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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9

       서커스 학교 아이들이 머무르는 숙소는 원래 창고로 사용하던 곳인지라 창문이 없었다. 대신 지붕 바로 아래에는 통풍구가 뚫려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바깥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막 잠에서 깬 엘라가 지금이 점심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해먹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으으읏, 차!”

       “엘라, 잘 잤니?”

         

       안나는 창고 구석의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그녀가 깨는 것을 보고는 다가왔다.

         

       “우움……뭐야, 어떻게 된 거지? 들어와서 누운 기억이 없는데…….”

         

       엘라는 입을 쩝쩝 다시며 눈가를 비벼댔다.

         

       “기억 안 나니? 숙소 앞까지 와서는 갑자기 선 채로 쓰러졌잖아.”

       “응? 아, 맞아. 그랬던 것 같네…….”

         

       그녀는 하품을 크게 하고는 해먹에서 내려와 창고 안을 둘러봤다.

         

       “다른 애들은 아무도 없잖아. 모두 공연 보러 나간 거야?”

       “응. 다들 축제 마지막 날을 즐기러 갔어.”

         

       그녀의 말에 엘라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 날이라고? 자, 잠시만! 내가 돌아올 때만 해도 11일째였잖아?”

       “맞아. 너 이틀 넘게 내리 잔 거야.”

         

       그녀의 말에 엘라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해먹에 몸을 던졌다.

         

       “이틀이나? 망했네. ‘빌리 앤 베티’를 못 봤잖아.”

         

       빌리 앤 베티는 전원이 조련사로 이루어진 서커스단으로 길들이기를 꿈꾸는 엘라가 이번 축제에서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엘라는 축제 한 달 전부터 빌리 앤 베티에 대해 노래를 불러왔었다. 그것을 아는 안나로서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사과하기도 전에 엘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녀의 웃음은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 짧은 시간에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하고 털어버린 것이다.

       안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예전부터 엘라의 이런 활달함과 시원스러움을 좋아했다.

         

       “다행이네. 그럼 대신 오늘 우리 쇼핑이나 하러 갈까?”

       “쇼핑? 뭐 사게?”

         

       안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얘가. 네가 약속해 놓고 기억 못 하니? 원더스타인 단장님께 드릴 입단 선물을 사기로 했잖아.”

         

       원더스타인의 이름이 나오자 엘라는 환하게 웃으며 벌떡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그랬지! 좋아, 어서 나가자! 잠깐, 그런데 이제 괜찮은 가 보네?”

       “뭐가?”

       “흐음, 안나는 내가 단장님 얘기만 꺼내면 눈빛이 험악해졌잖아.”

         

       그렇게 티를 냈나?

       안나는 당황함을 숨기며 침착하게 말했다.

         

       “다 너를 걱정해서 그랬던 거야. 하지만 이제 널 믿기로 했어.”

       “단장님을 믿는 게 아니라?”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을 어떻게 믿어?”

       “칫, 사람을 보는 내 눈을 믿어야지.”

         

       안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동물을 보는 눈은 믿지만, 사람은 글쎄?”

       “우웃, 무시하지 말라고.”

         

       안나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라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찰리와 자신의 마음을 몇 년이나 눈치 못 채는 그녀가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안나는 그녀를 앞에 앉혀 두고 머리를 빗겨주었다.

         

       “난 네가 머리 해줄 때가 제일 좋더라.”

       “사부님도 해주잖아.”

       “할아버지는 말갈기 빗듯이 빗는단 말이야. 자꾸 머리에서 뭘 긁어내려 해. 아파 죽겠어.”

         

       그녀의 칭얼거림에 안나는 풋 하고 웃었다.

         

       “옛날 사람들은 이나 벼룩에 많이 시달려서 그런 식으로 빗었대. 네가 구돌이를 처음 기를 때는 몸에 벌레를 잔뜩 붙이고 다녔잖아. 그때는 나도 그렇게 빗었어.”

