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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예사라에게는 ‘운동복’이라고 불릴만한 옷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학교 운동복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장이라던가, 딱히 입을 일도 없어 보이는 우아한 드레스 같은 것도 있었지만, 열심히 몸을 움직일 때 입을만한 옷은 학교 운동복뿐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정말 운동하기 위해 샀다기보다는 학교 준비물에 포함되어있으니 샀다는 것이 옳겠지만.

        

       저택에 있는 것은 예비용이고, 학교에서 입는 옷은 학교에 있다. 돈 많은 학교답게, 무려 세탁은 세탁 전문 업체가 수거해가서 세탁 후 그 체육복 주인의 로커에 넣어준다. 개인 사물함이 아닌, 탈의실에 있는 체육복용 로커였기에 사생활 침해에 대한 문제는 없다.

        

       운동복은, ‘운동복’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운동복이다. 짙은 초록색의 후드집업과, ‘츄리닝’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다리의 옆 선에 하얀 선이 그려진 운동복 바지. 그나마 아주 펑퍼짐하지는 않고 다리에 적당히 붙는 크기라 대놓고 촌스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촌스럽지 않다는 말은 또 아니지만.

        

       이 운동복을 보고 바로 화영 고등학교의 운동복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동네 대학생이 집 앞에 잠깐 나올 때, 옷 갈아입기 귀찮으면 그냥 입고 나올 법한 비주얼이다. 만약 예사라의 몸이 아니라 원래의 내가 입고 있으면 밤새워서 게임하다가 잠깐 담배 사러 나온 백수가 떠오를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나마 예사라의 얼굴이 굉장히 반반했기에 그런 이미지가 다소 불식될 뿐이지, 솔직히 아무 때나 당당하게 입고 돌아다닐 만한 옷은 아니었다.

        

       “……나중에 운동복을 하나 사긴 해야겠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보고, 유하늘은 바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운동복을 산다고 해서 자진해서 입을 일은 몇 번 없겠지만 어차피 돈도 많으니 몇 벌 사 두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게다가, 어째 예사라의 옷은 중요한 자리에서 입을만한 비싼 옷과 잘 때 입는 파자마 정도를 빼면 ‘평상복’이라고 할만한 옷이 거의 없었다. 아까 내가 유하늘을 보러 나올 때 입고 있던 얇은 실내 복 정도가 전부였다. 바깥에 나갈 일이 없어서 옷도 사지 않은 걸까?

        

       ……그런데, 그러면 드레스나 정장 같은 옷은 왜 있는 걸까. 예사라는 그런 행사에도 나갈 일이 없을 텐데.

        

       “자, 그럼, 가자!”

        

       내가 멍하니 서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 ‘뭔가’가 아니라 유하늘이었다.

        

       유하늘은 어느새 내 왼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대문 앞에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긴 내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팔에 무시하기 힘든 무언가가 부드럽게 와 닿았다. 그러고 보니 유하늘은 몸매가 결코 나쁘지 않은 캐릭터였다. 당연히 이런 자세에서는 내 팔에 유하늘의 가슴이 닿을 수밖에 없다.

        

       비록 중간에 천을 몇 겹이나 두고 있었지만, 몸매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 흐, 잠깐……”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지만, 유하늘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내 팔을 당겼다.

        

       상체가 앞으로 기울면서, 대문이 지나는 선을 지나 앞으로 나갔다.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 다리가 움직이고—

        

       마침내, 나는 그대로 대문 밖으로 나와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경호원이 이쪽을 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직 결코 덥다고 할 수는 없는 3월이었는데도. 아마 이런 사태 자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를 여기까지 배웅한 양혜인은 다소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내 쪽으로 몇 걸음 정도 걸어오면서 말했다.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유하늘이 눈치 좋게도 팔짱을 풀고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이걸 가지고 가세요.”

        

       그렇게 말한 양혜인은, 메이드복 앞치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하나 꺼낸다.

        

       “아가씨 것이니까요.”

        

       분명 발매된 지 몇 년 지난 모델이었는데도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이 깨끗한 스마트폰이었다. 그야 당연히, 실제로도 몇 번 사용된 적이 없으니까. 생각해보면 예사라의 이름으로 개통된 휴대전화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양혜인의 손에는 스마트폰만 들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스마트폰 아래에 뭔가 두툼한 것이 있어서 꺼내 보니, 지갑이었다. 심플하게 회색 단색으로만 이루어진 지갑에는, 오만 원 권이 여러 장 들어있었다.

        

       “그것도 아가씨의 것입니다.”

        

       ……용돈인가?

        

       아니, 어쩌면 정말로 예사라의 돈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통장이 있고, 카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금 한 푼 없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내가 바깥에 나가서 뭔가를 살 때 카드를 사용하게 된다면 아마 회장에게 직통으로 보고가 되겠지. 미성년자인 예사라가 자신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고, 설령 체크카드를 사용해도 입출금 기록이 남을 테니까.

        

       ……그래도 예사라처럼 어린 애가 오만원권을 이렇게 뭉텅이로 들고 다니는 것도 조금 깨긴 했지만.

        

       “휴대전화는 필요할 때만 사용하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양혜인은 나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네, 고마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추적이라도 당하고 있는 걸까.

        

       사실 저택을 나가는 순간부터 사람이 따라붙을 게 분명하니 스마트폰을 사용하건, 사용하지 않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부자의 조언을 새겨들어서 나쁜 것도 없다.

