던 아이가 나의 딸이 되려고 했는지, 무엇을 노리고, 무엇을 원하고 아래에 들어왔는지.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고,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했었는지.”

        

       ‘어머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단다. 나는 너를 딸이라고 생각했어. 아니, 딸이었지. 그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단다. 우리가 좋아서 받아준 아이고, 그렇기에 그저 소중한 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어.”

        

       “…….”

        

       “그러니까, 구태여 사과할 필요는 없단다.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 딸이 있어서 우리도 행복했으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사실 놀릴 법도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여도 나는 꽤 오랫동안 쿨뷰티 컨셉을 성공적으로 유지한 사람이다. 비록 지금은 그 컨셉이 와장창 깨졌고, 그걸 되돌릴 방법도 없긴 했지만.

        

       원래 뭔가 컨셉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큰 리스크는 그 컨셉이 깨졌을 때다. 특히 무감정한 사람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들키는 것만큼 쪽팔린 것도 없다.

        

       쿨뷰티라면 감정을 서서히 찾아가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다. 나처럼 한순간에 깨지는 거 말고.

        

       그런데 그런 인물이, 눈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울어버렸다면, 솔직히 놀릴 법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를 보는 앨리스나 클레어, 레오의 표정은 엄청나게 측은했다.

        

       “…….”

        

       뭐, 그래도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던 것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졌지만.

        

       놀리는 것 말고도 할 이야기는 많았다.

        

       앨리스의 시선을 예로 들자면, ‘황녀이면서도 남작 부인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허락해 주겠지만, 다른 사람들 눈앞에서 그러지는 마라’ 같은 말. 우리야 그런 기억이 있으니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귀족들의 눈에 들어가면 여러모로 이야기가 꼬이게 될 거다.

        

       물론 나는 그레이스 남작가는 그런 헛소문 따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황태녀인 앨리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원래 근거가 희박한 헛소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커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앨리스는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앨리스뿐만이 아니라 클레어,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스 남작 부인…… 그러니까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주셨다.

        

       “조금 더 있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지 않으련?”

        

       나가기 전에 그렇게 물으셔서,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아버지’와도 이런 대화를 나누게 하고 싶으신 거겠지.

        

       ……빚진 것이 많으니, 그 정도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최소한 ‘자식’ 된 도리니까.

        

       “조금은 진정됐어?”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가 목멘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야.”

        

       클레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언니를 언니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어서.”

        

       “아니, 이전에도 당당하게 불렀잖아.”

        

       옆에 앉은 레오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것을 클레어는 말끔하게 무시했다.

        

       “이젠 진짜로 언니잖아. 그렇지?”

        

       나한테 다시 한번 확인해보려는 듯 그렇게 말하는 클레어에게,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번에도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목이 꽉 막힌 것 같아서.

        

       소매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급하게 눈을 닦느라 내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손수건을 꺼냈을 때는 이미 소매가 눈물을 더 수용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은 손수건도 마찬가지고.

        

       생각해보니까 손수건 들고 다니라고 했던 사람도 어머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할까?”

        

       클레어의 말을 들은 레오가 말했다.

        

       “누님이라고 부를까?”

        

       “…….”

        

       나는 고개를 들어 레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왜?”

        

       자기에게만 다른 반응을 보이자 레오가 항변했지만, 옆에 앉아있던 클레어가 쯧쯧 혀를 찼다.

        

       “누님이라는 표현은 너무 놀리는 것 같잖아. 지나치게 높였다고. 가족으로서의 친근함이 없어.”

        

       “그, 그런가?”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그냥 레오가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는데 오그라들어서 그런 건데.

        

       “그래. 네가 내 동생일 리는 없으니까.”

        

       클레어는 조금 핀트가 엇나간 말을 했다.

        

       “어, 그러면 누나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닌데.

        

       그런데 그렇다고 레오만 따돌리는 것도 조금 그렇다. 레오와 클레어는 서로를 확실하게 남매지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만약 그사이에 끼어들고자 한다면, 나도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되겠지.

        

       “누나?”

        

       “…….”

        

       그래, 뭐.

        

       누님이라는 표현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옆에서 그 광경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앨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비아는 내 동생이니, 너희들도 내 동생인 거네.”

        

       “엑.”

        

       앨리스의 말에 클레어는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왜 네 동생이야? 언니가 너더러 언니라고 부른 적 있어?”

        

       없……지는 않나?

        

       흑역사가 스멀스멀 올라올 것 같아서 나는 생각을 정지했다.

        

       “나는 앨리스가 누나여도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너는 나한테도 동생이니까 상관없고.”

        

       “엑.”

        

       ……저 문제에선 빠지기로 하자.

        

       왠지 울적했던 기분이 바보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날아가 버렸다.

        

       서서히 격해지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들으면서, 나는 식어버린 찻잔으로 손을 향했다.

        

       가만 보면 자매 같은 분위기도 든단 말이야. 뭐, 이런 말을 했다가는 클레어와 앨리스 둘 다 기겁하겠지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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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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