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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7

       격리 생활은 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락했다. 낡은 창고에서 수십 명이 끼어 자야 했던 기존 숙소와 달리 이곳에서는 개인실이 주어졌고, 해먹 대신 푹신한 침대가 제공되었다. 거기다 아침과 저녁을 숙소 근처 노상 식당에서 귀리죽과 소면으로 때워야 했던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세 끼 내내 고급 정찬이 제공되었다.

         

       오락거리 역시 풍부했다. 그들은 기념관 내에서 진행되는 모든 공연을 특석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본관에서는 크리스티앙 작품의 원작이, 별관에서는 각색, 재창작 본이 공연되었는데, 원하는 대로 골라 볼 수 있었다.

         

       손님들은 이 생활에 크게 만족하는 듯했다. 몇몇은 격리가 몇 주 더 이어져도 괜찮겠다고 말하곤 했다.

         

       안나도 어느새 비싼 입욕제를 잔뜩 넣은 욕조에서 새벽을 맞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이 생활이 계속될수록 그녀는 오히려 점점 더 비참해지는 것을 느꼈다.

         

       꿈이 꺾여 좌절한 상황에서 사치스러움을 누려 봤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어차피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건 모두 며칠 뒤에 사라질 신기루에 불과했다.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탁자에 놓인 책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크리스티앙이 소책자에 평론을 기고하던 시절의 글들을 모아둔 책이었다.

       그나마 이 책이 지금의 생활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됐다. 이것을 읽고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평론에 대한 시야도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것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상하게 글자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불편했다.

         

       그녀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덮어 침대 위에 내던졌다.

         

       격리 생활이 시작되고 며칠 뒤, 사부님이 기념관을 찾아왔다. 그분은 공식적인 그녀의 보호자였기에 사정을 알 권리가 있었다. 저주 역병이 퍼졌다는 말에 항상 침착하던 사부님은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분은 모쪼록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났다.

         

       사부님은 이맘때 베가스에 오면 항상 바빴기에 안나는 그분이 자신을 늦게 찾아왔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섭섭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엘라였다.

       그녀는 첫날 기념관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사부님에게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공연을 보러 다니느라 바쁘다는 말을 들었다.

         

       안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지 않니, 엘라?

         

       다른 친구들은 자신이 이곳에 격리되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애초에 이 수학여행은 각자 원하는 공연을 찾고 돌아다니느라 서로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마치 여행자 숙소의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처럼 오고 가며 서로가 본 공연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엘라는 학교 제일의 서커스 마니아였다. 수학여행 때면 그녀는 항상 일정표를 빽빽하게 채우고 잠시도 쉬지 않고 극장가를 돌아다니다가, 새벽에 들어와 잠시 눈만 붙이고 다시 나갔다.

         

       안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만은 좀 다를 줄 알았다. 이곳에 갇혀있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써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녀였다. 자신의 일정표를 바꾸면서까지 친구를 챙겨주지는 않았다.

         

       안나는 그녀를 이해하려 했다.

         

       그래. 나는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잖아. 그녀가 날 걱정할 이유가 없지.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옆에는 신부님과 의사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녀가 더 고생이지. 제대로 못 먹고 못 자고 돌아다니기 바쁘니까.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다독여 봐도 불만이 치솟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학여행을 오기 전부터 그녀에게 누적된 것이었다.

       

       ‘엘라, 넌 곧 학교를 떠나잖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니? 날 못 보게 돼도?’

         

       1주일 전, 엘라가 원더스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안나가 다른 때와 달리 까다롭게 따지고 나섰던 것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과 친구 사이로 남고 싶다면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안나가 원더스타인에게 품었던 경계심은 연적에게 느끼는 질투에 가까웠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3살이나 어린 여자애에게 반해버린 것은.

       그나마 자신의 눈이 가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눈빛을 들키지 않을 수 있어서 말이다.

         

       ‘딱 느낌이 왔어. 그 사람이 내 운명이야!’

         

       엘라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안나는 적잖은 분노를 느꼈었다.

         

       옆에서 늘 널 챙겨주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요리를 맡은 뒤로 네 그릇에만 건더기를 더 퍼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니? 네 옷을 수선할 때, 내가 가끔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한다는 건 넌 상상도 못 하겠지. 다 함께 목욕할 때, 내가 항상 네 옆에 자리 잡는다는 걸 넌 인식도 못 하지? 네 냄새를 맡을 때마다, 네 살결을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모를 거야.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찰리처럼 곡예에 뛰어난 애도 그녀의 친구 이상이 되지 못했는데, 자신이 뭐라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이번 격리 사건에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태도는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안나는 10일의 격리 생활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그날 오후에 소식을 들었다면서, 다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니, 안나?”

       “거기서 잘 해줬어?”

       “음식은 어땠어?”

       “저주 역병에 걸린 사람은 봤어?”

         

       안나는 그들의 말을 받아주면서 숙소 안을 둘러봤다. 그곳에 역시나 엘라는 없었다.

         

       “크리스티앙 기념관이 6대 극장 중 하나로 지정되다니!”

       “찰리가 다니는 레카체프도 뽑혔대.”

       “안에서 뭐 들은 건 없어? 시험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라도?”

         

       다들 서커스 그랑프리에 대한 소식으로 흥분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사부님이 아무리 반대해도 학교를 떠나 서커스단에 입단하고 말 거라고 떠들어댔다.

         

       어떤 서커스단이 우승할까?

