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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공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간식이라도 사기 위해 매점에 들른 우리는 가게 입구에서 딱 멈춰 섰다.

         

       믿기지 않았다.

       매점의 가격표에 적혀 있는 숫자들.

       그것은 호텔의 식당에서 봤던 것보다 숫자가 컸다.

       우리가 일류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건 무지막지한 폭리였다.

         

       엘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후후, 이래서였군요. 입구에서 음식물을 거둬간 이유가.”

         

       나는 유라크네에게 부탁해 병에 차를 담아왔다.

       오가는 시간에 공연을 관람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유라크네의 정성’ 퀘스트를 대여섯 잔은 달성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병은 극장 입구도 통과하지 못했다.

       입구에서 표를 검사하고 있던 경비원이 내 손에 든 물병을 보고는, 극장 내부 환경을 쾌적하게 유지한다며 가져간 것이다. 나중에 퇴장할 때 찾아가라며.

         

       퀘스트를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극장의 규칙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내부의 매점에서는 끈적끈적하고 가루가 떨어지는 온갖 음식과 음료를 다 팔고 있었다.

         

       “말만 무료입장이지 이건…….”

         

       이제야 왜 호객꾼이 표를 공짜로 줬는지 알겠다.

       매점에서 파는 간식과 음료는 밖에서 파는 것보다 몇 배는 비쌌다.

       물 한 잔, 사탕 한 알을 물 한 병, 사탕 한 봉지 가격으로 팔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장 자체에서 특별히 수제작 한 프리미엄 제품이라는 것도 있었다.

         

       “자, 여기 공주님의 레드벨벳 드레스 티 나왔습니다.”

       “백작 가문의 펜던트 쿠키 2개 주문하신 분?”

         

       다른 간식과 음료의 2배는 되는 가격.

       그러나 그중에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품질의 것은 없었다.

       매점 간판에 그려진 제품 그림만 요란하지, 실제 내용물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간 얼음에 시럽을 뿌리거나, 알록달록한 토핑을 몇 개 얹은 게 다였다.

       그걸 극 중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의 이미지를 씌어 파는 것이다.

         

       백작의 어쩌고.

       공주의 어쩌고.

         

       그러나 그게 또 팔리긴 잘 팔리고 있었다.

       고작 동전 몇 개 아끼자고 공연하는 몇 시간 내내 아무것도 안 먹는 것은 유흥과 여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유원지나 영화관의 매점을 연상케 하는 상술이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장미 풍차의 경영자인 브왈레.

       그자의 발상임이 틀림없었다.

       하여간 게임에서나 여기서나 돈 버는 머리 하나는 비상한 작자였다.

         

       -괴물들이 침입 불가능한 세이브 존입니다! 소모품 보급! 체력 회복 음식! 다양한 효능을 지닌 칵테일 구매 가능!“

         

       브왈레는 괴물로 변한 뒤에도, 보스몹 주제에 용사들에게 안전지대를 제공하고,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던 인간이었다. (심지어 동료 괴물들에 대한 공략 아이템도 팔았다.)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의 카바레 맵에서 혼자 신나서 껄껄대던 남자.

       최상층인 그의 사무실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용사들에게 우호적이었기에 플레이어들에게 친근한 캐릭터였다.

       

       그가 제공하는 물건들이나 서비스는 훌륭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많이 구매하면 안 됐다.

       카바레에서 플레이어가 쓴 금화만큼 그가 보스전에서 강해져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이쿠, 손님! 손님! 손니이임! 손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이렇게! 이 정도까지나! 힘을 키울 수 있었답니다!

         

       예전에 실험 삼아 ‘장미 풍차의 보스, 브왈레, 한계는 어디까지일까?’라는 컨셉으로 동영상을 찍은 적이 있었다.

       게임에 존재하는 골드를 거의 다 긁어모아 때려 박으니, 브왈레의 체력은 무려 6만 8천까지 올라갔다. 최종 보스인 원더스타인의 것보다 3배는 컸다.

         

       -이런 고객님! 이곳을 지나가고 싶으시다고요? 열쇠를 사려면 1만 골드가 필요한데요. 돈이 없다고요? 그럼……그윽, 그르르, 이제! 고객이! 아니잖아!

         

       물론 항상 여러 공략법을 준비해두는 트릴 트릴로 시리즈답게, 싸우지 않고 1만 골드를 지불하고 열쇠를 사서 통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도전 과제를 클리어하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득이 없는 행동이었다.

