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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6

    미니 사신 정원, 마시멜로 벌판.

    그 한가운데서 붉은 사신이 진지한 표정으로 하얀 아귀를 조각하고 있었다.

    처음 겉멋이 잔뜩 든 상태로 하얀 아귀를 조각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스르륵. 스르륵.

    붉은 사신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하얀 아귀의 피부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하얀 아귀에게서 날카로운 뿔과 프릴의 형태가 점점 드러나면서, 그 모습이 점차 트리케라톱스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붉은 사신은 하얀 아귀 두 마리를 조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하얀 아귀 두 마리를 붙잡고 나름대로 괜찮은 포즈를 취하게 했다.

    ‘완성!’

    턱을 한껏 들어 올린 모습의 트리케라톱스 하얀 아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사신은 그 세 뿔 하얀 아귀 두 마리를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시멜로 평원들 돌아다니던 황금 사신과 검은 사신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짝짝 박수를 쳤다.

    ‘멋있어!’

    ‘잘했어!’

    그리고 몇몇 황금 사신들은 붉은 사신의 조각을 보면서 흥미가 생겼는지, 마시멜로 평원에서 야생 하얀 아귀를 몇 마리 붙잡아서 토막 내기 시작했다.

    히히.

    미니 사신들의 칭찬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던 붉은 사신은 양손에 불로 만들어진 도장을 만들어 내더니, 하얀 아귀의 몸통에 강하게 찍었다.

    ‘혁명!’

    그러자 하얀 아귀의 몸통에는 까맣게 탄 낫과 망치의 문양이 각각 새겨졌다.

    뀨힝힝.

    그런 세 뿔 아귀 뒤편에서 구슬픈 하얀 아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사신이 조각하는 곳 근처에는 깊게 파인 구덩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붉은 사신이 조각을 하다가 과도하게 조각하는 바람에 버려진 하얀 아귀들이 쌓여있는 곳이었다.

    하얀 아귀들은 고통을 느끼진 못해도, 자신의 서글픈 상황을 소리로 뱉어내고 있었다.

    뀨힝힝.

    붉은 사신이 자신의 조각을 자랑하고, 미니 사신들이 짝짝 박수를 치는 곳에 조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걸음 소리는 붉은 사신 바로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손 하나가 내려와 부드럽게 붉은 사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조각 잘했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붉은 사신이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린 목소리.

    ‘!’

    설마 하는 마음에 목이 끊어질 것처럼 획하고 빠르게 고개를 돌린 붉은 사신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붉은 사신 뒤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어 붉은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녀의 모습.

    아주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금발 소녀가 눈을 뜨고, 붉은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금발 소녀가 그렇게 내뱉은 말에 붉은 사신은 포롱포롱 눈물을 흘리며, 금발 소녀의 뺨에 달라붙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제임스 타워.

    제임스는 주차장과 제임스 타워를 잇는 입구에 서 있었다.

    딱딱한 클립보드에 종이를 끼워서, 입구를 지나가 물자를 체크하며 리스트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이 물자들을 제대로 옮길 수 있게 됐네요.”

    옆에서 똑같이 클립보드를 들고 체크를 하던 녹색 머리 연구원이 말했다.

    “그래, 정말 다행이지. 인력 지원은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제임스는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임스의 말처럼 제임스 타워 인근에는 전보다 사람이 부쩍 늘어난 상태였다.

    이제 제임스와 몇몇 연구원 그리고 보안팀만 힘겹게 돌아다녔던 제임스 타워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인원이 적었지만, 알렉스마저 이탈하게 되면서 남은 인원에 업무가 가중되던 중이었다.

    사실 한국 현지에서 인력을 고용할 계획을 세웠었고, 이미 꽤 많은 사람을 채용했었다.

    하지만 ‘협회 인형’의 등장으로 큰 문제에 봉착해 버렸다.

    제임스는 ‘인형’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뽑으려고 했지만, 그런 사람은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채용했던 사람들마저 협회 인형을 사용하기 시작해서 답이 없었다.

    그렇게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도중, 미국 오브젝트 협회에서 ‘협회 인형’ 사태를 대처하기 위해 인력을 대량으로 보충해 주었다.

    주차장에서 제임스 타워 내부로 옮겨지는 물자는 다양하면서도 엄청나게 대량이었는데.

    마치 전쟁, 혹은 아포칼립스 사태를 대비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량의 식량과 깨끗한 물.

    오브젝트 대항용 무기와 온갖 종류의 자재.

    제임스는 타워를 일종의 쉘터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한 것 같군.’

    그런 생각을 하며, 리스트를 작성하는 제임스에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넘어온 보안팀이었다.

    “사장님. 알렉스는 ‘협회 인형’을 구매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역시 그랬나….”

    제임스는 보안팀이 넘겨준 사진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진에는 알렉스가 거주하던 아파트 내부에서 발견된 인형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상당히 고가의 인형인지,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는 외형의 아름다운 여성형 인형이었다.

    다만 너무 비현실적인 신체 비율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아니라 인형인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제임스는 사진을 확인하고는, 보안팀에 단단히 당부했다.

    “다시 한번 직원 모두에게 알려주게. 절대로 ‘협회 인형’과 장시간 접촉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렇게 제임스 타워 보안실 코르크 보드에는 커다란 가슴을 가진 알렉스의 인형이 찍힌 사진이 박제되었다.

