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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와! 처녀!”

       

       평소의 의뭉스러운 미소 그대로 얼굴을 붉힌 채,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브.

       

       그런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에이. 괜찮아요 괜찮아! 엘프가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노화가 느리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이브 씨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아직 이 정도 규모의 가게를 운영하신다면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겠죠.”

       

       “흡…!”

       

       현존하는 필멸자 중 최고령자임에도 아직 처녀에 돈도 없는 이브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자신의 정체를 모를 테니,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하지만 때로는 순진함이 가장 큰 무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내 경우에는 순진함을 가장한 돌려 까기지만!

       

       평정심이 무너진 이브의 모습은 여러모로 귀중한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빠르게 안색을 회복한 이브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한 뒤에야 말을 이었다.

       

       “엣흠. 요즘 시대에는 사실상 구하는 게 불가능한 최상급 뿔이군요. 만약 판매하신다면 좋은 곳을 연결해 드리죠. …물론 약~간의 수수료는 받을 생각이지만요.”

       

       골수까지 벗겨 먹겠다(X)

       부끄러우니까 다른 이야기나 하자(O)

       

       “그건 별로 땡기지가 않네요. 그만큼 좋은 물건이라면 팔기보다 직접 쓰고 싶거든요. 돈이야 시간은 좀 걸려도 많이 벌 자신이 있는 터라.”

       

       “후후. 요나 씨의 자신감은 신기하네요. 어린아이 특유의 낙관이라기보다는 확실한 근거를 둔 확신에 가까운 것이…그러네요. 참 보기 좋아요.”

       

       혀를 할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브. 그 사이에 본래의 여유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거 그냥 예전에 엘프 여왕으로 군림할 때 생긴 버릇이라는 걸!

       

       한 종족의 명운을 건 자리에 오른 사람이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호들갑 떨어서야 아랫사람들의 불안만 부추길 뿐 아닌가.

       

       그래서 몸에 익힌 것이 바로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전부 예상했다는 듯 뭔가 있어 보이는 태도를 보이는 습관이다.

       

       이른바. ‘아아, 그런가. 그렇게 된 건가…너는 아직 알 필요 없다.’ 작전!

       

       그 과정에서 의뭉스러운 말투와 여유로운 분위기가 습관처럼 몸에 익은 것이다.

       

       이브의 수상할 정도로 수상한 외모와 어우러져 실제로 큰 효과를 보기도 했지만…이제는 그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습관일 뿐.

       

       지금도 속으로는 조금 전의 처녀 인증이 아직도 신경 쓰이고 있을 터.

       

       너무 괴롭히기만 하면 좀 그러니 다음에는 포상을 줘야 한다. 뭐가 좋으려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브가 가볍게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분위기를 잡았다.

       

       “만약 요나 씨가 뿔을 직접 사용하실 생각이라면 제가 가공해 드리죠. 어떤 형태를 원하시나요? 단검, 호신부, 영약…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만약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뛰어난 장인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답니다. 부디 믿고 맡겨주시겠습니까?”

       

       내게 유니콘 뿔을 넘겨라(X)

       제발 처녀 드립을 멈춰다오(O)

       

       “으음. 그러네요. 어차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 이브 씨에게 맡기는 게 좋겠죠. 아까 엄청 빛나는 걸 봐선 뿔도 그러길 원하는 것 같고요!”

       

       “커흑….”

       

       기껏 언행을 꾸며냈더니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 천 년 묵은 처녀.

       

       과할 정도로 자신의 경험 없음을 신경 쓰는 그 모습에 순간 팟! 하고 꽂히는 게 있었다.

       

       동정인 걸 신경 쓰는 남자.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자신은 동정이 좋다며 히히 웃는 처녀빗치….

       

       이건 먹힌다!

       

       유니콘의 뿔을 들어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밝게 빛나는 뿔로 이브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괜히 제 손에 유니콘의 뿔이 들어온 게 아닌가 봐요. 저도 처녀가 좋거든요. 아직 동정이라 그런 거려나요?”

       

       “……네?”

       

       진짜?(X)

       결혼하자(O)

       

       “에고고. 부끄럽게 이게 무슨 소리람. 아무튼 이브 씨에게 맡길게요. 제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단검이 좋을 것 같고요.”

       

       처음에는 탐식의 위장도 얻었겠다 먹어볼까 했는데…너무 딱딱해서 씹질 못하겠더라. 크기도 커서 삼키는 것도 불가능했고.

       

       부숴서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야 당연히 해봤지만, 내가 가진 장비와 힘으로는 불가능.

       

       기왕 이렇게 된 거 가공해서 장비로 써먹기로 했다. 일전에 잠깐 빌려 쓴 리디아의 단검 손맛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신체 스펙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무투가로 먹고살 게 아니라면 당연히 장비에도 투자해야지.

       

       “후후…알겠습니다. 그럼 제 쪽에서 일차적인 가공을 마친 뒤에 드워프 공방 연합 쪽에 기별을 넣어보죠. 다행히 그쪽에 연이 있기도 하고, 이만한 재료라면 수고비를 마다하고서라도 다뤄보고 싶다는 장인이 줄을 설 테니까요.”

       

       내가 이만한 인맥이 있다(X)

       결혼하자(O)

       

       “네! 그럼 이브 씨에게 전부 맡길게요! …이런 건 처음이라 어쩐지 긴장되네요.”

       

       “어머? 누구에게나 처음은 특별한 법이니 당연한 일이죠. 이런 건 경험이 풍부한 제게 맡겨주시길.”

       

       믿어다오(X)

       결혼하자(O)

       

       어쩐지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에 악센트가 들어간 게 참 안쓰럽달까 애잔하달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빙그레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브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믿고 맡겨야죠. 저희는 파트너잖아요?”