       다른 곳에 사용하면 훨씬 유용한 돈을 날리는 것은 물론, 브왈레를 처치해 얻을 수 있는 경험치와 아이템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실현에 미친 예술가들 사이에서 돈과 장사라는 컨셉을 밀고 들어왔던 경영자 브왈레.

       트릴 트릴로 시리즈의 인상 깊은 보스 중 하나였다.

         

       ”그냥 사죠.“

         

       그렇다고 여기 와서도 이렇게 주머니를 털릴 줄은 몰랐다.

       후원자로 베르그송 자작을 둔 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동전 하나하나에 벌벌댔는데.”

       “이제 우리 돈 많잖아요.”

         

       그렇게 몇 가지 메뉴를 주문해서 객석으로 들고 가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찾았다! 여기 계셨군요!”

         

       아까 극장 입구에서 엘라와 합을 맞췄던 배우 파리스였다.

         

       그는 우리를 홀 뒤편에 있는 연습실로 데려갔다.

         

       “데려왔습니다!”

         

       파리스의 외침과 함께 안에 있던 모두의 눈빛이 우리에게 쏠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쏠렸다.

       다들 내 얼굴을 보며 수군거렸다.

         

       -누구야, 저 사람?

       -배우 해도 되겠는데.

       -파리스 씨가 데려온다는 사람이 저 사람이야?

       -하녀 역할이랬잖아.

         

       지팡이를 짚은 깡마른 노인.

       그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는 우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엘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늙은 사자의 것을 연상케 했다.

       이윽고 우리가 그 앞에 서자,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곡예사 출신이군.”

         

       노인의 말에 엘라는 싱긋 웃었다.

         

       “맞아요. 어떻게 아셨죠?”

       “근육의 발달이나 걸음걸이만 봐도 대충 나와.”

       “정말요?”

       “사람은 발을 뗄 때마다 무게중심이 좌우로, 발을 디딜 때마다 무게중심이 앞뒤로 흔들린다. 하지만 ‘줄타기’를 익힌 곡예사들은 다르지. 어느 동작에서건 늘 무게중심을 고정하고 있단 말이야. 그 움직임의 정도만 봐도 줄타기 곡예사의 숙련도를 알 수 있어.”

         

       노인의 말에 그의 뒤에서 있던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흥미로운 눈초리로 엘라의 전신을 살폈다.

         

       안무가 마레.

       그녀 역시 장미 풍차의 중요 캐릭터 중 한 명이다.

         

       “우리 영감님은 대본도 침침해서 못 읽겠다는 분이 또 그런 건 대번에 알아챈단 말이야. 그래서 어느 정도죠? 이 아이는?”

       “젊을 때의 자네와 비슷해.”

         

       노인의 말에 중년의 안무가는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장미 풍차 무용수들의 지도자였다.

       그런 그녀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다면, 엘라의 재능은 확실히 보통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엘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마치 보석을 발견한 사람의 것을 하고 있었다.

         

       “극단의 장래가 어둡지는 않겠네요. 음, 이본느가 그런 일을 당한 날에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샤일라에, 파리스에, 또 이런 애까지…….”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이상했다.

       엘라가 마치 자기네 극단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뭐라 따지기도 전에, 엘라가 먼저 나섰다.

         

       “잠시만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저 이분이 급히 와 달라고 해서 온 거뿐이에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 곡예사 출신이 아니라, 현역 곡예사예요.”

         

       그녀의 말에 안무가 마레가 어머 하고 입을 가렸고, 총감독 마로이네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곡예사라고……? 설마 서커스 그랑프리 참여자인가?”

       “맞아요.”

         

       엘라의 말에 노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허, 이런. 노래를 현장에서 바로 불렀다기에, 가수나 연기자 지망생인 줄 알았는데…….”

       “그냥 어릴 때 배웠던 걸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허, 그런가? 좋은 곳에서 배웠나 보군. 실수했어. 잠깐, 혹시 이쪽은?”

         

       이제야 나를 바라보는 마로이네.

       나는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프랑크 원더스타인. 엘라 양이 있는 서커스단의 단장이죠.”

       “아, 그렇군. 이거 실수했소. 단장 앞에서 단원을 빼내려고 한 것처럼 되어버렸군.”

         

       그리고 이어지는 변명을 대충 들어보니, 사정이 이해가 갔다.

         

       “그렇군요. 그거 큰일이네요. 주연배우가 병원에 실려 가다니…….”

