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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리나 교수가 가져온 디저트 중 하나를 막 골라 입에 넣던 중 키르린이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무언가 단단한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이 영 불안하다.

       

       마치 교실 뒷자리에 앉은 찐따가 진지한 눈빛으로 갑자기 손을 드는 것을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교장님. 와서 같이 드시… 어디 가세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키르린이 몸을 홱 돌려 본청 쪽으로 호다닥 달려간다. 저거 진짜 뭔가 일을 벌이려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행여나 쫓겨날까 무서워 실습도 없애버린 사람인데.

       

       키르린에 대한 관심은 끄고 다른 교수들이 다 먹기 전에 서둘러 디저트로 손을 뻗었다.

       

       “야, 오렌디. 그거는 내놔. 아까 내가 찜해 놓은 거야.”

       “아… 이게 제일 맛있는 건데….”

       

       오렌디에게서 갈취한 생크림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마굿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굿간 안에 들어간 백색 일색의 아름다운 우두머리 말이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분명 그때는 망아지였는데 벌써 저렇게 커서 무리를 이끌고 있다니.

       

       저놈은 나와 라이너스의 특임대가 브룬 고원에서 작전을 할 때 인연을 맺었다.

       

       말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니 좀 안 맞는 표현 같은데 어쨌든.

       

       당시에 우리 특임대는 마왕군이 브룬고원의 야생마들을 포획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첩보를 접수하고 그쪽으로 막 기동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마왕군 쪽이 더 빨랐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야생마들은 이미 붙잡혀 끌려가던 상황.

       

       그것을 기습해 모두 전멸시키고 야생마들을 탈출시켰지만 전투 와중에 몇 마리가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저놈도 당시 어미를 잃은 망아지 중 하나.

       

       우리는 바로 고원을 떠나지 않고 마왕군의 후발대를 기다렸는데 그 며칠간 부상당한 야생마와 망아지들을 돌봐 주었다.

       

       사냥꾼이었던 셀린느가 그쪽으로 지식이 있었던 덕이었는데, 덕분에 골골대며 죽어가던 저놈도 기력을 회복해 다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왕군의 후발대까지 모조리 쓸어버린 후 고원을 떠나고 10년이 흐른 후 이번 일로 다시 방문하게 된 것.

       

       원래 나이틀리는 덩치가 작은 야생마 한 마리를 대상으로 길들이기 실습을 시키려고 했는데 마침 저놈이 우두머리로 있는 것을 보고 계획을 변경했다.

       

       사실 그냥 나이틀리를 태웠다간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겠지만 얼마간의 계산된 도박을 했다.

       

       말은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한 동물이며 특히나 브룬 고원 야생마들은 그 정도가 유별나다.

       

        그러니 분명 나를 알아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뛰기를 멈출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만약 못 알아 보고 계속 난동을 부리면?

       

       그때는 내가 직접 나서서 제압하면 된다. 떨어지는 나이틀리야 오렌디가 순간도약으로 대피시키면 그만이고.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책까지 다 준비가 된 상태에서 나이틀리를 투입했고 결과는 내 예상대로.

       

       보통의 야생마는 한도 끝도 없이 난리를 쳤겠지만 내가 옆에서 나란히 달리며 계속 말을 걸자 놈이 나를 기억해냈고 내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순응했다.

       

       이렇게 해서 야생마 무리를 통째로 아카데미로 데려와 실습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브룬 고원의 야생마들은 머리가 아주 좋고 특히나 우두머리가 협조적이니 여러 상황을 가정한 훈련과 실습이 가능할 터.

       

       예를 들자면 한번 길들여진 말이 새로운 기수의 수업 때 마치 처음인 것처럼 날뛰는 ‘연기’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전투승마의 천재라는(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애나 교수가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지.

       

       “그나저나, 음냐음냐, 올해도 역시 건너 뛰려나요.”

       

       내게서 케이크를 빼앗긴 오렌디가 다른 빵 하나를 집어 먹으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어떤 것을 건너 뛴다는 건데?”

       “특기생 선발이요. 원래 운영규정으로는 연초에 선발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특기생은 또 뭐냐?”

       

       연달아 묻자 오렌디가 굉장히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수석교수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운영규정 안 읽어 보셨습니까?”

       “안 읽었지.”

       “예? 읽어 보시는 편이 업무하실 때 편하실 텐데요? 추진하다가 도중에 규정에 걸려서 엎어지고 그러면 곤란하잖습니까.”

       “그거야 규정을 훤히 꿰뚫은 너희가 중간에 짚어주면 되는 거고. 여튼, 특기생이 뭔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오렌디가 낄낄 웃고는 설명했다.

       

       “원래 우리 아카데미는 입학시험을 봐서 1학년부터 시작을 하잖아요? 그런데 특기생은 시험을 보지 않고 바로 최고학년, 그러니까 올해로 따지자면 졸업반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 그 특기생이라는 게 말 그대로 실력이 월등한 사람을 말하는 건가? 굳이 정규과정을 차례로 밟지 않아도 될 만큼?”

       “맞습니다. 이미 몇몇 아카데미에서는 시행을 하고 있는 제도지요.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는 게 아카데미의 최우선 과제잖아요. 밑바닥부터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아카데미 출신인 거니까요.”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 아카데미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걸 안 했다는 거지?”

