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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89

       

       ‘쇠사슬을!’ 

       

       힘을 주는 듯 하더니, 자신을 속박하던 쇠사슬을 엿가락마냥 끊어버린 청년.

       

       녹슬고 낡은 쇠사슬이었던가?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다 죽어가던 것처럼 보이던 청년이 돌연 이런 움직임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속박이 풀렸다는 것은 그 즉시 불의의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위험요소였기에, 나는 곧바로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서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도망치게 두면 안 돼! 막아!” 

       “맡기게!”

       

       송병오 녀석이 곧장 달려나가 출구를 등지고 청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나와 홍옥례는 각자 얼음칼과 주먹을 치켜든 채 청년의 양쪽을 막아섰고, 

       

       이유하 역시 한걸음 떨어져 양 손 사이로 빙결의 구체를 만들어내고는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내가 신호하면 언제든 날릴 수 있도록.

       

       ‘좋아. 도망칠 구석은 없어.’

       

       하지만 청년은 가만히 선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상체를 조금씩 흔들거린다. 눈을 뜨고 있지도 않았다. 이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 아니면 깨어있는지나 모를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자리에 웅크리는가 싶더니, 

       

       —팟!

       

       일순, 다리를 펴며 도약했다. 제자리에서 2미터가 넘게 높이 도약한 청년은—

       

       —쾅!

       

       ……그대로 지붕을 뚫고 사라져버렸다. 널빤지인지 합판인지로 된 지붕에 구멍이 뚫려 너덜거리고 그 너머로 휑하니 밤하늘이 보였다. 

       

       “봐, 봤어, 동지들?!” 

       “허어! 무슨 괴력이!”

       

       ‘……뭔데, 이건.’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쇠사슬을 끊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서, 지붕을 뚫고 도망쳤다고? 비각성자 인간의 힘으로?’

       

       물론, 비각성자인 인간도 이따금씩 괴력을 낼 때가 있었다.

       

       이성을 잃거나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평소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몸이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평소의 한계치보다 과한 근력을 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오버클럭이라고 할까. 

       

       아까 좁은 복도에서 마주친 말기 중독자들처럼, 비살상탄을 맞아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달려오거나, 중식도로 나무 기둥을 부숴버리거나. 이게 다 마약 때문에 이성을 잃어 순간적으로 괴력을 낸 것이리라.

       

       ……라고,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아니잖아……!’

       

       아무리 낡은 널빤지 지붕이라지만 제자리에서 2미터 넘게 뛰어오르며 지붕을 부수고 나갔다. 이건 단순히 폭력성이 증가하거나 이성을 잃어서 순간적으로 괴력을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해. 각성자도 아니었어.’

       

       내 마력감지 능력으로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었는데 못 느꼈으면 각성능력은 진짜 없는 거다.

       

       ‘혹시 무공 덕분일까?’ 

       

       이 마굴(魔窟)로 들어온 이후, 동네 주방장이며 약장수며 심지어 소녀까지 무공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 주방장의 아들이자 소녀의 오빠인 이 청년 역시 당연히 무공을 익혔을 터.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무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이자 방법이다. 이렇게 대놓고 인간을 초월한 괴력을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쫓아가자! 잡아야 돼!”

       

       어찌 되었든 저렇게 도망치게 놔 둘 수는 없었다. 

       

       “이유하!”

       “알겠소!”

       

       여기서 다시 길고 긴 복도를 지나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내가 이유하를 부르자, 이유하는 지붕에 뚫린 구멍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얼음으로 사다리를 만들어냈다. 

       

       엉성하지만 타고 올라갈 수는 있는 수준의 얼음 사다리. 그것을 타고 지붕에 올라서니 한밤중이었다. 송병오가 두리번거리며 내뱉었다.

       

       “어디로 간 겐가? 어두워서 뵈는 게 없군!”

       “음력으로 열엿새 날이니, 달은 찼으나……” 

       

       이유하의 말마따나 밤하늘엔 거의 보름달이 떴지만, 흐린 날씨 탓에 구름에 가렸다 보였다 하느라 빛이 제대로 비추질 않았다. 이 중국인 거리에는 그 흔한 가로등도 거의 없었다.  

       

       ‘젠장, 어디로……’ 

       

       지붕에 올라서서 넓게 둘러보니, 실내에서 꽤 많이 이동했던 탓인지 중국인 거리 깊숙한 어딘가었다. 무분별하게 지어진 건물들과 골목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이대로 놓치는 걸까? 마력으로 감지할 수도 없으니, 어딘가로 숨어들어갔다면 찾을 수 없는데……

       

       그때, 거리 한쪽 골목에서 쿠당탕, 하고 뭔가 부딪히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물기가 고인 골목길이라도 밟는 것인지, 요란하게 찰박찰박하는 발걸음 소리. 

       

       “저쪽이야!”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가니 과연 저 앞에 청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청년의 뒤를 쫓아 달렸다. 달리기까지 초인적인 속도인 것은 아니었는지 뒤쫓을만한 속도였다.

       

       그렇게 쫓다보니 어느새 중국인 거리에서 벗어나고, 어둠이 내린 서대문통 대로도 건너, 계속 서쪽으로 향하더니 시가지를 완전히 벗어났다. 송병오가 헐떡거리며 내뱉었다.

       

       “허억, 허억! 젠장맞을 놈이, 어디까지 도망하는 게야!”

       

       이내 언덕길을 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환하게 켜진 가로등이 빛을 밝힌다. 잘 닦인 포장도로가 있고 집집마다 전등불을 밝힌 고급 주택단지들이 줄지어 있는 광경이었다. 