       “그게 언제 이야기야. 나는 구돌이를 길들인 지 며칠 만에 목욕을 학습시켰다고. 어쨌든 난 적당히 긁어주는 게 기분 좋아.”

       “특히 여기 말이지?”

         

       안나는 그녀의 뻗친 뒷머리가 쫑긋거리는 부분을 긁으며 말했다. 그러자 엘라는 “흐앗!”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풋. 앞으로 학교를 떠나서 어떻게 살래? 네가 그랬잖아. 혼자 긁으면 이 느낌이 안 난다고.”

       “후, 그러게나 말이야. 안나 네가 매일 내 머리를 빗겨주면 좋을 텐데.”

         

       엘라가 무심코 던진 말에 안나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순간 매일 아침 그녀 옆에서 깨는 자신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으, 음……그, 그건…….”

       “알아, 알아. 너는 평가원이 되기로 했잖아. 나랑 함께 갈 수 없지.”

       “으, 응. 마, 맞아…….”

       “그럼 원더스타인 단장님께 빗겨 달라고 할까?”

       “그건 아니야!”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엘라는 또 외간 남자와 있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을 그녀가 설파하려 들까 봐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참, 평가원 보고서는 제출했어?”

       “그건 이미 그저께 낮에 보냈어. 너 생각보다 잘 썼더라. 어쩌면 면접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면 진짜 좋겠다. 고생한 보람이 있게.”

         

       복장을 갖춘 두 사람은 숙소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축제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어느 때보다 북적거렸다. 우선 상점가를 들린 그들은 원더스타인에게 줄 선물부터 샀다.

         

       엘라는 고급 가죽으로 마감된 조련사들이 쓰는 채찍을 들어 보였지만, 안나는 그것을 가차 없이 후보에서 떨어트렸다.

         

       “그분은 길들이는 동물도 없다며? 채찍을 선물해서 뭐 하게?”

       “그럼 동물을 사드리는 건 어떨까? 처음 키우는 사람에게도 무난한 강아지를 한 마리를 선물하는 거야.”

         

       엘라가 시장 앞에 늘여놓은 우리 앞에 다가가자, 안에 있던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그분이 키울 생각은 있으시대? 괜히 짐만 될 수 있어.”

       “그럼 이건 어때? 조련사들이 쓰는 호루라기. 무려 음색을 5가지로 조정하는 장치가 달린 물건이야. 이건 꼭 동물이 없어도 쓸 수 있잖아.”

       “그것도 네가 사고 싶은 거잖아! 이럴 때는 무난하게 옷핀이나 넥타이 같은 걸 선물하는 거야.”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 상점가의 어느 옷가게에서 넥타이를 하나 살 수 있었다. 가게 주인으로부터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을 받아든 엘라는 안나가 아직 가게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 뭐 살 거 있어?”

         

       안나는 잠시 엘라를 빤히 바라봤다가 입을 열었다.

         

       “엘라, 나도 네게 선물해도 될까?”

       “응? 왜?”

       “지난 10일 동안 나를 위해 애써주었잖아. 뭐라도 줘야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안 그래도 며칠 뒤면 네 생일이기도 하고.”

       “오, 그럼 나야 좋지! 뭔데? 뭘 사줄 건데?”

         

       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안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채찍이나 호루라기는 아니야.”

       “웃, 치사하게…….”

       “그것들은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어.”

         

       엘라는 안나가 가리키는 선반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화려한 색의 원통형 모자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지금 네가 쓰고 있는 모자는 너무 낡았잖아.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게 됐는데 구질구질한 복장으로 가면 그렇지.”

         

       그렇게 엘라는 새 모자를 선물 받았다. 그녀의 연미복과 잘 어울리는 붉은색 모자였다. 그 귀하다는 은계의 청록색 깃털 장식까지 달려 있어서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췄다.

         

       “구돌아, 새로운 집은 어때?”

       “꾸르륵!”