       “네.”

       

       이것도 모두 행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터져 교장에서 해임될까 두려워한 키르린의 짓이로군.

       

       “그래서 그 특기생은 몇 명이나 뽑는 건데?”

       “최대 다섯 명인데 지원자의 질적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아카데미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모두 탈락시킬 수도 있어요.”

       

       이거 나쁘지 않은 제도인데?

       

       “그거 언제 하는 거냐?”

       “지금 즈음에는 선발 공고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달 안에 최종선발해서 졸업반 정식 커리큘럼에 참여를 하지요.”

       

       오렌디가 키르린이 사라진 본청 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올해도 그냥 넘어가려나 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건 하는 게 맞다. 운영규정도 운영규정이지만 외부의 좋은 자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당연히 해야지.

       

       오렌디 말마따나 어쨌든 졸업장만 있으면 아카데미 출신.

       

       어디서든 훌륭한 놈 하나 잡아와서 졸업시키면 결국 우리 아카데미 위신을 세우는 일이다.

       

       졸업생의 질을 높여 아카데미의 위신을 세우면 2황녀님께서 매우 좋아하실 것이고 ‘디안을 굳이 교장으로 올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군’이라고 생각하시겠지.

       

       일단 여기 정리하고 오늘 남은 일과 마무리한 후에 내일 키르린에게 정식으로 건의를 해보자.

       

       

       # # # # #

       

       

       다음날 아침.

       

       “교수님!”

       

       막 교직원 구역을 나와 본청으로 가는데 누군가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저쪽에 뭔가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의 나이틀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뭐야, 이 시간에? 수업 안 들어가냐?”

       “아직 1교시 전이에요.”

       “아, 그래. 그럼 얼른 가서 수업준비해라. 나는 바빠서 이만.”

       “잠깐만요!”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나이틀리가 꽥 소리치면서 나를 향해 달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나이틀리는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좌우로 어기적어기적하며 바들바들 다가왔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입술을 꽈악 깨물며 나이틀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이틀리의 속도가 너무도 느려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미안한데 나 지금 교장님 만나러 가야 해서. 당장 말 안 하면 죽는 이야기 아니면 이따가 하자!”

       

       나이틀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 할일이 많아서 수업 전에 키르린에게 그 ‘특기생 선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라.

       

       “교수님! 으아악! 진짜!”

       

       나이틀리의 괴성을 뒤로 하며 서둘러 본청으로 간 나는 행정실장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예? 황성에 가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수석 교수님. 현안업무 보고차입니다.”

       “흐음, 그래요…,”

       

       이 다크엘프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2황녀 이야기만 나와도 발발 떨던 주제에.

       

       문득 나는 어제 마굿간에서 만났던 키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뭔가 엄청나게 결연한 표정이었지.

       

       보통 찐따가 큰 결심을 하면 급발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괜히 가서 말도 안 되는 짓하다가 구박만 받고 쫓겨오는 거 아냐?

       

       

       # # # # #

       

       

       “후우… 미치겠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창밖으로 황성의 성벽이 보이자 키르린이 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화려한 금장의 결재판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2황녀에게 보고할 현안업무 보고서다.

       

       키르린이 갑작스럽게 황성행을 결정한 것은 모두 어제 디안을 보며 한 결심 때문.

       

       원활하게 디안에게 교장직을 넘기고 교수로 내려가려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업적을 쌓아야만 한다는 바로 그 계획 때문이었다.

       

       그래서 키르린은 보고서를 만드는 한편 황성에 오늘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넣었고 다행히도 2황녀께서는 수락해 주셨다.

       

       “그러니까… 이번 특기생 선발이랑… 에, 또… 졸업반 공모전 일정이랑… 으음, 또 뭐였더라…. 채용 관련기관 사전면접이랑….”

       

       2황녀에게 보고할 것들을 되뇌는 사이 마차는 어느덧 본성 앞에 멈춰섰다.

       

       “어서 오십시오, 키르린 교장님.”

       

       마중나온 사용인이 키르린을 안내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으며 키르린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셔츠의 목깃을 잡아당겼지만 소용 없었다.

       

       가슴을 옥죄는 두려움은 겨우 숨 몇 번 깊게 들이쉬는 것으로 사라질 게 아니니까.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디안에게 같이 와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디안과 함께라면 조금은 더 나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디안은 전투학과를 이끄느라 바빠. 여기 데려오는 건 디안에게 민폐야.

       

       그리고 나는 교장이잖아. 내 위치에 맞게 행동해야만 해.

       

       디안 뒤에 숨는 것처럼 보이면 교장 자격도 없다고 2황녀님에게 또 괜한 꼬투리만 잡히게 된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키르린은 마치 사형장으로 이어지는 듯한 복도를 걸어가 2황녀의 집무실 앞에 섰다.

       

       “먼저 몸에 지닌 것들을 다 반납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키르린은 몸 여기저기에 숨긴 온갖 크기의 비수와 독침과 올가미 등을 와르르 쏟아낸 후에야 주저주저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키, 키키키, 키르린 네마라입니다…. 드, 드, 드드, 들어가도 되는 것인지 여, 여쭤봐도 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인지를….”

       “들어와.”

       

       안쪽에서 2황녀의 대답이 들려오자 키르린은 피가 식는 기분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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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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