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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9

        

         아까 출입문으로 입장하신 미녀 의료진 듀오를 찍기 위해 일부 카메라가 180도 반전을 하기 했어도, 대부분의 실내 조명은 뉴스 룸의 꽃인 메인 데스크에 그늘 하나 남기지 않고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럴까?

         간헐적으로 쏟아진 탄환이 컴뱃 아머나 지형 지물에 튕겨 나가며 남기는 마찰 불꽃 외에도, 휘둘러지는 날붙이가 그리는 아련한 궤적이 유달리 더 하얗고 살벌하게 남아 망막에 새겨졌으니.

         

         쐐액—!!

         쩌어엉…!

         

         맞부딪힌 두 금속이 미친듯이 떨리는 소음, 잔향이 피부에 우수수 소름을 돋게 만들었으나.

         

         설사 이 음원이 재생되지 않았다 해도 듣기 좋은 소리가 났을지는 굉장히 의문이었다. 보나마나 그 자리에 대체재로 들어갔을 사운드 이펙트는 칼날이 살덩이를 헤집어 놓느라 바쁜 절삭음일 게 뻔했으니까.

         

         “이 개씨, 팔!! 왜 에나마 추적자 같은 게 여기서……!!”

         

         잘려 나간 귀나 구멍 난 신체를 부여잡는 대신 근접전으로 이행하고자 허리춤에서 뽑아 든 나이프, 거기에 소리지르느라 핏대가 서서 울룩불룩 터질 것처럼 부풀은 혈관 구조가 한층 더 도드라진다.

         

         증혈제, 마취제, 호르몬 급속 분비제 등등 온갖 종류의 전투 증강제가 응급 상황을 감지한 신체 모니터 임플란트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투여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생을 이어 나가고 있는 아르카디아 팔라딘.

         

         그가 숨 넘어가는 컨디션으로 겨우겨우 짜낸 억울함 가득한 질문이 당장 왜 이딴 곳에 있는지 이유라도 좀 알려주고 이러라는 듯 자신을 덮쳐온 추적자에게 던져졌지만….

         

         “그걸 알아볼 안목은 있으시오? 그럼 잘 아시지 않소이까? 그쪽은 이미 발을 잘못 내디디셨소이다. 집안에서 기어 나온 벌레가 주인의 눈에 띄었는데 살 리가 없지 않소.”

         

         해저드 슈트가 작살난 탓에 맨 얼굴이 드러난 자신과는 달리, 상대는 여전히 검고 윤기나는 헬멧 안에 표정을 감추고 있어서 확신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말투는 누가 듣더라도 비웃음과 조소가 한가득.

         

         아나스타샤 앞에서 그런 성향을 내보인 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학적인 태도로 남자를 한껏 몰아붙이느라 바쁜 것처럼 보인 마사나리는… 실은 최대한 계산적으로 이 지지부진한 전투 구도를 해석하여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있었다.

         

         ‘고의적으로 출혈량과 혈류를 위험한 수준까지 급등시켰음에도 쇼크 징후 미미, 이건 이미 정상적인 인간이라기 보단 임플란트 보관함 같아서 재밌을 지경이구려.’

         

         빠각!

         바퀴벌레처럼 질긴 생명력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그녀는 옆쪽으로 돌리려는 라이플 총구를 후려갈겨 쳐내고 날아드는 발차기를 무릎을 세워 깔쌈하게 가드하는 걸로 한 번 점한 우위에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절망적인 실력차를 내보이는 걸로 마음을 꺾어 놓으려 일부러 더 신경 쓴 대응을 보여줬어도 이미 핏발 선 눈에 뭐가 보이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운 팔라딘은 쓸데없는 저항을 계속했으며.

         

         …아까 일일이 관절을 끊어 놓은 건 물론이고, 자꾸 허튼 짓 하지 못하도록 총 자체를 비틀어 돌려 거기 끼워져 있던 손가락을 대부분 부러트려 놨는데도 저러는 꼴을 본 마사나리는 내심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권총 발수를 좀 아껴 놓았다가 급소에 쏠 걸 하고.

         

         왜냐하면 재장전은 물론이고 물러나서 정비할 시간 자체가 일절 없었으니까.