       

       “파트너…예에. 그렇죠. 저희는 파트너죠.”

       

       내가 엿되면 너도 엿된다(X)

       우린 이미 부부였구나!(O)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브를 향해 슬쩍 머리를 들이밀었다. 마치 조심스런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런 파트너니까 하는 부탁이 있는데요….”

       

       “파트너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이라…흥미롭네요. 뭐든 말씀해 주시길.”

       

       “사실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요.”

       

       “예? 어차피 재료는 요나 씨가 가져왔고, 공방 연합은 아예 돈을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아도 좋다고 할 테니, 제 수고비만 챙겨주시면 됩니다만….”

       

       “그 수고비가 없어요.”

       

       “…바로 어제 2골드를 받아 가지 않으셨나요?”

       

       “그 2골드로 구한 게 이 뿔이에요.”

       

       여전히 이마에 붙여둔 뿔을 툭툭 건드리자 멍하니 나와 뿔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브. 그녀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경우라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곤란하네요 요나 씨. 저도 장사꾼이랍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정말 곤란하다(X)

       몸으로 갚아라(O)

       

       “어떻게 안 될까요…?”

       

       “…본래는 안 됩니다만, 저희는 요나 씨 말대로 파트너. 약간의 배려는 당연히 해드릴 의향이 있답니다.”

       

       “정말요?!”

       

       “예에. 원칙대로라면 무조건 선불로 받아야 하나, 요나 씨라면 후불로 천천히 갚으셔도 괜찮습니다. 마침 어느 관대한 분이 부하 직원의 목숨값으로 현금 대신 상품을 가져간 터라.”

       

       짙은 미소와 함께 내 밑에 깔려있는 레몬과 애플을 바라보는 이브. 그것만으로도 둘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나랑 리디아가 떠난 이후로도 많이 혼났나 보네….

       

       레몬과 애플의 가슴을 번갈아 토닥여 주고는 이브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후불. 그것도 천천히 여러 번에 걸쳐 갚는 것도 좋긴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방법을 제안드리고 싶네요. 예를 들자면…몸으로 갚는다거나?”

       

       “…흐응?”

       

       무슨 개수작이지?(X)

       야스각 떴나?!(O)

       

       어찌나 기대했는지 실눈이 살짝 뜨이며, 눈꺼풀 사이로 가느다랗게 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 그 발가벗겨진 것 감각에 절로 몸이 떨려왔다.

       

       이전처럼 뭔가 음흉한 분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압박감. 아마 진실의 눈을 강하게 사용해서 그런 것이리라.

       

       사멸한 신이 남긴 찌꺼기 권능이 아닌, 진짜배기 권능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똑똑히 입을 열었다.

       

       “1층의 계층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세계수의 권능을 받을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힘을 딱 한 번 이브 씨를 위해 쓸게요.”

       

       “……!”

       

       이건 예상치 못한 걸까. 반쯤 감겨있던 눈이 크게 떠지며 이브의 눈동자가 온전히 드러난다.

       

       에메랄드처럼 투명한 녹색 눈동자. 진실의 눈을 최대 출력으로 발휘하는 건지 이브의 눈은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압박감 수준이 아니다. 그 너머의 거대한 존재가 직접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생전의 세계수가 남긴 작은 가지 하나. 겨우 그 정도일 텐데 이만한 존재감이라니.

       

       신들이 진심으로 싸웠더니, 여파만으로 세상이 멸망했다는 설정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존재가 치고받고 하면 당연히 멸망해야지.

       

       일체의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히죽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귀여운 미소가 아닌, 본래의 내 모습에 가까운 웃음.

       

       “저는 진심이에요.”

       

       “…그래 보이네요.”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요.”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실의 눈을 완전히 개방한 이브가 내 말에 즉답했다. 내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제대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성장한다면 몇 년 뒤에는 계층 수호자를 상대로 최소한의 공적치를 쌓을 스펙이 되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러니 장비에 기대고, 가챠에 기대어 최대한 성장 시간을 단축시킨다.

       

       그렇게 강해진다면…언젠가 이브에게 찾아올 흑화 이벤트를 그대로 엎어버릴 수 있을 터.

       

       도와달라고 하면 엘리와 리디아는 기꺼이 손을 거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 또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이브의 운명을 비극으로 확정 지은 사람이자, 유일한 이해자로서의 책임일 테니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내 손을 마주 잡아 악수를 하는 이브.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이브 씨. 근데 아까 조금 이상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왜. 제가 몸으로 갚겠다고 했을 때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다시 평소의 실눈이 된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손을 빼려 했지만…이대로 도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다.

       

       진실의 눈의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탓에 살짝 쫄았으니, 이 정도는 돌려줘야 수지가 맞겠지.

       

       꽈악.

       

       도망치려는 이브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기다란 엘프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브 누나…나 뿔이 이상해….”

       

       “흐으읏?!”

       

       교태로운 목소리 때문일까, 숨결이 귀에 닿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용이 엄한 상상하기 딱 좋아서 그런 걸까.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움찔거리는 이브의 모습이 참 만족스럽다.

       

       탁.

       

       책상 위에 유니콘의 뿔을 올려놓고는 멍하니 거친 숨만 몰아쉬는 이브를 향해 꾸벅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물건이 완성되면 레몬이나 애플을 시켜서 요정의 은화를 찾아와 주세요. 전 항상 거기에 머무니까요.”

       

       “예? 예에….”

       

       아직도 넋이 나간 이브를 뒤로하고 몰래 육포를 질겅이며 구경 중이던 쌍둥이 엘프를 일으켜 세웠다.

       

       “두 분은 잠깐 저 좀 따라와 보세요.”

       

       너넨 따로 할 일이 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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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남녀역전 세계의 가챠 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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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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