       어떤 시험이 나올까?

       6대 극장을 줄 세워보면 순위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다들 열심히 떠들다가 잠들었다.

       그러나 안나만은 잠들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푸드덕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비둘기와 창가에 앉았다.

       구돌이였다. 녀석이 돌아왔다는 것은 엘라 역시 근처에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나는 재빨리 해먹에서 내려와 숙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엘라는 마침 골목 저편에서 내려오던 중이었다.

         

       “어, 안나, 구돌이 때문에 잠에서 깬 거야? 격리 해제됐지? 소식 들었어.”

         

       안나는 그녀에게 따지고 싶었다. 어째서 지난 10일 동안 자신을 한 번도 안 찾아올 수 있냐고. 하지만 정작 그녀를 앞에 두니 그런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넌 어디 있었던 거니?”

       “물론 공연을 보러 다녔지. 정말 정신없이 돌아다녔어.”

       “……그래?”

       “잠도 거의 못 잤거든. 일정표가 2배로 늘어서 말이야.”

       “2배……?”

         

       그때, 가로등 아래로 엘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머릿결도 기름이 껴서 엉망이었고, 눈두덩이도 검게 기미가 끼었다.

       그녀는 안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손에 든 종이 뭉치를 들어 보였다.

         

       “짠! 과제로 나온 공연들을 모두 관람하고 <크리스티앙 가이드>에 제출할 보고서도 썼어! 내일……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이구나. 오늘 오후 3시까지 보내면 실격 조건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안나는 그녀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내, 내가 평가원에 지원했다는 걸……알고 있었던 거야?”

         

       엘라는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몇 달 전에 사부님과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말았어. 하지만 네게 밝힐 수는 없었지. 가이드의 평가원은 공정성을 위해 가족에게도 그 정체를 숨긴다고들 하잖아? 괜히 내가 아는 척해서 좋지 않겠다 싶었어.”

         

       엘라는 제 자리에서 한 번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피로가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가이드의 평가원은 아무리 경력이 길어도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면 자격 미달로 실격이라며? 그래서 네가 격리된다는 걸 알자마자 내가 일정표대로 공연을 찾아다니며 대신 평론을 쓴 거야. 물론 내가 쓴 게 시험을 통과할 리는 없겠지만, 자격 미달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글쓰기라는 건 너무 어렵더라. 며칠 내내 네가 기고한 글들을 찾아보며 문장을 흉내 내느라 머리털 빠지게 고생했어. 글씨체는 금방 따라 했지만……. 아, 점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썼어. 그건 괜찮지?”

       “응…….”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엘라는 자신에게 신경을 안 쓰고 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극장가를 뛰어다니며 써본 적도 없는 평론을 쓰느라 잠도 못 자며 고생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사실 자신이 평론가가 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니.

       혹시 자신의 마음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고백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안나는 갑자기 용기가 솟았다.

         

       “엘라, 나…….”

         

       그때, 엘라가 갑자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안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낀 동시에 전율했다.

       정말로 그녀가 나를……?

         

       그러나 안나는 그것이 곧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엘라는 자신을 안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코를 골고 있었다. 10일 동안 누적된 피로가 자신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순간 한순간에 몰려오면서 선 채로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친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고마워, 엘라.”

         

       그녀는 잠든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

         

         

       뮬은 밤늦게 베가스의 골목을 걸었다. 그는 크리스티앙 기념관이 6대 극장 중 하나로 선발된 것을 기념하는 파티에 참석해 잔뜩 술을 얻어 마시다가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는 길을 걷는 내내 웃음을 흘려댔다. 외부인인 그가 극장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도 신났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도 그랬다. 심지어 그는 그 자리에서 기념관이 준비할 예선전에 자신도 한몫 거들어 준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이 맛에 평론가를 하는군.”

         

       젊은 시절, 그는 작가를 꿈꿨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로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고한 평론들이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그는 일순간에 업계에서 지난날 얻지 못했던 명성과 힘을 맛보게 되었다.

         

       “역시 난 재능이 있었어. 그게 드디어 빛을 발한 거지.”

         

       그는 눈을 쓰다듬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공연을 보는 순간 그 ‘점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평론가로서 명성을 얻었던 것도 그 힘 덕이 컸다.

         

       신인들이 갓 기획한 무명의 공연도 그의 눈에 점수가 높게 나와서 극찬을 하면, 금방 흥행 가도를 타버렸고, 이름난 거장의 공연도 그의 눈에 점수가 낮게 나와서 혹평을 하면, 실제로도 평가가 좋지 않게 나왔다.

         

       그가 특별히 평론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점수에 맞춰 대충 온갖 비유를 들어가며 맹비난을 날리거나 엄청난 걸작인 양 호들갑을 떠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딱 세간의 평가와 들어맞은 덕에 그는 <빵과 서커스> 잡지의 스타 평론가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특권을 누렸다.

       이번 격리 기간만 해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는 관장에게 압력을 가해 혼자만 자유롭게 밖을 드나들며 다른 공연을 보러 다녔었다. 그의 숙소만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랑프리의 시험관도 잘만 해낸다면, 더 큰 명성을 누리겠지.’

         

       그는 자신의 앞에 펼쳐질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웃음을 흘렸다.

       그때, 어두운 골목 구석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뮬 선생.”

       “응? 누구요?”

         

       뮬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골목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정장을 입고, 검은 망토를 두른 땅딸막한 노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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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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