         

         제로 거리에서 벌어지는 박투와 나이프 파이팅에도 나름 미학은 존재했으나 이건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이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외야에서 가끔씩 들어오는 방해, 추잡하기 그지없는 저항, 그리고 가능하면 허튼 생각 못하게 붙들어 놓으라는 아나스타샤의 부탁까지 고려하면. 사실 진흙탕 싸움이 안 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 아닌지.

         

         “꺄악?! 언니이이……!”

         “아니, 얘는 이럴 거면 그냥 그 아가씨 옆에 붙어있지 그랬니! 내가 알아서 나가게!!”

         

         탕!! 쨍그랑!

         

         분명 담당 아나운서님을 모시고 대피하라는 임무를 받고 데스크에 냅다 올라왔지만,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살인 난투 현장에 다리가 풀려버린 베서니를 입으론 타박하면서도. 소중히 그녀를 끌어안은 에린이 박살나는 데스크를 피해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료들의 머리가 깨지는 -혹은 비산하는- 상황에도 수십 명분의 전투력을 가진 자기네들 팔라딘을 살려야 어떻게 비벼볼 여지가 있음을 눈치챈 아르카디아 생존 잔당의 사격을 피해서.

         

         반면 반억지, 목숨이 경각에 달해 펌프 업 된 팔라딘의 근력과 체중에 질질 끌려가는 형태로 몸이 뒤집힌 마사나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쳐낼 수 있는 공격은 모두 튕겨냈다.

         

         “시건방진…!!”

         

         물론 생존 앞에서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건 어쩔 수 없으나, 과연 그래도 자신의 기습을 피하는데 성공한 상대가 명예의 ‘ㅁ’ 자도 없는 처신을 하는 모습에 그녀의 입에서 자동으로 혀 차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인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아까부터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려 해도 발악하듯이 자꾸 저 여자들 쪽으로 자신을 끌고 넘어지는 어쭙잖은 행태.

         

         정확히 마사나리 본인이야 ‘부수적 피해’에 대해 너무 깊게 고민하는 타입이 아니고, 오직 모시는 귀인의 의사와 관심사를 존중해 배려하는 것에 가까웠으나.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다 죽어가는 시체에 묶여 있느니 차라리 한 번 배려를 포기하고 확실하게 목을 따버리는 편이….

         

         “……! 애미 씨발!!”

         

         감도는 스산함에. 이 망할 추적자를 어떻게든 죽이는 것 외에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걸 깨닫고.

         

         너덜너덜한 팔에 얽힌 라이플 대신 그나마 멀쩡한 쪽으로 쥔 나이프로 그는 바닥에 넘어트린 마사나리를 내려찍으려 했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개조 인간인 그녀가 힘싸움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고, 얽힌 채로 구르듯이 넘어지며 일시적으로 마운트 자세로 이행한 상태에서 그런 뻔한 일격을 막지 못할 가능성? 글쎄… 낮아도 너무 낮지 않을런지.

         

         까드득!!

         

         아니나다를까, 당당하게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팔라딘 남자의 컴뱃 나이프와 마사나리의 일본식 단도의 날이 두 사람의 얼굴을 사이에 두고 거세게 맞물리며 얽혀 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격을 통하게 하겠다는 것처럼.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시뻘개진 얼굴과 땀범벅인 온 상반신을 밀어붙여 부들거리는 테러리스트 수괴.

         

         그와는 대조되게 지극히 평온함을 유지한 채로, 이마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저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과 땀방울이 불쾌하다는 걸 티라도 내듯 좌우로 목을 한 번 스트레칭한 마사나리가 나지막이 타일렀다.

         

         “흐음,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당신이 중간에 저 애꿎은 직원들에게 발포하려고 기를 써서 신경을 분산시킨 게 아니었으면 진작 제 손에 목이 날아가셨소이다. 그만 포기하시는 게 좋지 않겠소?”

         

         …와중에 진짜 농담으로라도 살려준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 걸 본 남자는 극대노 했고.

         

         “닥쳐라 이 기업의 개 녀석!! 에나마라고 무사할 줄 아느냐?! 저 엑사테크와 엘리시움이 괴물들에게 잡아 먹히고 나면 이 사회 전체가 무너진단 뜻이다!!”

         

         “허면 기업도 못 막는 참사를 그대들은 어찌 막을 수 있다는 말이오? 운석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계속 지어내는 건 탁월한 능력이나, 정작 현실은 볼 정신머리는 부족한 것이오?”

