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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6

       괴물 서커스.

       그 단어는 그녀가 본 이고르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의 기묘한 외형도, 이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도,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곳의 단장이라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업계에서 경원시하는 괴물 서커스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안나의 눈빛 속에는 그를 향한 조금의 경멸도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에 대해 동정심을 느꼈다.

         

       “이고르 단장님이시군요.”

       “그래.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은 평범한 서커스가 아니야. 나는 서커스 그랑프리를 노리고 있거든!”

         

       이고르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안나는 괴물 서커스로는 본선 진출은커녕 대회 참가를 위한 후원자를 구하는 것도 힘들 거라는 지적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응원을 담은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단원들은 얼마만큼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이고르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모자를 벗고 번들거리는 정수리를 긁적였다.

       

       “아직 나 한 명이야. 이제부터 모아 봐야지. 어때? 우리 서커스단에 들어올래? 부단장 자리를 줄게.”

         

       뻔뻔한 건지 당당한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제안에 안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제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곡예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요.”

       “내 쇼를 보고 비웃지 않았잖아. 그거면 충분해.”

         

       그는 짐짓 유쾌하게 말했으나,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가 사람을 믿는 기준에서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느껴졌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그제야 이고르는 아차 싶어 이마를 찰싹 쳤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아가씨는 평론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

       “네. 하지만……아까 본 뮬 선생님 같은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저는 <크리스티앙 가이드>에서 일하고 싶어요.”

         

       이고르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흠, 그거라면 내가 힘써줄 수 있는데? <크리스티앙 가이드>의 편집자 한 명이랑 나는 아주 잘 아는 사이거든. 어때? 앞으로 3년만 날 도와주면 거기서 일하도록 해주지. 정식 평가원으로 말이야.”

         

       그의 말에 안나는 순간 귀가 솔깃했다. 솔직히 이번 마지막 과제를 제출한다고 해도 그녀가 정식 평가원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가이드가 심사원을 선발하는 기준은 매우 엄격했다. 퇴직한 평가원들이 말하길 다들 삼수, 사수는 기본으로 했다는 것이다.

         

       3년을 일하는 것으로 평가원의 자리가 보장된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이고르가 3년이라는 시간을 단서를 단 것은 아마 서커스 그랑프리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일 것이다. 한 번 곡예사의 길을 포기했던 그녀가 그랑프리에 나갈 수 있는 것 또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평론가가 되기를 희망했을 때 먹었던 마음이 떠오른 것이다.

         

       “감사합니다만, 제 목적은 그냥 잡지사에 취직하는 게 아니에요. 공정한 평론가가 되는 게 꿈이죠. 극작가 크리스티앙처럼 말이에요.”

       “크리스티앙처럼 말인가……?”

         

       이고르의 입에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는 탓에 눈빛을 읽기 힘들었다.

         

       “네. 그래서 청탁으로 들어가는 건 내키지 않네요. 무엇보다 저는 정말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간단한 공 저글링도 몇 개 못해서 팔이 꼬이거든요.”

       “좋아, 좋아. 알겠어. 자네의 마음은. 괜한 제안으로 마음을 어지럽혀서 미안하네.”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전시실 밖 창문가에 앉아 부리로 창을 툭툭 두드렸다. 구돌이는 그녀 보고 고개를 까딱이더니 다시 하늘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엘라가 표를 구한 모양이었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일행이 기다려서요.”

       “그래? 그럼 나도 이만 떠나지 뭐. 그래. 평론가로 일한다면 언젠가 다시 볼지도 모르겠군. 만나서 반가웠네, 안나 양.”

         

       이고르는 검은 망토를 휘적이며 방을 나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딸막한 키에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데도 그의 걸음걸이는 믿을 수 없이 빨랐다.

         

       안나는 그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그의 생김새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 정도로 놀랐다면, 매일 사부님의 붕대를 가는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괴물 서커스라는 단어가 주는 꺼림칙함 혹은 유쾌한 일면 뒤에 조금씩 느껴지던 그의 괴팍함 때문일 것라 생각하며 그녀는 전시실을 나왔다.

       잠시 후, 로비에 들어선 안나는 멀리서 엘라가 신난 표정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안나, 제법 괜찮은 자리에 표를 구했어! 이것 좀 봐! 내가…….”

         

       그러나 안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 손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몸을 붙들었다.

         

       “윽, 무, 무슨 짓이에요?”

         

       안나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까 전시실에서 이고르를 패대기쳤던 그 경비원이었다. 그는 안나의 팔을 단단히 붙든 채,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말쑥한 차림새의 노인을 향해 말했다.

         

       “이 여자입니다. 분명히 아까 그곳에 있었어요.”

       “그런가? 그럼 데려가지. 아, 손님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는 이 기념관의 관장인 오르세라고 합니다. 현재 전시실에 도둑이 들어서 용의자를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노인은 억양은 정중하면서도 나긋했다. 그의 느릿느릿한 목소리는 지금 벌어지는 소란이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도둑이라는 말에 경비원의 손에 붙잡힌 안나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저거 아까 봤던 그 화상 입은 계집애 아니야?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잖아. 딱 봐도 하층민인데 이런 데를 왜 와?

       난 보는 순간, 도둑 길드 소속인 거 같았어.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은 엘라의 귀에도 들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여 대긴! 안나가 얼마나 착한 친구인데…….

       그녀는 욱해서 경비원에게 달려들었다.

         

       “그 손 놔요! 도둑? 웃기고 있네! 지금 안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증거는 있어요?”

