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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오독오독.

    예린의 옷 속에 담겨서 과자를 하나씩 받아먹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와 내가 과자를 먹는 소리만이 차안에서 울려 퍼졌다.

    손발이 예린 옷 속에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사실 예린이랑 있을 때는 내가 직접 과자를 집어먹은 적이 드물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은 영하 몇 도 정도 되는 걸까? 인간을 그만둔 지 오래라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예린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는 걸 보면 차안은 그리 추워 보이지 않는데, 밖의 기온은 어떨지 모르겠다.

    신뢰할만한 이동 수단인 자동차가 멈출 정도면 얼마나 추운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추위에 차량이 멈추려면 가솔린이 얼어붙어야 멈추는 건지, 아니면 그보다는 높은 온도에서 멈추는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니면 그냥 예린이 차량 정비를 대충해서 멈춘 걸지도 모르고 말이다.

    밖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이런걸 화이트 아웃이라고 하는 거겠지.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걸까. 

    지루한데다가, 푹신푹신하고 따뜻해서 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

    품 안의 사신이는 눈 속에서 조난된 상황이 지루한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상태였다.

    사신이가 잠든 지 대충 두어 시간이 지나자, 눈보라가 멈췄다.

    그렇게 드러난 풍경은 여기가 정녕 서울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풍경이었다.

    눈으로 가득한 세계.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은 꽤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배경에서 돌아다니는 것들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설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봉구를 드론으로 관측하면 자주 보이는 녀석이라 꽤 유명한 오브젝트였다.

    다만 상당히 난폭한 녀석들이라, 위험한 오브젝트로 분류되어있었다. 

    다만 연구소에서 격리를 하거나 실험을 통해서 데이터를 얻어낸 건 아니라서 얼마나 위험한지, 어떤 특성이 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체나 동물을 보면 얼음이나 돌멩이 따위를 집어던지는 난폭한 놈들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살인 괴물인 설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니, 숨을 죽이고 몸을 숙여서 설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체감상 10시간은 되어 보이는, 숨 막히는 10분이 지나자 사나워 보이던 설인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메꾸듯이 나타난 것은 사신 정도의 신장을 가진 귀여운 눈사람들이었다.

    비누거품을 불듯이, 얼음 거품을 불며 돌아다니는 눈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얼음으로 만든 실로폰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얼음으로 만든 나팔로 얼음 거품을 부는 눈사람들.

    천진난만한 어린애들 같은 행동을 하는 귀여운 눈사람들이라 절로 경계심이 무뎌졌다.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녀석들이 하얗게 빛나는 설원 위를 돌아다니니까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냈다.

    처음 보는, 그리고 그 습성이나 생태를 잘 모르는 오브젝트가 돌아다니면 공포에 질리기 마련이지만 별로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눈사람은 전혀 해로워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 품 속에서 꿈틀거리며 잠든 사신이의 온기가 나의 용기를 한층 끌어올려주었다.

    거기다가 저 눈사람들 엄청 느린데다가, 평화롭게 거품이나 불고 있어서 별로 위협적인 오브젝트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살짝 귀엽게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을 구경할 때, 온몸을 두툼한 옷으로 중무장한 남자가 눈사람 근처를 살금살금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런다고 들키지 않는 게 아닐 텐데, 미련한 사람이었다.

    살금살금 다녔던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들켜버렸지만,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들켰다는 걸 인지한 남자는 허겁지겁 뛰어가면서 눈사람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온순해 보이는 눈사람들은 도망가는 사람을 발견했지만, 위협을 하거나 쫓아가지 않고 평소처럼 그저 얼음 거품이나 불면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온순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눈사람들이 이번에 뿜어낸 것은 귀여운 거품이 아니라 날카로운 바늘이었다.

    “헉!”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터져 죽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눈사람이 쏘아 보낸 바늘은 사람의 몸을 꿰뚫자마자 얼음 거품으로 변했는데, 사람 몸속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펑하고 해체되는 것이다.

    ‘으으, 또 살인 괴물이야.’

    나는 또다시 숨을 죽이고 차 안에서 몸을 낮추고 숨겨서 눈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화 같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잔혹 동화처럼 변했고, 사신이가 준 용기는 거품처럼 사라졌다.

    사신아 빨리 일어나줘.

    제발.