         

         “두고 봐라 이 씹새끼…! 교주님의 예지는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 분은 정답을 알고 계셔!! 그분의 미래시를 따르는 우리가 실패할 일 따위는 없다!”

         

         결국 입담으로도, 육탄전으로도 자력으로 에나마 특수 요원을 이기는 건 포기.

         

         자신들 행동의 당위성과 존엄성을 지킨 채로 죽을 수 있다면 숭고하기라도 하련만, 이 기업 광신도 새끼는 정말 말 한마디를 안 지고 신경을 긁어 댄다며 남자는 거칠게 숨을 씩씩거렸다.

         

         실상은 이들이 에다마츠 이사와 아나스타샤의 방문을 미리 알고 온 건지, 단서라도 잡아 보고서에 적기 위해 마사나리가 고의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과정이었지만 말이다.

         …아나스타샤가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보고서가 끊임없이 작성되는 걸 굉장히 불편해했기에, 취조도 가능한 이런 식으로 몰래몰래 하는 것에 슬슬 익숙해져야 했다.

         

         허나 덕분에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게 된 팔라딘은 하다못해 전신의 임플란트라도 제대로 작동했으면 당당히 승부해볼 수 있었겠는데, 중추 신경계는 멀쩡할지 몰라도 기습당해서 찢겨 나간 근육과 내장을 단시간내로 자가 치유하는 물건이 없어 그저 억울할 따름.

         

         죽어가는 목숨을 질기게 붙여 놓을 정도로 구비한 시점에서 그의 준비가 부족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뭐 어쩌겠나? 재수가 없었다고 얘기할 수밖에.

         

         하지만 그는 괜찮았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 정말로.

         

         왜냐? 추적자의 그 재빠르던 몸놀림도, 탁월한 반사신경도 의미 없게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틀어막았으니. 형제들이 녀석이 방심한 틈을 타서 제대로 몇 방 갈겨 주기만 하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

         …뭐야, 왜 아무도 안 쏴?

         

         

         

         ★ ☆ ★ ☆ ★

         

         

         

         간만에 사격장 점수 표적이 아니라 사람에 대고 총질을 하려니 기분이 영 싱숭생숭하다.

         

         생각보다 반동으로 어깨가 뻐근하고 저릿저릿한 페널티가 있는 게 조준하는데 거슬려서 그런가?

         

         아니, 사실 그보다는 내가 깨작깨작 한 명을 몰아넣으면 옆에 있는 누가 시원하게 머리를 날려버리면서 처리하는 게 유달리 비교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내 피스메이커도 자체 중량만 경량화 된 모델이지, 권총치고는 대구경 탄약을 써서 한 발 쏠 때마다 총구가 위로 치솟는 녀석인데.

         바로 곁에 있는 애가 대포를 뻥뻥 쏘고 있으니까, 내가 그걸 기대하고 쥐어 준 입장이기는 해도 뭔가 시무룩해지는 건 사람이 어쩔 수가 없네. 하.

         

         “…그렇게 막타만 쏙쏙 빼먹어 놓고 나중에 나한테 점수 내기 같은 엄한 얘기를 꺼내는 건 아니지?”

         

         – !? 설마요. 저는 아샤님께 무례하게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혹시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한 명씩 세면서 처리하겠습니다만. –

         

         “지랄!”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더할 나위없이 편했다.

         

         전투 중에 이렇게 여유롭게 잡담할 여유가 생긴 게 얼마만인지… 후위를 나 홀로 담당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중압감이 사라진 것도 큰데, 그냥 인원수는 깡패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배웠다.

         

         나 혼자였으면 진입은커녕 밖에서 조명 떨어트리는 걸로 전멸시킬 수 있나 고민했어야 정상이고.

         

         제로만 있었으면 그 무게로 저 위에 올라가서 기습을 실행하는 건 고사하고, 인원을 나눌 생각은 엄두도 못 낸 채 개싸움에 돌입하거나 저들을 방에서 끌어내서 싸울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겠지.

         

         저… 저, 아르카디아 팔라딘 녀석. 쇄골에 칼 박힌 거 보고 금방 잡을 줄 알았는데 추적자 상대로 아직까지 소리 바락바락 지르면서 버티고 있는 것 좀 보세요 아주.