        

       “그럼,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양혜인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예사라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으면서도 그렇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양혜인을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단순히 더 어린 사람에게 깍듯이 대하는 어른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혜인도 이 저택의 사용인이라는 사실이 자꾸 상기되기 때문이었다.

        

       예사라는 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조차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예사라의 죽음에 이 저택의 사용인들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양혜인도 그 공범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양혜인은 내가 예사라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아니, 내가 그런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내 기준으로는 한없이 판타지에 가깝고, 실제로 육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는 세상이지만, 이쪽 세계에선 그게 상식일 테니까. 그 외에 모든 ‘판타지다운’ 부분은 전부 비상식이고.

        

       빙의니, 이세계 전이니,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혜인은 예사라의 몸에 들어온 나의 행동을 보고 ‘예사라가 변했다’라고 판단해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원래의 예사라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면 양혜인은 이렇게 행동해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하지만 이미 늦었지.

        

       양혜인은 심지어 예사라의 죽음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예사라의 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예사라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으니까.

        

       “……네, 알았어요.”

        

       예사라의 유언장에서 양혜인의 존재를 암시하는 부분은 아주 짧았다. 평소에 양혜인과 예사라가 어떤 관계였는지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설령 양혜인이 공범 중에 하나라고 하더라도, 후에 예사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이용 가치가 충분했으니까.

        

       나의 말에, 양혜인이 다시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그 사이에 다시 뒤로 돌았기 때문에, 나는 양혜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럼, 갈까?”

        

       대신, 나를 향해서 환하게 웃어 보이는 유하늘이 보였다. 유하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지지 않을 만큼 환하고 깨끗한 미소였다.

        

       그녀는 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아, 잠깐……!”

        

       내가 어떻게 제지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함께 뛰고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자! 뭘 할지는 그때부터 생각해!”

        

       그렇게 외치는 그녀의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보통 자신을 구속하던 곳에서 뛰쳐나오는 미소녀가 화면에 잡힐 때는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 법이다. 그 잔잔한 음악은 서서히 커지고, 마치 소녀가 달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주변에서 들리던 잡음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인도하는 구원자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있다는 듯, 음악은 점점 더 고조되고, 처음에는 잔잔하던 음악에 이제는 합창단, 혹은 굉장히 높은 음까지 올라가는 가수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애니메이션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

        

       “하아…… 하아……”

        

       —가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배경음악이 끝날 때까지 달릴 수 있는 체력이 없었다. 아마 애니메이션이었다면 도중에 음악이 끊어지고 여주인공이 헥헥거리는 소리만 들리겠지.

        

       젠장, 역시 체력을 먼저 키워야겠다.

        

       남들보다 뛰어난 체력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남들만큼 뛸 수만 있어도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나중에 뽕 차는 연출에서 혼자 뒤처지면 쪽팔리잖아? 뭐, 연출이라는 건 그냥 내 망상일 뿐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내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게임 주인공이었으니까.

        

       유하늘은 잡고 있던 나의 손을 놓은 채 골똘히 고민에 잠겨있었다.

        

       “역시, 운동복은 하나 사는 게 좋겠다.”

        

       내가 숨을 몰아쉬고 있건 말건, 유하늘은 내 차림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 학교 체육복 디자인이 특별히 추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뛸 때마다 학교 운동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좋아. 그럼 오늘 처음으로 갈 곳은 옷 가게네.”

        

       유하늘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갈 곳?”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내가 그렇게 묻자, 유하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한 거 아냐? 이렇게 화창한 주말에 나왔는데, 정말로 조깅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어?”

        

       “…….”

        

       음, 그보다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올 생각만 하고, 나와서 뭘 할지는 생각도 안 해봤다. 저택과 학교 내에서 예사라가 어떻게 외부와 연락을 했는지 알아볼 생각은 있었지만, 그 외의 바깥에는 예사라와 연관된 장소가 별로 없었으니까.

        

       아니, 어린 시절의 추억의 장소가 있을 수는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장소를 모른다는 거겠지.

        

       “어때, 찬성이야?”

        

       “그래.”

        

       뭐, 그렇다고 저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없다.

        

       “좋아, 그럼, 이대로 옷 가게까지 뛰어가자.”

        

       유하늘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며 말했다.

        

       “……뭐?”

        

       “여기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종합 쇼핑몰이 하나 있네. 거기까지 뛰어가면 되겠다. 자, 자, 허리 펴시고.”

        

       유하늘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몰아쉬느라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나의 어깨를 그대로 붙잡아 올렸다. 체력은 물론이고 힘도 유하늘보다 딸리는 나는 그대로 숙였던 허리를 강제로 펼 수밖에 없었다.

        

       “으힛, 자, 잠깐!”

        

       깜짝 놀라서 그렇게 외쳤지만, 유하늘에게는 전혀 자비가 없었다.

        

       “자, 그럼,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500미터를 정말로 뛰어서 가려고!?”

        

       “괜찮아, 옆에서 내가 같이 달려줄게. 힘들면 중간에 쉬어가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말에 번화가 한복판을 이 복장으로 뛰어서 통과하자는 말인가?

        

       외국인 관광객도 한가득 있는 그 거리를?

        

       물론, 유하늘의 얼굴에는 한 치의 거짓도 있지 않았다. 유하늘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광학적으로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아, 그냥, 차라리 걸어가면—”

        

       하지만, 내가 그런 제안을 다 끝내기도 전에, 유하늘은 이미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자, 그럼, 출발하자!”

        

       그리고 힘껏 뛰기 시작했다.

        

       “으헤, 으, 잠깐!”

        

       나의 비명 같은 외침은 유하늘에게 닿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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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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