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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야, 기운 차려. 뭐 나라 잃은 것마냥 그러고 있냐.”

   

    춘봉이 서준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아니, 이 새끼 진짜….”

    “안 되겠다.”

   

    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이 결연한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따라와.”

    “어, 어어…? 야! 손은 좀 놓고…! 으기익…!”

   

    질질 끌려가던 춘봉이 끝내 포기하고 서준을 따라 걸었다.

   

    성큼성큼 걷던 서준의 걸음이 멈춘 곳은 식당이었다.

   

    “식당은 갑자기 왜?”

   

    말없이 안으로 들어간 서준이 주방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 식사 오인 분만 차려주세요! 살 찌기 좋은 걸로!”

    “아니 이렇게까지 할 정도라고…?”

    “이건 네 의무야, 금춘봉. 당장 내 손에 챡 감기는 몰랑함으로 돌려놔.”

    “아니, 뭔….”

    “아, 빨리 돌려놓으라고! 내 볼따구! 나 이대로는 못 살아! 나 주화입마 걸리기 전에 빨리!”

   

    급기야 애새끼처럼 떼를 쓰기 시작하는 서준의 모습에 춘봉이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주화입마가 아니라고…?”

   

    여기서 주화입마가 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히려 미친놈이 한 번 더 미쳐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 아닐까?

   

    “빨리!”

    “…미친 새끼.”

   

   

    *

   

   

    결국 오인 분 중 사인 분은 서준이 먹어치웠다. 그래도 양이 적은 춘봉 치고는 일인 분도 많이 먹은 셈이었다.

   

    서준도 식고문을 시킬 생각은 없었기에 그 정도로 만족했다.

   

    “하아….”

    “땅 꺼지겠다.”

    “…너 또 키 컸네.”

    “…미친놈. 빨리도 알아차린다.”

   

    춘봉이 허리를 쭈욱 폈다. 이제 머리가 서준의 턱끝에 닿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뿌듯하게 미소 지은 춘봉이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을 매만졌다.

   

    텁- 텁-

   

    변한 것은 없었다.

   

    “…씨발.”

   

    춘봉이 절망했다.

   

    서준은 픽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우드득-, 밤새 호신공을 연구하며 굳어있던 몸이 유연하게 풀어졌다.

   

    이게 밤을 샌 컨디션? 무공 만만세다.

   

    “난 가본다.”

    “기녀들?”

    “어. 정신기강은 좀 잡아놔야지.”

    “청하문에서 알아서 할 텐데 굳이 네가 할 필요 있냐?”

    “기본 서비스지 인마.”

   

    휘휘-, 서준이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

   

   

    청하문을 떠날 때가 되었다.

   

    서준과 춘봉은 문주전에서 청하문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 옆에는 청운 역시 있었다. 

   

    “떠나는 겐가?”

    “네, 뭐. 슬슬 떠나야죠.”

    “그런가. 연이 닿는다면 다시 보지.”

    “뭘 또 연까지야. 보고 싶으면 보면 되는 거죠.”

   

    진인사대천명? 하늘의 뜻이고 자시고 사람 좀 보겠다는데 이게 하늘까지 끼어들 일은 아니지.

   

    옅게 웃은 서준이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한 문파의 문주 앞에서 검을 뽑아드는 행위. 무례함은 둘째치고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문주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서있던 청운 역시 서준을 주시했다.

   

    “영약도 받아먹었겠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뽑혀나온 검이 무겁게 위로 치솟았다.

   

    대단한 검술을 보여줄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검 자체는 문주가 서준보다 잘 쓴다.

   

    하지만 한 가지, 이 분야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잘 봐요.”

   

    서준의 시선이 청운을 향했다. 동시에 검이 천천히 떨어져내린다.

   

    별것 없는 직선. 삼재검법의 초식을 따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끝에서 금빛 물결이 일었다.

   

    내려베기라는 단 한 번의 초식에서 강은 무수히 변화했다.

   

    미풍에는 고요하게, 산들바람에는 경쾌하게, 비바람에는 거칠게.

   

    끝까지 내려온 검이 멈춰섰을 때, 무수한 강줄기가 모여 바다가 되었다.

   

    금빛 파도가 너울대는 모습에 청운이 무심코 감탄사를 흘렸다.

   

    “아름답군….”

    “그렇죠?”

    “정말 고맙소….”

   

    청운이 포권했다. 서준 역시 픽 웃으며 포권했다.

   

    서준이 문주를 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영약 값으로 충분한가요?”

    “영약의 값은 이미 치르지 않았나. 내 새로이 빚을 하나 또 져버렸군.”

   

    문주가 실소를 흘렸다.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백하귀양百河歸洋. 어떤가.”

    “백 줄기 강이 바다로 돌아간다…. 나쁘지 않네요.”

   

    청운의 청류검, 청하문주의 청류청천검.

    원류에서 너무 멀어져버린 무공에 새 이름이 생겼다.

   

    심상에 어렴풋이 새겨진 무수한 강줄기와 거대한 바다를 더듬던 서준이 픽 웃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

   

   

    청하문의 대문을 지나 거리를 나아가던 서준의 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마워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꽤 멀어진 청하문에서 기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장 손을 열심히 흔드는 것은 추령이었다.