         

       비둘기의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모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라 역시 모자가 마음에 드는지 근처에 거울이나 유리창을 지날 때면, 몇 번이나 모자를 고치며 그 모습을 감상했다.

         

       “고마워, 안나. 정말 너무 멋진 선물이야.”

       “천만에. 어차피 내가 공연을 보기 위해 모아온 저금이 남았었잖아. 그걸로 산 건데 뭘.”

       “자, 가자! 저녁은 내가 살게!”

         

       그렇게 쇼핑을 마친 두 사람은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길거리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놀이마당에 가서 거리 곡예와 야바위를 즐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크리스티앙 기념관의 거리 행진 시간이 되었다. 그것은 크리스티앙의 12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로 분장한 배우들이 극장가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축제의 첫날에는 각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연기자들이 역할을 맡았지만,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캐릭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기자들이 분장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엘라와 안나는 수염이 듬성듬성 난 아저씨가 <과자 굽는 왕녀님>의 공주님 복장으로 나타났을 때는 웃음을 터트렸고, 귀여운 망아지가 <멀어버린>의 마귀 복장을 하고 껑충껑충 뛰어다닐 때는 귀엽다고 소리쳤으며, 아름다운 여인이 <물들임>의 황금 기사 복장을 하고 나왔을 때는 넋을 놓고 바라봤다. 연기자들은 중간중간 멈춰가며 해당 극본에서 가장 유명한 파트를 노래한 뒤 행진을 이어갔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행진이 끝나고 축제의 마지막 행사인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거리 구석의 어두운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수 놓는 불꽃들을 감상했다. 이윽고 가장 높이 솟아, 가장 멀리까지 퍼지며, 가장 오래 남는 마지막 황금색 불꽃이 터지자 사람들은 사방에서 팔을 번쩍 들며 함성을 내질렀고, 그걸로 축제는 마무리되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안나는 터진 지 1분이 넘었는데도 하늘에 여운을 남기고 있는 황금색 불꽃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엘라 역시 그것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너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음, 나는 우리 서커스단이 잘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너는?”

       “나는 있지……쉿, 비밀로 할게.”

       “앗, 그러기야? 뭔데? 궁금하잖아.”

       “말 안 해줄래.”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옆에서 쫑알대는 엘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언젠가 엘라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숙소로 돌아온 그들은 다음 날 새벽 짐을 꾸려 도시를 떠났다. 역참에서 빌린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그들은 사막 횡단로를 따라 역 두어 개를 더 거쳐서 사흘 만에 알라모로 돌아왔다.

         

       이 시대의 역은 우편물을 보관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알라모의 우편물은 마을의 상인 몇이 사서함을 계약해서 도맡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을로 돌아가는 김에 윌리가 역에서 직접 우편물을 받아 갔다.

         

       “찰리가 엘라 네 생일 선물을 보내왔구나.”

         

       커다란 꾸러미 속에 든 것은 찰리가 있는 지방에서 파는 유명한 과자 세트였다. 엘라는 그것을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들과 다 같이 나눠 먹었다.

         

       베로니카는 입에 사탕을 던져 넣으며 혀를 찼다.

         

       “찰리도 참 답답하다. 이런 걸 선물로 보내면 엘라가 이렇게 먹을 줄 몰랐을까?”

       “뭐, 어때. 엄청 맛있네. 엘라를 부추겨서 나중에 또 보내 달라고 하자.”

         

       어거스트가 과자를 입에 털어 넣으며 껄껄 웃었다.

         

       “엘라는 며칠 뒤에 떠날지도 모르는데…….”

         

       비올라가 기뻐하는 내색을 감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사기라니까. 100% 안 오거나 사부님에게 매 맞고 쫓겨난다고 봐, 나는.”

         

       미키가 젤리를 입에 질겅질겅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틀 뒤, 엘라가 찰리에게 과자를 잘 먹었다고 답장을 쓰려고 펜을 들었던 그 날은 그녀의 16번째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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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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