    ***

    사방을 울리는 폭발음과 총성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확인해보니, 예린은 몸을 바짝 낮춘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끔뻑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차창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비둘기의 눈동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비둘기는 깜짝 놀라서 홰치는 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예린의 볼을 꾹꾹 눌러서 상황이 해결됐음을 알렸다.

    “아, 사신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무서웠어.”

    오들오들 떨던 예린은 무서웠는지 나를 꼭 껴안고 투정을 부렸다.

    투정을 부리는 예린의 어깨를 대충 두들겨주고 상황을 파악했다.

    들리는 총성을 보니 군대를 동원한 대대적인 구조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였다. 

    아마 곧 군인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지 않을까 싶었다.

    방금 나를 보고 도망간 비둘기도 날아가던 도중 폭탄 한방을 얻어맞고는 내장을 흘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오브젝트가 죽거나 박살나고 시간이 좀 지나자, 탱크와 장갑차들이 줄줄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수송차량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는데, 그중 한 차량이 멈추더니 김중뢰가 내려서 우리 차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덩치가 상당한 김중뢰였는데, 털옷까지 입으니 커다란 곰처럼 보였다.

    “선배!”

    김중뢰는 말없이 예린에게 위에 걸칠만한 옷가지를 안겨주더니, 수송 차량 내부로 안내했다.

    수송차량 내부에는 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잔뜩 있었다.

    물론 10년 만에 다시 벌어진 도봉구의 얼음 왕좌와의 전쟁이니 당연하겠지.

    이정도면 예린도 안전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럼 나는 예린이를 괴롭힌 얼음 왕좌를 때려주러 가야겠다.

    ***

    도봉구의 장벽 앞에는 수많은 얼음 갑옷을 입은 골렘, 혹은 로봇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건물들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마치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처럼 말이다.

    얼음 병사들은 건물들을 부수고 다져서 거대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길인지는 모르겠다.

    길을 만드는 병사들의 크기는 거의 20m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했는데,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저 비현실적인 크기의 병사들이 오브젝트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갑옷은 평범한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얼음 속에서 맥동하는 기계장치들 역시 평범한 금속이었다.

    다만 내 얕은 지식으론 저 거체를 유지할 튼튼함이나, 저런 무거운 물체를 움직이게 할 동력원이 오브젝트가 없이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불가능하다면 오브젝트의 힘으로 뭔가 보조를 해주는 거겠지.

    ***

    도봉구 장벽의 코앞까지 도달하자, 인간이 만든 별똥별이 하늘을 아름답게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구조가 모두 끝났는지,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사일 공격이었다.

    얼음으로 된 병사들은 미사일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박살이 났다.

    10년 전의 도봉구 탈환 작전 당시 촬영된 영상처럼 말이다.

    폭발의 고열에 병사들이 두르고 있는 얼음 갑옷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내부의 뼈대를 이루는 금속은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박살나서 고철이 되었다.

    얼음 병사들은 무력하게 파괴되고, 현대 기술의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진 장면도 10년 전의 재현이었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의 강철 골격은 마치 시간을 뒤로 감듯이 뼈대를 이뤘고, 얼음 갑옷은 그 위에 빠른 속도로 다시 얼어붙었다.

    물론, 인간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이미 10년 전에 소용없다고 밝혀진 일을 다시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이 미사일과 포탄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저 도봉구의 병사들이 길을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갑작스러운 도봉구 얼음 왕좌 병사들의 진격과 그 진격과정에서 만드는 무언가, 관계가 없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들의 진격을 멈추기 위해서 포탄을 쏟아붓는 것이다.

    당연히 포탄의 개수는 유한했고, 저 병사들의 재생은 무한할 테니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아마, 도봉구를 빼앗겼던 때처럼 무력하게 패배하게 되겠지.

    그리고 땅을 또 빼앗기고, 인류는 또 살아갈 터전이 줄어드는 것이다.

    난 그전에 얼음 왕좌를 파괴해서 도봉구를 되찾게 도와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이유로는 예린이의 복수였다.

    큰 이유로는 나에게는 아직 인류가 많이 필요했다.

    내 심장에서 타오르는 장작이 없더라도 인류가 필요했다.

    내가 먹는 과자.

    내가 보는 TV.

    그 외에도 많은 즐거운 것들이 나에겐 필요했다.

    난 그런 이유로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같은 한복판을 거슬러 올라가, 얼음 왕좌를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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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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