       “다행히 얼마 전에 오디션을 치른 터라, 그 배역에는 대신 맡아줄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배우가 맡던 역은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거죠.”

       “그 역이…….”

       “네. 아까 엘라 양이 노래를 불러주셨던 ‘하녀’역이요.”

         

       나는 엘라를 슬쩍 바라봤다.

       부단장이라고 신분을 밝혔기에, 다른 극단 앞에서 체면을 차리려고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슬쩍슬쩍 올라가는 것이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원의 바람으로 작동하는 ‘단원 퀘스트’.

       아, 이 타이밍이면…….

         

       띠릭.

         

       역시나.

         

         

       *단원 퀘스트-대타 출동

       : 엘라는 정말 오랜만에 무대 위에 서 보고 싶어 합니다.

         

       달성조건

       : 엘라가 배정받은 배역의 연기를 완벽하게 해냄.

         

       성공 시 보상

       : [데볼루트 +25]

         

       실패 시 페널티

       : [무작위 특성 1가지 파괴 (단, 고유특성은 제외합니다.)]

         

         

       무려 데볼루트 25개나 걸린 보상.

       목숨을 구해달라는 그녀의 ‘살려주세요!’ 퀘스트는 15개였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염원이 강하다는 건가?

       어지간히나 무대 위에 서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패 시 페널티가 강하긴 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이면 문제없으리라.

         

       나는 순순히 제안을 수락하려는데, 엘라가 내 앞을 막고 섰다.

         

       -이걸 덥석 받으면 어떡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극단 사람들을 바라봤다.

         

       “좋아요. 사정은 알겠어요. 그런 일이라면 저도 기꺼이 도와드릴 수 있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아, 돈이라면 A급 배우의 사례금으로 맞춰서…….”

         

       안무가 마레의 말에 엘라느 고개를 저었다.

         

       “사례금은 됐어요. 그 마로이네 감독님의 연극에 출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그럼 어떤 조건이지?”

       “커튼콜을 할 때, 저를 따로 소개해주세요. ‘원더스타인 서커스단의 부단장 엘라가 대역을 맡아준 덕분에 오늘 공연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라고요.”

         

       엘라의 말에 굳어지는 감독과 안무가.

       파리스만이 분위기가 왜 그런지 파악을 못 하는 듯했다.

         

       물론 나도 왜 그런지 파악 못 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대극장의 자존심?

         

       하지만 나는 어리둥절한 티는 내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에 서서 감독을 바라봤다.

         

         

       ***

         

         

       조건은 수용되었다.

       그것 외에는 이제 방법이 없었으니까.

         

       원더스타인과 엘라가 물러난 뒤, 마로이네는 미소를 피식 지었다.

         

       “큭큭, 그 꼬맹이 당돌한데.”

       “왜, 왜 그러시죠?”

       “앞으로 3주 뒤에 이곳에서 서커스 그랑프리 예선전이 펼쳐지잖아.”

       “그거하고 무슨 상관……아!”

         

       그제야 엘라의 의도를 깨닫는 파리스.

       마로이네는 한 방 먹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심사위원으로 우리 극장이 선발되었잖아. 그런데 그 참가자 중 한 명을 이렇게 어필해 준다? 적어도 반 발자국은 유리한 상황에서 출발하는 거지.”

       “어……그……그러면 안 되는 거죠……?”

       “아냐. 규정상 문제없어. 다른 다섯 극장에서도 은근 뒤에서 거래가 오가고 있을걸? 우리는 브왈레가 주워오는 청탁을 내가 성질부려서 안 하고 있었을 뿐이지.”

         

       마로이네의 말에 파리스는 허탈한 웃음을 내었다.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다니.

       참으로 놀라운 아이였다.

         

       “저런 아이가 부단장을 맡고 있는 이유가 있었군요. 옆에 있던 그 단장이라는 분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요?”

         

       파리스의 말에 마로이네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 남자는 나라면 적어도 배우로는 안 쓸 거야.”

       “네? 왜요?”

       “그 남자의 미소를 봤나?”

       “멋지던데요?”

         

       늙은 마로이네는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렸다.

       

       멋지다?

       그래 그렇지.

         

       기교만 쫓던 젊은 시절의 자신이라면 그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이 침침해진 지금.

       이제는 다른 감각이 더 발달했다.

         

       그 미소 뒤에는 다른 게 있었다.

       인간의 거죽 아래에.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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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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