         

         사이보그 용병들 목숨 질긴 건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머지 크루세이더 놈도 일격에 머리가 날아간 게 아니었으면 아마 진통제에 자극제류를 혈관에 들이붓고 우리에게 덤벼들었을 거다. 어으, 끔찍해.

         

         – …지하로 향한 아르카디아 별동대 전투의지 상실. 0호기 금방 복귀하겠습니다. 헌데 말씀하신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 중에 생존자가 나온 건 혹시 문제가 될런지. –

         

         “응? 많이 살아나간 건 상관없는데, 뭐하러 급하게 그래. 위치 추적 가능한 애들 살아서 나가게 몰래 에스코트까지 해. 여기는 이제… 거의 끝났잖아?”

         

         탕!!

         

         “극!? 그르륵….”

         

         직원분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뒤이기에 남은 움직이는 물체는 다 적.

         

         복부와 흉곽 쪽은 방탄판으로 가렸다는 제로의 분석에 따라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 잘 목 부분을 쏘니, 무슨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적이 쓰러졌다.

         

         휴… 끝났다. 아니, 엄밀히 실내에 있는 적대 세력의 수를 따지자면 실은 덜 끝났지만 어쨌든.

         

         식은땀을 훔치며 여태 수그리고 있던 무릎과 허리를 펴자, 곳곳에 기묘한 장식물들이 추가된 방송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끔 야구방망이처럼 휘두른 탓에 중간 대가 무참히 휜 스탠드 몇 자루, 뿌려진 핏자국이 닦아 내지도 못하게 깊이 스며 들은 게 분명한 음향판, 각종 기기에서 쏟아져 나온 깨진 유리 조각, 여기저기 찌그러진 알루미늄 보관함들.

         

         어째 누군가의 튄 살점 묻은 장비가 제일 재활용 가능해 보이게 상태가 양호한 걸까?

         

         ……요리 보고 조리 봐도, 가장 양심적인 리모델링 업자를 불러도 수리가 끝날 때까지 한동안은 새 뉴스 룸이 필요하겠는데? 아무리 내가 독단으로 나댔어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건데, 이걸 다 나보고 물어내라 하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딴생각은 고이 접어두고 천천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날붙이가 교차한 채로 굳은 팔라딘과 마사나리에게 접근했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휴! 다행이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혹시라도 진짜 초반 챕터에 나오는 보스인 바…뭐시깽이 팔라딘이었으면 지금이라도 살려 보내야 하나 이상한 고민을 할 뻔했는데 이럼 그래도 한시름 덜었다.

         

         그나저나 마사나리 얘는 확실하게 딴짓 못하게 묶어 두는 거에 집중해 달랬다고 이렇게 실감나게 밀리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어? 게다가 뭔 짓을 했길래 정작 올라탄 놈 얼굴엔 눈물이 그렁그렁해? 멘탈이 살짝 깨진 것처럼.

         

         싸우는 도중에도 막 악을 쓰면서 교주의 정보까지 일부 떠들려 하길래, 혹시 복도에 남아있는 직원들이 엿들어서 민간에 관련 정보가 벌써 풀릴라 내가 뒤에서 쏴 버리는 것도 잠깐 고민했다고? 무조건 피할 것 같아서 참았지만.

         

         “…면목없소이다. 약물로 인해 강화된 근육이 근섬유 파열을 무시하고 한계 이상의 힘을 내고 있어 잠시 기세에 밀렸소외다.”

         

         “그으으으래요…?”

         

         뭔가를 슬쩍 숨기는 것 같았지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고 보니 두꺼운 제복과 갑옷으로 체격이 펌핑되어서 그렇지, 안에 들은 사람은 호리호리한 여성 분이셨다. 남자에게 찍어 눌려지면 체중 차로 불리한 부분도 충분히 있을 수도 있겠다.

         

         아, 호리호리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히 덩치 큰 남성을 그렸던 상상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고, 나와는 다른 방면의 에나마의 유전 공학으로 태어나신 분인만큼 키 큰 운동 미녀 스타일이셨다는 점은 확실히 해두겠다.

         

         얼마나 내 의지대로 움직여줄지는 몰라도, 그래도 앞으로 한 배를 타기로 한 사이인데 음해가 있어서는 안 될 노릇이지.

