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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그러면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정신없이 수업을 듣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과장 좀 보태서 아사할 것 같았다.

         

       수업을 듣는 도중에도 대출해 온 책을 틈틈이 읽다 보니까 꽤 쪽수가 나간 상태였다.

         

       [□ 연구개발 중 : 마소─에너지 교환성 정리]

         

       조금만 더 있으면 이세계판 핵무기 개발을 위한 첫 단추를 꿰맬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개발 단계에서 나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론을 정립하고 예비 실험을 하는 것까지다. 본격적인 제작 단계에 들어서려면 훨씬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이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나와 협력해 줄 사람을 모아야 한다.

         

       기왕이면 분야별로 있으면 좋겠다. 화계마도사는 로테가 있으니 괜찮고, 지계마도사는 헤를라인 선생님이나 프레이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문제는 수계나 공계일 텐데.

         

       도움을 받기 위해선 우선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아카데미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쌈박질을 해서 재능을 보여주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별로 튀지도 않을 거고. 전투마도를 잘 하는 학생이라면 이 학교에 차고 넘친다.

         

       그러니 난 원래 세계에서 했던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우선 학계에 등록할 논문 하나를 내는 것부터 할 생각이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창 집중하고 있자니 로테가 빤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저기, 그 책 어렵지 않아?”

       “어? 어… 어렵지?”

       “신기하다. 금안족은 어릴 때부터 그런 어려운 것도 막힘없이 이해할 수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 나 말고 다른 금안족은 본 적이 없거든.”

         

       식사가 끝난 이후로도 나는 줄창 책만 봐댔다. 걸어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만 외부에 신경을 쏟고, 감각 대부분은 활자를 읽고 수식을 이해하는데 기울였다.

         

       삑! 삑! 삑!

         

       이건 또 뭔 소리야.

         

       “이봐, 거기! 걸어다니면서 책을 보면 안 되지!”

         

       금발의 여학생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눈동자 색은 버멜과 마찬가지로 녹빛이었다.

         

       엘프는 아니다. 인간 중에 공계마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외에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치마가 다른 여학생들에 비해 살짝 길고, 한쪽 팔에 짙은 주황색으로 된 완장을 차고 있다는 것 정도. 이쯤하면 싫어도 알아채야 한다.

         

       총학생회 임원이다.

         

       “당신은….”

       “그쪽은 살리에르 가문의 장녀지. 그리고 이쪽이 장안에서 한창 화제인 금안족 소녀인가? 틸레트 역사상 유일한 필기 만점자라고 하던데?”

         

       발언 자체는 평범했지만 목소리나 억양에서 기품이 묻어나왔다. 황자 앞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던 로테가 고개를 숙인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로테의 태도를 본 나 또한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묵례했다.

         

       “에테르입니다.”

       “처음 뵙지. 샤디엘 아르가나다.”

       “아르가나면….”

         

       사대공작 중 하나인 아르가나 가문. 제국 내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상위 귀족이다.

         

       그야 그렇겠지. 기본적으로 공계정령은 선한 사람에게만 축복을 내리니까.

         

       “학구열이 뛰어난 건 좋지만 공부는 책상에서만 하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샤디엘과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가 신경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점심 시간을 빌려 교복이 단정하지 못하거나 학업에 방해가 될 만한 물품을 소지하고 다니는 이들을 불러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와 로테는 샤디엘과 짤막한 대면을 마친 뒤 참고서적 몇 권을 사서 교실로 돌아왔다.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하교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했다.

         

       **

         

       오후 수업이 끝난 직후, 클리온은 황금색으로 치장된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귀가했다.

         

       원래라면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이 권장 사항이었다.

         

       클리온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천한 아랫것들과 같이 지내기에는 체통이 안 선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카데미도 그런 클리온의 고집에 맞서기는 싫었는지, 알아서 하라며 넘어갔다.

         

       그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외부 업무를 보느라 그를 맞이할 시간이 없었다. 클리온은 하교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황제의 집무실을 지나쳐 제 방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대신 반겨준 이가 있었다.

         

       “어이쿠, 제2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하교하셨습니까?”

       

       느긋한 목소리. 클리온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보는 남자였으니까.

         

       “블랜튼 공작 아닌가? 거의 나흘 만이군.”

       “네.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잭 블랜튼. 사대공작 중 수계마도의 정점에 있는 마도사 집안의 가주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그의 아쿠아마린 색 눈동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블랜튼이라는 성씨는 그가 물을 다루는데 얼마나 정통한 지 알려주는 지표였다.

         

       다른 건 필요없다. 블랜튼은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다른 마수를 개처럼 엎드리게 만드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손에 든 그건 뭔가?”

       “아, 이거요? 물총입니다.”

       “물총…?”