       

       ‘여긴…… 아마 이 근처에 양복자가 살텐데.’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문화주택 단지가 모여있는 동네다. 양복자가 살고있는 금화장 주택단지도 이 부근일텐데. 

       

       내 곁에서 달리던 송병오 녀석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에게 외쳤다. 

       

       “자네, 복자에게 도움을 청하세! 긴따마에 대고 말하면 복자가 듣지 않나!” 

       “지금은 듣고 있지 않을 거야. 이미 한밤중이고.” 

       

       아까 저녁먹기 전에 오늘 작전은 끝이라고 말했으니 긴따마와의 정신공유는 끊은 지 오래일 것이다. 게다가 벌써 한밤중이니 쿨쿨 자고 있겠지.

       

       물론, 저 청년과 우리가 지금 저 주택단지 쪽으로 향한다면 큰 소리라도 외쳐서 양복자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중국인 청년은 주택단지 쪽으로 향하지 않고 어두운 샛길로 빠졌다. 포장되지 않은 샛길이었다.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거지?’

       

       그의 뒤를 쫓으니 어느새 드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맨 땅에 거친 흙바닥이 드러나 있고 도로가 깔릴 자리만 얼핏 닦여 있었는데, 아마 주택단지를 확장하기 위해 야트막한 산을 깎아낸 공터인 모양이었다.  

       

       경성 외곽의 산 중턱을 깎아낸 개발지여서인지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있고, 곳곳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닐 뿐, 드문드문 비추어지는 달빛을 제외하면 가로등 하나 없어 어두운 곳.

       

       계속 달리던 청년은 그 공터의 한가운데에 멈춰섰다.

       

       “헉, 헉…… 드디어 멈춰섰군!”

       

       송병오 녀석이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제기랄, 숨 넘어가겠네그려…… 헌데, 저 놈은 왜 예서 멈춘 게지? 도망하는 것도 자포자기한 겐가?” 

       

       송병오의 말을 들은 나는 중얼거렸다.

       

       “저 놈, 도망친 게 아니야. 우리를 유인한 거야.”

       “무어?”

       

       청년은 무작정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 곳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쫓아올 만한 속도로 도망친 것에는 다분히 그런 의도가 느껴졌다. 

       

       “어쨌든 잡아야 하니 알고도 쫓아오긴 했지만…… 조심해야겠어.”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던 그 때였다. 

       

       『난다, 오마에라와. 나니모노다?』

       (뭐냐, 네 놈들은. 웬 놈이냐?)

       

       청년의 뒤쪽, 저 멀리서 일본인 한 명이 어슬렁거리며 이 쪽을 향해 다가와, 마침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청년 앞에 멈춰섰다. 

       

       『난다, 시나징야로(뭐야, 지나인이잖아)?』

       

       중국인 청년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일본인이 불쑥 내뱉었지만, 중국인 청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선 채 아무 말도 없었다.

       

       【…….】

       『치엣! 이런 곳까지 지나인이 돌아다니다니! 지나인을 보는 것은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중국 요리는 좋아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일본인은 청년을 툭툭 쳐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놈, 꼴을 보니 그냥 지나인도 아니고, 중독자로군! 일체 뭐냐? 너는.』

       【…….】

       

       일본인이 비아냥거려도 중국인 청년은 여전히 두 눈을 꾹 감고 선 채 묵묵부답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오—이! 너희들. 이 지나인, 너희들의 동료냐?』

       

       멀리 서있는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민간인이 휘말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에 일본인에게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오. 그보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세요. 이쪽 일은 신경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뭐야? 너도 행색을 보니 지나인같은데, 국어를 제법 잘하는군? 하지만 말야.』

       

       일본인은 투덜거리며 내뱉었다. 

       

       『이곳에서 벗어나는게 좋을 거라고? 이 내가? 이봐!  나는 이 앞의 주택단지에 살고 있으니까, 종종 쓸쓸함을 즐기러 일부러 이곳으로 밤 산보를 나오지만—』

       

       저 일본인을 어디서 본 것 같았는데, 이제 떠올랐다. 낮에 중식당에서 주방장에게 시비를 걸던 그 일본인이었다. 이 근처의 고급 문화주택 단지에 사는 주민이었던가. 

       

       『그런데, 지나인인 너희야말로 이곳에 무슨 용무냐? 이 주변은 너희같은 지나인이 함부로 어슬렁거릴 곳이 아니야. 사라져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란 말이다.』 

       

       일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청년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이런 아편 중독자 같은 놈이라면 더욱…… 펫!』  

       

       하고 청년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본인.

       

       『좋은가? 어서 사라지는 것이 좋을 거야. 경찰에게 신고되기 전에—』

       

       —푸확! 

       

       그 순간, 일본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한웅큼 토해냈다. 일본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뭐, 라고……』

       

       피범벅이 된 청년의 주먹이, 일본인의 등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짤막한 TMI: 경성 서쪽에 조성되었던 금화장·연희장같은 대규모 문화주택 단지가 위치했던 곳은, 지금으로 치면 아현동·북아현동·천연동 일대랍니당.

    지금은 낙후된 건물이 많은 곳이라지만, 당시에는 이곳의 문화주택지에서 산다고 하면 선망의 대상이었겠죵……

    덧붙여 중국인 밀집지역은 현재의 서소문동 일대였으니, 주인공 일행은 대충 여기서부터 달려왔다고 보시면 되겠네용. 도보로 30-40분 걸리는 거리니까 달리면 한 10분 남짓 걸렸을까용……?

    한편 더 올라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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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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