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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카자르를 안고 창틀에 발을 올린 그 순간. 프란체가 멈춰 세웠다.

         

       “잠깐 기다리렴.”

       “무슨 일 있습니까?”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단다.”

         

       프란체는 침실 옆에 서랍을 뒤지더니 거기서 새하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우선 이걸로 레이디 유플레인의 거처를 마련하렴. 사업 얘기는 그 이후란다.”

         

       카자르가 내게 안긴 채 저기, 하면서 어색하게 손들었다.

         

       “뭐니?”

       “그냥 카자르라고 부르셔도 돼요.”

       “그래.”

         

       프란체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내게 다가와 말을 이었다.

         

       “사업에 관한 내용도 제출해야 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제출해야 해. 의복 사업인 만큼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을 거야. 내 말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카자르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오렴.”

       “예.”

         

       그렇게 다시 창틀에 발을 올리고 카자르를 밖으로 데려가려던 순간, 프란체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둘이 너무 친해지진 말렴.”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뿐. 프란체는 침대에 앉아 아까 뒤적거렸던 서랍을 정리했다.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단 말이지.’

         

       뭐, 별거 아니겠지. 나는 카자르를 안은 채 창틀을 밟고 날아올랐다.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에 신이라도 난 것일까. 카자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털썩! 짧았던 비행이 끝나고, 공작저의 철창을 넘어 무사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카자르가 말했다.

         

       “거주할 곳은 제가 골라도 돼요?”

       “마음대로 해.”

       “그, 제 연구에 필요한 물품들도 사도 돼요?”

       “그것도 마음대로 해.”

         

       카자르가 오, 하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공작가의 재력은 굉장하군요.”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공작령을 거닐었다. 중간에 잡화점에 들러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고, 연금술사를 찾아가 마법 도구를 구매하기도 했다.

         

       “이제 남은 건 살 곳이네요.”

       “가격은 싸면서 최대한 공작저와 가까운 곳으로 골라.”

       “으음, 어차피 임대할 건데 가격은 상관없지 않을까요?”

       “적당히 혼자 살 곳 골라. 쓸데없이 큰집 고르지 말고.”

         

       카자르가 에에, 하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공작령에 오면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백작령에서 네가 살던 곳보다 훨씬 좋을 테니 그건 걱정 마.”

       “그건 맞지만요.”

         

       그녀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공작령의 어딜 가도 제가 살던 곳보단 무조건 좋을 거예요. 세이렐 백작령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맞는 말이다. 거기는 도저히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카자르의 시선이 어떤 집에 꽂혔다.

         

       “오, 여기 이 집 괜찮은데요?”

         

       2층으로 이루어진 단독 주택. 너무 크지도 않고 공작저와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비워진 집. 나쁘지 않다. 문제는 가격이지만.

         

       “땅 주인부터 찾으러 가자.”

         

       나와 카자르는 공작령의 토지 관리소로 향했다. 공무원이 전서구를 날려 땅 주인을 찾는 데 도와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집을 임대하고 싶으시다고?”

       “그래.”

       “싸게 드리겠소.”

         

       뭐지. 그 정도면 괜찮은 위치에 좋은 집인데 가격부터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싸게 준다고? 그럼 뭔가 하자가 있다는 건데.

         

       “얼마에 주려고?”

       “무기한 임대에 25만이오.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고, 평생 살 수도 있소.”

         

       무기한 임대에 25만이라. 자세한 시세는 모르지만, 공작령의 땅 치곤 굉장히 저렴한 건 확실하다.

         

       “생각보다 너무 저렴한데. 사정이라도 있나?”

       “그것이…….”

         

       땅 주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거기 살고 있던 사람이 자살해서 망령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있소. 덕분에 아무도 거기서 살려고 하지도 않고, 집도 나가지 않지.”

         

       망령? 게임에서도 그런 마물은 나오지 않았던 거 같은데. 카자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망령이라, 확실히 쉽지 않은 문제긴 하네요.”

       “망령이라는 게 있어?”

       “당연하죠. 물리적인 공격이 안 통해서 골칫덩이로 불리는 애들이라고요.”

       “…….”

         

       하긴, 마물도 존재하는 세계인데 망령이라고 없을 이유가 없지. 그저 게임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

         

       “그래서, 망령을 처리할 수 있나?”

       “저라면 가능하죠.”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집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그게 정말이오? 망령을 퇴치해줄 수 있다고?”

       “그렇다는데.”

         

       카자르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제가 많이 유능한 마법사거든요. 망령 정도야 가볍게 퇴치하죠. 그래서 그런데, 가격을 좀 깎아주실 수 있으신가?”

         

       집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 집은 지금까지 골칫덩이였는데, 그 정도야 쉽게 해줄 수 있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기한 조건은 빠지게 되는데… 괜찮겠소?”

         

       무기한 조건이 빠지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사업이 성공하면 프란체 코퍼레이션을 본격적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카자르의 집도 거기에 만들어주면 되겠지.

         

       “상관없어. 대신 계약 기간은 여기서 제시하지. 괜찮겠나?”

       “너무 오랜 기간이 아니라면…….”

       “기간은 1년. 돈은 망령 퇴치로 대신하겠다.”

         

       집주인은 그것도 괜찮다는 듯 화색을 보였다.

         

       “괜찮소! 그 망령만 퇴치해준다면야.”

       “좋아.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지.”

         

       나는 집주인과 계약을 체결했다. 돈은 프란체가 준 수표에서 꺼내 썼기에 문제없었다.