         

         “너, 너 같이 쬐깐한 계집애가. 의사까지 사칭해가며 우리 형제 자매들을 도륙냈다고…?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 씨, 굳이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의도는 뭐야 대체? 그리고 난… 엄밀히 따지면 한 명밖에 안 죽였어!”

         

         한편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나와 눈이 마주친 팔라딘은 노호를 내질렀으나.

         

         마치 죄책감이라도 좀 가지라는 것처럼 역으로 지랄하는 모양새가… 난 그저 우스웠다.

         

         진입하면서 항복 권고도 했죠?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는 지하 팀은 잘 가라고 안내인까지 붙여서 살려 보냈죠? 안에 있던 느그들도 쓰러트린 경비원들에게 제대로 된 구호 조치 안 취했죠?? 뭘 잘 했다고 건수 잡은 것처럼 소리를 질러?

         

         임무 내용을 보면 거의 홍보용 버림 패나 다름없는 녀석들이었던데.

         

         칼을 휘두른 사람 잘못이라지만. 그렇게 따지면 방송국에 폭탄 테러를 저지른 니들은 그냥 돌아가는 톱에 혼자 다이빙한 셈이라니까? 그 유명한 파이브 아이즈도 기업 신경 잘못 긁으면 좆 되니까 평화적 저항 운동을 지향하는 마당에.

         

         “이 씨발년이익—!!”

         

         그러나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 법.

         

         여기서 자아 성찰을 하기보단 말장난에 가까운 내 변명에 분노하기를 택한 남자는 최후의 저항으로 몸을 일으켰고.

         

         서걱! 그 다음 으드득!

         

         신체 움직임을 강제로 제어해주는 부품을 박았어도 피할 공간이 있어야 회피 기동이 가능하다는 듯.

         

         상반신을 내리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마자 번개같이 팔을 휘두른 마사나리에게 턱 밑부분을.

         옆에서 조용히 쳐다보고 있다가 선을 넘자마자 중화기 개머리판으로 후려갈긴 제로 1호에게 뒤통수를 내어주며 허망하게 머리가 뜯겨져 나갔….

         

         야, 야야!! 얘들아! 저기 일반인 두 분이 기겁을 하는데 조금만 얌전한 방식으로 처리할 순 없었니!? 제발!

         

         “…추후부턴 시정하겠소이다.”

         – 이목이 있는 장소에선 더 조용히 처리할 것.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

         

         환경 미화에도 신경 쓰라는 뜻까지는 아니었으나 아까 나처럼 실내 상황이 이건 너무하다 싶었는지, 눈에 거슬리는 걸 정리하겠다며 둘은 각자 사과와 함께 물러났다.

         

         고전하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다리를 한 번 튕기는 걸로 가볍게 일어난 마사나리는 한 손으로 남은 팔라딘 사체를 질질 끌고, 제로는 어느새 거꾸로 꼬나 쥔 중화기 개머리판을 빗자루처럼 써서 큰 잔해들을 구석을 쓸어내며.

         

         …이 나보다도 상식 부족한 녀석들, 어이가 없네 진짜.

         

         아무튼 뉴스 방송이 끊어진 건 모니터링하면서 알았으니, 남은 건 이제 목격자들의 처우뿐.

         

         밖에 있는 일반 직원들은 무조건, 어디 가서 오늘 일을 떠벌리면 법적 조치가 취해질 거라 경고해야 맞겠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평범한 모델이 아니란 건 아까 전해 들었는데. 저기, 진짜 저기 기업 임원이라도 돼? 누구 사생아라던가?”

         

         “아니이… 진짜 여러모로 겁이 없으신 건 알겠는데, 하필 지금 그런 거 물어보기 있기에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은 탓에 안 그래도 꽉 끼던 간호사복 치마가 위험하게 말려 올라간 베서니 언니는 따로 말이 없으셨다. 왜? 걱정했다며 펑펑 울고 있느라 바쁘셨으니까!

         정확히는 이제 좀 숨을 고르며 진정하고 계시는 와중이었다.

         

         대신에 이마 근처에 어설픈 솜씨로 붙인 거즈를 뗄 생각도 못한 채로, 자기 매니저의 등을 두들겨주며 진정시킨 에린 씨가 다가오는 나와 제로를 보고 던진 첫인사가 이거다.