    ***

    하늘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저녁, 인형 박람회의 막이 올랐다.

    개회식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고, 그 아름다운 광경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유령화를 사용해서 홀로 박람회장 입구에 도착한 나는 그 불꽃놀이를 올려다보며,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미니 사신들은 협회 인형을 싫어하니까 데리고 올 수 없었고, 예린이도 협회 인형을 꺼리는 것 같아서 혼자서 와버렸다.

    사실 예린이는 가자고 했으면 같이 와줬을 것 같기는 했지만, 유령화를 안 쓰고 돌아다니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아서 부르지 않았다.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독특한 모습의 협회 인형들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입구의 양옆을 장식한 인형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박람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입구 반대쪽의 인형은 양손으로 박람회장 안쪽을 가리키며 “정말 놀라운 협회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입구를 넘어가자, 박람회의 송파구 인근에서 본 적이 없었던 특이한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듯한 투명한 외관의 인형, 형형색색의 꽃들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인형,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학자 같은 인형까지.

    나는 그 인형들의 오브젝트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에 감탄하며 천천히 박람회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중에 조금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인형들도 좀 있었다.

    그것은 아기 모양 인형이었다.

    싸구려 아기 모형처럼 생긴 그 인형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기어다니며, 입을 벌리곤 했는데.

    그 입속이 까맣게 칠해져 있어서 굉장히 꺼림칙한 느낌을 풍겼다.

    도대체 저딴 인형을 누가 사는 거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인형이 눈에 띄었다.

    키가 5m쯤 되는 초대형 인형이 육중한 철골 구조물을 들어 올리는 시연을 하고 있었다.

    <건설용 인형>이라고 이름을 붙인 인형이었는데, 건설 현장에 쓰이는 크레인을 대체할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손이 여러 개 달려서, 실험 장치를 한꺼번에 다루는 실험 인형도 있었고, 몸이 뱀처럼 길쭉하게 늘어나는 인형도 보였다.

    ‘TV 광고랑 달리, 징그럽게 생긴 인형들이 많네.’

    <황금 사신을 대체할 반려 인형!>이라고 광고한 것치고는 너무 기괴해 보였다.

    그렇게 인형들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좀 신기해 보이는 전시관이 눈에 띄었다.

    외부 TV 광고나 전단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전시관이었는데, 그 전시관 위에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대 오브젝트 경호 인형 전시관>

    ‘오!’

    나는 인형의 전투력에도 상당히 관심이 있어서,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서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경호 인형들은 5급부터 시작해서 특급까지 분류되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가장 강한 인형들이 전시된 특급 전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은 건지, 특급 경호 인형이 있는 전시관은 다른 경호 인형 전시관보다 확연히 사람이 많아 보였다.

    중앙에 높이 마련된 전시대 위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인형이 보였다.

    마치 보디가드처럼 검은색 양복을 형상화한 도색이 입혀진 대형 인형이었다.

    신장은 대략 5미터 정도.

    다만 상반신이 기괴할 정도로 크고, 육중해 보였다.

    그리고 인간과 꽤 비슷한 다른 인형과 달리 기계적인 관절이나, 툭 불거져 나온 부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인형이 아니라 ‘로봇’이 아닌가?

    이름표에는 그 전투력이 당당히 적혀있었다.

    <아귀급 경호 인형>

    아귀급!

    내가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아귀급 경호 인형을 올려다보고 있었더니, 그 인형이 눈알을 빙글하고 한 바퀴 돌려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

    유령화 중인 나를 본 건가?

    ***

    서울 한복판의 오무룡 저택.

    그 깊숙한 곳에 있는 실험실에서 두 개의 고풍스러운 램프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오무룡이 광기에 찬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오무룡의 몸은 이미 군데군데가 썩어들어간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고, 그 두 눈에서는 불길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실험실 중앙의 움푹 파인 곳에는 질척질척한 정체불명의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그 액체 중앙에는 눈을 가린 손녀가 들어가 있었다.

    “할아버지?”

    불안해 보이는 소녀의 목소리.

    하지만 오무룡은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액체 속에 갈아버린 인간의 시체를 끊임없이 붓고 있었다.

    보존 중이던 손녀의 클론들을 갈아서 만든 것이었다.

    조그마한 소녀의 손가락 같은 것들이 액체 위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인간을 손쉽게 녹이는 액체였지만, 중앙에 위치한 ‘손녀 인형’에게는 영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든 클론을 갈아버렸는데도, 액체는 완성되지 않았다.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오무룡의 광기에 젖은 붉은 눈동자가 사방을 훑었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냉동 포트에 보존된, 진짜 손녀의 시체.

    오무룡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이었지만, 광기에 찬 그는 손녀의 시체마저 갈아서 액체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액체가 꿀렁이기 시작하더니 영롱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하하하. 완성이야!”

    액체의 표면은 유리처럼 매끈했고, 형형색색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과 불쾌한 냄새를 풍기던 진화액과 달리, 형형색색의 액체는 정말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보였다.

    색으로 가득한 색채 우주로의 통로 같았다.

    “하… 할아버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요.”

    손녀 인형은 불안한 것처럼 두리번거렸지만, 오무룡은 그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액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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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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