         

       “이걸로 계약 체결이오.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살아도 상관없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망령을 퇴치해야 해서.”

         

       집주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정말 간절했나 보다.

         

       “가자, 카자르.”

         

         

       * * *

         

         

       우리는 망령이 살고 있다는 집으로 들어왔다. 먼지가 쌓이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껏 뽐내는 내부였다.

         

       “그래도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요?”

         

       그 대사는 예로부터 금기어였는데. 그 말을 하면 무조건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나온다고.

         

       그때였다.

         

       쿵! 쿵! 쿵! 별안간 바닥이 울리며 진동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땅은 흔들리고 있지 않다. 그냥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뿐이었다.

         

       “망령이 환각계의 능력을 가지고 있나 보네요.”

       “처리할 수 있겠어?”

       “물론이죠.”

         

       카자르는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마력을 활성화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알 수 있었다. 오러는 마력과 한 끗 차이니까.

         

       “망령은 2층에 있네요.”

         

       성큼성큼. 카자르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왔다.

         

       “저기 있네요.”

         

       이 세계의 망령은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새하얀 옷에 피를 흘리고 있는 인간의 형상을 생각했는데, 그냥 온몸의 피부가 녹아내린 시체였다. 굳이 말하자면 구울에 가깝다고 할까.

         

       “저게 물리적인 공격이 안 통한다고?”

       “네. 저렇게 보여도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많이 징그럽게 생기긴 했다.

         

       “빨리 처리해. 보고 있기가 좀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화아악…! 카자르의 손끝에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녀가 조용히 읊조리니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이건…….’

         

       소미레가 사용하던 신성 속성의 마법이다. 내가 알기론 카자르는 보조 마법만 가능하지, 속성 마법은 사용할 수 없는 거로 아는데?

         

       빛은 집안 곳곳으로 퍼져나가 어둠을 메웠다.

         

       ―키에에에엑!

         

       망령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는다. 신성 속성의 마법이 제대로 통했나 보다. 그리고 잠시 후. 망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별거 아니었네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뭔가요?”

         

       카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성별 전환 마법을 사용하면 다른 마법이 제한되나?”

       “으음, 그렇네요. 신체와 성별이 변화함에 따라 마력 흐름도 달라져서… 아마 속성 마법은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네가 보조 마법만 사용했구나. 성별 전환 안 했으면 게임에서 훨씬 더 좋은 캐릭터였을 텐데.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렇군.”

       “근데 그건 왜요?”

       “아니,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그래요? 호기심이 많을 수도 있죠.”

         

       카자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갈 집을 구경하는 듯했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게 기분이 좋나 보다.

         

       “아무튼. 너는 여기서 살면 돼. 생활비는 한 달에 한 번씩 지급할 거야.”

       “생활비면 얼마 정도예요?”

       “4인 가족 기준으로 3개월 치 생활비.”

         

       오. 카자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정도나 주신다고요? 다 쓰지도 못할 거 같네.”

       “그럼 줄일까?”

       “아뇨!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옷도 사고 그러죠, 뭐.”

         

       음. 이제 집도 구했고, 살 것도 다 사고 할 건 다 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해도 되겠지.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카자르. 이제 네가 해줘야 할 일들을 설명해줄 거야.”

       “네. 뭔데요?”

       “공녀님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건 알고 있으니 넘어가고, 앞으로 우리가 하는 일에 동참할 것.”

         

       카자르가 갸웃거렸다.

         

       “동참이요? 설마 암살 같은 건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나 혼자 할 거야.”

       “안 한다는 말은 안 하시는군요…….”

         

       그럼 죽여야 할 놈이 있으면 죽여야지 않겠어? 물론, 프란체의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크흠, 아무튼.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은 간단해. 마법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부를 거야. 그때 오기만 하면 돼. 물론, 이상한 일은 안 시킬 거야. 사람을 죽인다거나, 그런 일.”

         

       휴우, 카자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좋아요. 백작령의 일도 해결해주셨고, 이렇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주셨으니 그 정도야 일도 아니죠.”

         

       이걸로 카자르 유플레인은 완벽하게 우리 팀이 되었군. 남은 건 셀다스와 그 녀석이다.

         

       “그럼 다음에는 공녀님과 함께 오도록 하지. 새로운 집에 적응 잘 하고 있어.”

         

       그렇게 나는 카자르의 집을 나왔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달이 떠오른 늦은 밤. 창살을 넘어 열린 창문으로 몰래 들어갔다.

         

       프란체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왔니?”

       “다 해결하고 왔습니다.”

       “그러니.”

         

       드르륵. 프란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는 건 내일 하자. 자세한 얘기도 내일 하고. 괜찮겠지?”

       “예. 언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렴.”

         

       내가 등을 돌린 그때. 프란체가 아, 하며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 여자랑 별일 없었니?”

       “무슨 일이요?”

       “아니란다. 돌아가 보렴.”

         

       뭐야? 아까 너무 친해지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노예한테 질투라도 하는 건가. 그럴 필요가 있나? 어차피 나는 프란체의 소유인데.

         

       “그럼 이만.”

         

       나는 인사를 마친 뒤 내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도 놓인 찐 감자 두 개와 우유 한 병.

         

       “후.”

         

       고기를 먹을 날도, 이 창고에서 나갈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프란체의 사업이 잘 풀리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 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거니까.

         

       그때가 되면, 우리는 제국 제일가는 권력가가 될 수 있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나를 위해서, 프란체를 위해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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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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