   

    서준 역시 미소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거 다들 열심히 사쇼!”

   

    한 마디를 끝으로 깔끔히 뒤돌아선 서준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가볼까?”

    “목적지는 정했어?”

    “이제 정해야지.”

   

    일단 다음 목적지는 홍월루였다.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매월이 그들을 반겼다. 서준은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굳이 방에서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물어볼 게 많은 것도 아니다.

   

    서준이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정보를 조금 사고 싶은데요.”

    “물론이죠, 소협.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니까 여기서 해도 돼요.”

   

    서준이 흘끗 주변을 살폈다. 손님과 매월의 호위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영약을 구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영약 말씀이신지요. 특정 효능의 영약이 필요하신 건가요?”

    “아뇨. 그냥 영약이면 돼요.”

    “그렇다면 바로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매월이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서준의 앞에서 살짝 허리를 숙여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여인의 향이 물씬 풍긴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하려는 손을 제지한 서준이 귀를 기울였다.

   

    “조만간 화산파에서 비무 대회를 개최할 겁니다. 일등 상품은 매화단. 자소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귀한 영약이죠. 특히 양기가 풍부해 남자에게 아주 좋답니다.”

   

    쿡쿡 작게 웃은 매월이 흐으- 귓가에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씹년아!”

   

    결국 춘봉이가 씩씩대며 매월을 밀쳐냈다. 검 손잡이를 만지작대던 서준이 은근슬쩍 귀를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라 이거죠? 값은요?”

    “어머, 값이라니요. 어차피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정보랍니다. 이 천것의 자그마한 호의라 생각해주시길.”

    “그렇다면야 뭐….”

   

    돈은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게 좋다. 공짜로 주겠다면 냉큼 챙기는 게 예의지.

   

    “아, 그보다 이걸.”

   

    매월이 가슴골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나무에 매昧 자가 음각된 자그마한 패였다.

   

    “그…, 이게 왜 거기서 나와요?”

    “생각보다 편하답니다.”

   

    받아든 패가 묘하게 따뜻하다. 서준은 패를 엄지와 검지의 끝으로 잡고 휘적이며 온기를 털어냈다.

   

    “저, 저…!”

   

    안타깝게도 가슴골 주머니 따위 꿈도 꿀 수 없는 춘봉이 아찔한 표정을 지으며 휘청였다.

   

    불쌍한 것.

   

    근데 춘봉이는 절벽이 어울린다. 섹시 다이너마이트 금춘봉? 머릿속으로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는 말보다 그걸 상상하는 게 더 어렵다.

   

    “그 패는 이곳, 두음향의 지부장을 상징하는 패랍니다.”

    “향급 지부장이라고?”

   

    휘청이던 춘봉이 눈가를 좁혔다.

   

    서준도 대충 향이 어떤 느낌의 행정구역인지는 알았다.

   

    한국의 읍, 면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매월이 향급 지부장이라 하니, 예상보다 높은 직책에 춘봉이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리 부담 가지실 필요 없답니다. 하오문의 향급 지부장이라 해봐야 별것도 없는 걸요. 애초에 위조하기도 쉬운 패라 너무 커다란 기대를 가지셔도 곤란하답니다.”

   

    그녀의 말대로 나무패는 그냥 나무패였다. 특별한 처리를 한 흔적도 없는 진짜 그냥 나무패.

   

    “네, 뭐. 감사합니다.”

   

    패를 품속에 넣은 서준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잘 사세요.”

    “떠나시는 건가요?”

    “그렇죠.”

    “아쉽네요. 오늘로 마지막….”

   

    매월이 티나게 표정을 꾸며 처연하게 웃었다.

   

    “소첩과 함께 마지막 밤을 지새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없는데요.”

    “매정하셔라.”

   

    하여간 이 여자도 희한한 사람이다.

   

    서준이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연이 닿으면 또 봅시다.”

   

   

    *

   

   

    “또 본다고? 연이 닿으면? 하! 걔랑? 진짜 또 본다고?”

    “아니, 금 씨.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또?”

    “화 안 났어!”

    “개빡친 거 같은데 지금…. 혹시 생리하니?”

    “…미친 새끼. 안 닥쳐?”

    “닥칠게용.”

   

    서준은 춘봉과 함께 집에 들러 짐을 챙겼다.

   

    가는 동안 먹을 식량과 물, 옷, 그 외에 이것저것.

   

    집에 없는 것들은 시장 거리로 나가 대충 쓸어담으니 딱 봇짐 정도의 양이 나왔다.

   

    “오, 뽀대 좆된다 이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후드가 달린 망토였다. 무협식 이름으로는 두봉이란다.

   

    평소에 입고 다니기에는 조금 더울 것 같긴 했지만 얇은 피풍의 위에 걸치니 뭔가 무림인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무림인 맞잖아 너.”

    “앗, 맞네.”

   

    아무튼 출격이다.

   

   

    *

   

   

    나, 무림 초출 이서준.

   

    기대감을 안고 떠난 무림행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은 산적이었다.

   

    “도, 도망쳐…!”

    “살려줘어어…!!”

   

    근데 이제 존나게 도망치는 중인.

   

    “뭔 상황인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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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무공 뭐 별거 없더라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fell into a phony martial world. But they say martial arts are so hard? Hmm… is that all there is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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