         

       엘라의 억양은 노인과 정반대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도발적이면서 감정을 자극했다. 이만 제 갈 길 가려던 손님들조차 다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세 관장은 겉으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난처해했다. 이러다가 근처를 돌아다니는 기자들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좋아. 자네도 그럼 같이 가지.”

       “안나의 팔부터 풀어주세요.”

       “알겠네. 순순히 따라온다면 거칠게 대하진 않겠어.”

         

       그렇게 풀려난 안나는 엘라와 함께 오르세와 경비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안나,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술관 구석에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십수 명의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관장에게 소리쳤다.

         

       “오르세 관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손님이란 말입니다!”

       “나는 프리미엄 입장권을 소지한 사람이오. 멀리 제국에서 온 사람을 이렇게 박대하다니!”

       “정식으로 남작의 지위를 가진 나를 감히 도둑으로 의심한단 말인가?”

         

       오르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항의를 받아주었다. 그러다가 경비원들이 남은 용의자들까지 마저 데려온 뒤에야 입을 열었다.

         

       “사실 도둑맞은 물건이 있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그 말에 손님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들을 불러모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사실 아까 동편 전시실에서 몇몇 손님들이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희 의무실의 당직 의사가 지금 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쓰러진 손님들의 증상이……저주 역병과 같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저주 역병이라고요?”

       “네. 현재 성당의 신부님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그분이 도착하시면 더 확실해지겠지요. 그동안 저희는 아까 동편 전시실에 있었던 손님들을 모두 모으기로 했죠. 이보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인가?”

         

       관장의 질문에 경비원 한 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인이 한 명 있었는데 놓쳤습니다. 꼽추에다 다리까지 절고 있어서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아마도 기념관 밖으로 나간 모양입니다. 인원을 밖으로 돌려서 뒤쫓아 볼까요?”

       “아니, 그만두게. 그걸로 소란스러워지면 본말전도니까.”

         

       그때, 지금껏 얌전히 얘기를 듣던 손님 한 명이 일어서서 질문했다. 그는 베가스 극장가의 유명 인사인 시인 뮬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밀스럽게 모은 이유가 뭐요? 도둑이 들었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말이오.”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려고 합니다.”

         

       관장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하늘도시 히포드롬에서는 서커스 그랑프리의 예선전 개최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최종 후보군에 대한 투표만을 남겨두고 있지요.”

         

       눈치 빠른 몇몇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탄성을 내질렀다.

         

       “심사위원들은 토의와 투표를 통해 공정하게 결정한다고 하지만, 그 뒤로는 국가, 가문, 기업 등 정치 집단 간의 거래가 치열하게 오가고 있지요. 우리 기념관도 그 최종 후보군 8곳 안에 들었습니다. 제 소식통에 따르면 그중에 한 곳 혹은 두 곳이 제외될 거라고 하더군요. 몇몇 군데는 거의 확정된 모양이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극장 내부에서 역병이 돈다……그런 소식이 전해지면, 확실히 탈락하겠지요.”

         

       그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이제 관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베가스의 극장가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약 저희 크리스티앙 기념관이 탈락하고 저 샤를로티아의 천박한 장미 풍차 카바레 같은 곳이 선택되는 일이 발생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베가스의 극장가를 우습게 여길까요? 크리스티앙의 이름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관장이 뭐라고 하던 따지고 들 생각이었던 엘라가 침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는 크리스티앙의 팬이 많았고, 엘라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관장 말대로 크리스티앙 기념관이 서커스 그랑프리의 개최지에서 제외된다면 확실히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관장이 그들에게 제시한 것은 간단했다. 예선전 개최지 최종 투표가 있는 10일 뒤까지 그들이 모두 이곳에 ‘격리 치료’를 받는 것이었다. 모든 편의는 기념관 쪽에서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격리 치료라는 명분을 붙인 것은 나중에 문제 제기가 들어왔을 때, 대꾸하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의 제안에 강제성은 없었다. 애초에 관장에겐 그럴 권한도 없었다. 그는 그저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뿐이다.

         

       안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절하려고 했었다. 그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크리스티앙 가이드의 평가원이 되는 최종 시험. 그것을 위해서는 공연을 관람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손님들 대다수가 제안을 받아들이고, 몇몇 목소리 큰 크리스티앙 숭배자들이 독촉해대는 통에, 어물쩍거리던 남은 사람들도 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괜찮겠어? 사부님을 불러올까?”

         

       엘라는 관장에게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애초에 전시실에 간 적도 없는 그녀는 치료하겠다는 명분으로 묶어둘 수 없었다.

         

       “나 정말 괜찮아. 덕분에 좋은 곳에서 먹고 자게 됐는걸. 거기다 크리스티앙의 작품은 여기서 계속 관람할 수 있으니. 더 좋지. 사부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안부나 전해줘.”

         

       안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려 1년 넘게 공을 들인 수습 과정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먹게 된 게 안타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초시에 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어차피 안 됐을 거야.

       내년에 다시 보지 뭐.

         

       “너는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기나 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엘라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점수 미달이 아닌 실격 조건으로 탈락하게 되면, 3년 동안 시험을 참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고르 단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그렇게 그녀는 실의에 빠져 멍하니 방안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문뜩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게 됐다.

         

       그녀는 격리 대상자들에게 머무를 방을 배정하고 있던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아까 전시실에 있던 사람 중에 여기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저주 역병에 걸렸다고 보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현재 의무실에서 따로 마련한 병동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안나는 경비원으로부터 열쇠를 받고 방을 나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헤아려봤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알아차리게 됐다.

         

       아까 이고르를 보고 비웃었던 사람들.

       시인 뮬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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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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