         

         붙들려서 손찌검당하던 것도 그렇고, 데스크 위치상 마사나리의 강하 지점 바로 근처에 있어서 많이 놀랐을 텐데 저런 농담을 던질 기력이 있으신 게 여전히 놀랍다.

         

         강한 사람이 성공하는 건지, 성공한 사람은 강해지는 건지.

         

         게다가 찔러보듯 던진 것도 유전적으로만 따지면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라 왠지 뜨끔해서 삐딱한 태도로 쳐다보다가…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고마워 아가씨. 안티 팬클럽이 압도적으로 큰 건 별 신경 안 쓰고 살았는데… 이렇게 걱정 받아보는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네.”

         

         “제가 딱히 안 왔어도 완전 멀쩡하셨을 것 같긴 한데. 뭐, 빈말이라도 감사 인사는 받아둘게요.”

         

         나야 뭐 많이 구면이기도 하고, 마음에 생긴 빚도 갚을 겸 괜한 오지랖을 부려가며 일을 키웠다는 쑥스러움에.

         거기에 막상 얼굴 마주하니 뭐 ‘당신 시청률 땅기는 모습 때문에 불안해서 일부러 그랬다!’ 같은 티를 내기도 이상하고 민망해서 대충 얼버무렸지만.

         

         에린 씨는 그걸 위해 피바다를 만드는 결단을 내렸으면 응당 그에 준하는 성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위 대기실에서도 말했었지? 죽어라 누군가를 싫어하는 새끼를 바꾸려면 뒤지기 직전에 구해주기라도 해야 한다고. 그럼 원래도 아가씨를 귀엽게 보던 난 어떻겠어? 내 감사를 함부로 빈말 취급하진 않았으면 좋겠네.”

         

         “어……라라? 아니, 죄송합니다…?”

         

         “그래, 사과는 얼마든지 받아줄게!”

         

         아까 전에 이어 왠지 또 지당한 훈수를 당했다. 심지어 그럴싸한 이론이 녹아내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역으로 용서를 구했더니 냅다 수락하셨다.

         

         어딘가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이렇게 풀어버릴 수도 있구나. 이거 또 하나 배웠네.

         

         세간에 말재간 좋기로 소문난 아론한테도 딱히 안 밀린다 생각했는데… 혹시 동업자라 봐준 거였나? 조만간 그가 관심을 가질만한 특급 정보 같은 걸 먹이로 던져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 대신 맛있게 뜯어먹으라는 셈치고.

         

         그 다음은 뭐 특별한 게 없었다.

         

         내민 손을 잡고 에린 씨가 먼저 훌쩍 일어나시고, 아무리 자리에 여자와 기계밖에 없다지만 거의 위아래 속옷이 다 보일 정도로 복장이 흐트러지신 베서니 언니도 둘이 같이 옷매무새를 정리해드리고, 난 그대로 손 흔들며 빠이빠이. 집까지 무사히 퇴근했다는 뜻이지.

         

         

         그래서 외출 한 번 잘못했다가 천년 만에 겨우 기어서 돌아온 김에 곧장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너덜너덜한 제로 1호를 다른 제로들이 달라붙어서 수리하는 것도 침대에 누워 실컷 구경하다가, 혹시 벌써 오늘 난리에 대한 특집 방송이라도 있나 싶어 텔레비전을 켰는데.

         

         놀랍게도 메모리얼 타임즈 뉴스 채널은 화면 조정 중 상태가 아니라, 보란듯이 머리에 거즈와 응고 젤을 바른 에린 스컬리 아나운서를 내세워 생방송 중이셨다.

         

         [ 의도하지 않은 폭력성과 극단 편향된 내용을 송출하게 된 것에 대해 시청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덧붙여 스스로를 아르카디아라 자칭하는 컬트의 위험성과 광기를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리고 특별 편성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여러분들의 안식처, 네오 헤이븐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

         

         별로 멀쩡하지 못한 탄흔 가득한 배경, 급하게 닦았는지 약간 뿌연 자국이 남은 화면.

         얼마나 길게 한 건지는 몰라도 촬영 강행이 이루어진 게 분명한 와중.

         

         거기서 살짝 뒷말을 흐린 에린 씨는 사전에 협의된 게 전혀 없는 상태인지, 줌을 약간만 땡기라는 것처럼 카메라를 향해 손짓하더니.