         

       블랜튼 공작은 제 손바닥 크기만 한 장난감을 가지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투박한 재질의 장난감 총이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총탄 대신 물줄기가 튀어나왔다.

         

       “수인국으로 출장을 다녀왔을 때 재밌는 게 있어 면세점에서 하나 구매했습니다. 딸내미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요.”

       “그, 공작은 가끔가다 유치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것 같은데.”

       “허허, 그리 말씀해주시면 저야 영광이지요. 안 그래도 요새 눈이 침침해져서 세월은 어쩔 수 없나 하던 참이었습니다.”

         

       블랜튼은 클리온 황자를 상대로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색욕으로 점철된 제2황자의 고삐를 쥐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제2황자를 다루는데 천재적이었다.

         

       방금 대화만 해도 핀트가 잘못 나갔다면 클리온의 빈축을 샀을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클리온은 살아 움직이는 폭탄의 뇌관과도 같았다. 그 폭탄을 잘 다루는 건 궁중에서 블랜튼 정도밖에 없었다.

         

       클리온은 화를 내는 대신 혀를 차는 것으로 여태까지의 대화를 종료했다. 그가 새 대화주제를 꺼낸 건 몇 초 뒤의 일이었다.

         

       “뭐. 그건 됐고. 저번에 제가 하스펠트 공작에게서 구매하기로 한 금안족 노예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는 계시는지?”

       “예, 압니다. 금화를 만 장 단위로 써 가면서까지 구매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정도로 용모가 빼어난 미녀라는 소문이 궁중에 자자합니다.”

       “말하다 말다. 금안족을 본 적은 처음이지만, 그만한 년은 없다고 자부하지.”

       “그러면 왜 아직까지 궁에 들이지 않고 계십니까? 하스펠트 공작과 약조하신 지 꽤 시간이 흘렀을 텐데요.”

         

       그 순간 클리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스펠트 공작이 그 금안족을 틸레트에 입학시켜서 그렇다!”

        “호오, 계약까지 다 진행했으면서 말입니까?”

       “그래! 그 년이 날 엿먹이려고 그런 게 분명해! 제국을 떠받치는 네 기둥 중 하나의 아가리가 이리도 가벼워서야 쓰겠나, 잭?!”

       “아뇨, 그래선 안 되죠. 황제께선 하스펠트 공작의 실책에 책임을 물으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께서 그 일에 반응을 안 하신다. 그것 때문에 지금 복장 터질 지경이야!”

         

       클리온이 제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뭔가 뾰족한 수가 없을까?”

       “만약 그러시다면 굳이 하스펠트 공작에게 뒤풀이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황자께서 원하시는 건 어디까지나 그 금안족 소녀 아닙니까?”

       “그렇지.”

       “금화 수천 장을 들고 내일 그 소녀에게 다가가십쇼. 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네가 원하는 만큼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까, 아카데미는 그만 다니고 자기 시종이 되라고요.”

       “과연. 돈으로 꾀라는 소리군. 하기야 금화로 해결하지 못하는 건 이 세상에 없지. 역시 자네와 이야기하길 잘했어, 잭.”

       “적어도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을 겁니다. 그럼 전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지요.”

         

       블랜튼에게 감사 인사를 마친 클리온은 개인 금고로 달려가 금화 5천 장을 꺼냈다. 이 정도면 평민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귀족도 쉽게 만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원래 하스펠트 공작에게 주려고 했던 3만 장의 금화에는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려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스펠트와는 완전히 척을 졌으니 오히려 지출이 적게 나가리라.

         

       “이만하면 안 넘어갈 년이 없겠군.”

         

       클리온은 실실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

         

       오후 수업이 끝난 직후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헤를라인 선생님 댁에 맡겨놓은 물건부터 찾아와야 했다. 나는 로테에게 얘기한 뒤 저택으로 돌아가 40kg에 달하는 군장을 쌌다.

         

       그 무게의 대부분은 마전지와 마석이 차지했다. 나머지는 생필품이다.

         

       등록금을 내느라 벌었던 돈도 사라져서 지금은 지갑이 가벼웠다. 기껏해야 은화 몇 장이 전부였다. 이대로라면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알바를 나가야 할 판이었다.

         

       짐이 무거웠지만 못 들어서 고꾸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보따리를 한 움큼 싼 채로 아카데미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에도 독서에 열중했다.

         

       [경고를 받았는데 책을 안 놓으시네요.]

         

       들키지만 않으면 무죄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이 시간에 학생회가 돌아다닐 리도 없고.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나는 로테와 같은 방이었다.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성적순으로 자르지 않았을까.

         

       짐을 풀자마자 펜과 종이부터 꺼냈다. 종이에 수식을 적고 있었는데 로테가 다가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로테의 품 안에서 은화 두 장이 나왔다.

         

       “나 과외 좀 해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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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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