         

         [ 저와 모두의 안전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도와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 메모리얼 타임즈의 아나운서. 에린 스컬리였습니다. ]

         

         종영 멘트와 함께 눈을 찡긋 감아 보이셨다. 답지 않게 부끄러움이 가득한 윙크.

         

         어느 말괄량이 아가씨의 정확한 이유 모를 ‘반동 때려잡기’ 취미 생활 정도는 비밀로 지켜주겠다는 자그마한 약속의 표현.

         

         그리곤 억지로 쥐어 드렸던 내 개인 연락처로 ‘다음에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하면 혹시 받아 줄래?’ 같은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온 건 애써 무시했다. 방송국에 갔다가 촬영당하는 건 이젠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근데 이거 이거… 안 그런 척하시면서도 은근히 헤이터(Hater; 격렬한 비방자, 안티)가 많은 걸 꽤나 신경 쓰시는 눈치였는데, 방금 그걸로 긍정적인 팬 숫자가 꽤 유의미하게 늘어나지 않았을까?

         

         무작정 독하고 억세기만 한 게 아니라 귀여운 측면도 있다는 걸 아주 확실하게 강조하셨는데 말이지. 상큼한 반전 매력도 있으신 분이었네.

         

         왠지 더 쳐다보고 있기 간질거려져서 다른 채널을 이어 보느니 아예 그냥 모니터를 꺼버리고 제로 0호를 손짓으로 불러 드로이드 정비법이나 공부하기로 했지만.

         

         사이버웨어에 추가로 들어온 메시지가 있길래, 당연히 타이밍 상 에린 씨가 뭐라고 더 써서 보내셨구나 했는데.

         

         [ 아 참! 혹시 지금 어느 층에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광고 찍다 말고 네가 사라졌다고 지금 난리가 났던데. 무슨 이사님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시다고…. ]

         

         “아?”

         

         단번에 뇌정지가 왔다.

         

         잠깐 미친. 촬영 중단한 거 아니었어??

         아니지, 뉴스 채널조차 저 난리가 났어도 금방 재개했으니 별다른 피해가 없던 스튜디오는 업무를 이어서 하는 게 당연한 건가…?

         

         그렇지만 마사나리도 나랑 같이 왔으니까, 쇼우도 그 내가 집에 간 것쯤은 자연스럽게 건너 건너 전해 들은 거 아니야??

         

         ………한바탕 스트레스도 풀었을 테니, 씻고 화장 고치고 다시 돌아오는 줄로만 철썩 같이 믿고 있다는 게 대관절 무슨 미친 소리인데!! 내가 그런 짓을 일부러 하겠냐?! 야!!

         

       

       

       

       

         

         

         그리고 이 날로부터 약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네오 헤이븐의 한 술집에서 최근 주가가 높은 한 백은발의 여용병과.

         말끔하게 다듬어진 콧수염에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오너가 가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광고를 보고 동시에 황당한 목소리를 낸 건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시겠다.

         

         “……저 아가씨가, 대체?”

         “………아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예계 인맥이 수첩에 추가되었다!
    가끔 컨트롤이 불가능한 자율 행동형 요원이 엔트리에 추가되었다!

    이렇게, 거울아 거울아 에피소드가 겨우 끝났습니다.
    제가 아직도 코로나 여파로 기침을 달고 살고 있다면 과연 믿어주실지 모르겠네요. 몸도 뒤지게 안 좋은데 막판에 인터넷도 말썽을 부리니까 아주 머리가 아프고 세상 억까에 눈물이 나서 진심으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앞 부분은 정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다가, 너무 늘어졌나 싶은 마음에 약간 허겁지겁 수제 양말이나 목도리를 완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나마 푸짐한 분량으로 용서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모자란 저는 또 이제 재충전과 어색하게 넘어간 일부 기존 연재분 수정.
    정말 늘어져서 좀 쉬다가 돌아오겠습니다. 휴재일 꼬박꼬박 다 쉰 놈이 이런 말씀드리니 분명 돌 맞겠지만요.

    항상 재밌게 읽어 주시고, 댓글, 추천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큰 힘이 됩니다.
    그리고 유달리 ‘외전의 낌새가 느껴진다….’ 라고 말씀하시며 다크템플러처럼 제 등을 내려칠까 말까 고민하시는 분이 많이 보였는데. 다음 에피소드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예, 이번엔 정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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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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