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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녹아들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일본 전역에 깔려있을 감시의 눈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사각지대는 어디인가?

         

       그 해답은 무엇일까?

         

       ‘모습을 숨기는 것은 하책이요, 변장하는 것은 중책이다.’

         

       진성은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현대에도 계급의 잔재가 남아있는 나라다.

         

       명확하고 넘어가기 힘든 계급의 벽.

         

       이는 민주주의로 제대로 전환을 못 한 나라가 바로 그러한데, 대표적인 나라로 영국과 일본이 있다. 영국은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교육을 벽으로 삼아 제각기 계층과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본은 성씨로서 계급의 한계를 규정지으며 천장을 만들어 계층과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정치인.

       일본은 무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을 대대로 세습을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성씨가, 그들이 지역에서 쌓아온 권력이 사람들에게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인식하게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오랜 시간 동안 강자에게 굴종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다. 그 때문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굴복하고, 그 권력을 지탱하는 발판과 기둥이 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참으로 괴이한 나라로다.’

         

       그렇게 고착된 계급은 힘의 우위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과거 무사 계급이 힘을 아무리 기르고 군사를 아무리 모아도 공가와 일왕의 권위에 쉽게 도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미 굳어진 계급은 또 하나의 권력이자 무형의 힘이 되어버린다.

         

       현대에 이르러 계급은 사라지고 일왕은 살아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며, 계급을 고착시키는 또 다른 원인이었던 이능은 정보화 시대에 맞춰 사람들에게 풀렸다.

       하지만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계급은 남았다.

         

       식당을 하던 사람은 그것을 물려받아야 한다.

       무인은 대를 이어서 무공을 발전시켜야 한다.

       장인은 그 기술을 후계자에게 전달해주어야 한다.

         

       대를 잇는 기술의 계승.

       가업(家業).

         

       권력자들은 가업이라는 이름으로 평범한 사람의 계급 상승을 막았고, 장인 정신이라는 이름의 포장 아래 무지렁이들이 그대로 자신의 도구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허상은 너무나도 쉽게 일본인에게 침투해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다.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를 자연스레 자식에게 물려준다.

       이는 상식이다.

         

       교수는 자신의 자식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다.

       이는 상식이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가문 자체가 뛰어나야 한다.

       이는 상식이다.

         

       그리하여 지금 계급은 자연스레 굳어졌고, 일본인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진성이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계급의 힘이었다.

         

       권위로 찍어누르고.

       권력으로 의문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얼마나 좋은가?

         

       몸을 감추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들키지 않기 위해 본인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권력을 얻으면 다른 사람이 노력한다.

       운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넘어 아예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또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급의 힘을 얻을 것인가?

         

       ‘마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느니.’

         

       오직 마음.

       마음만이 그 해답이 되리라.

         

       마음을 다해 부탁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면 어찌 이루지 못할 일이 있으랴?

         

       “ॐ-”

         

         

         

        * * *

         

         

         

       신사는 고요하다.

       그 고요함이란 절의 고요함과는 사뭇 달라, 신령의 품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안락함이 존재하는 고요함이다. 그 고요함이란 얼핏 양수 속에 잠겨 있던 태아의 기억을 자극하는 느낌이 있어 날짐승도 내려앉는다 할지라도 함부로 울지 못하며, 참배객들이 온다고 한들 얌전히 참배만을 하고 가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하지만 리세에게 있어 이 고요함이라는 것은 정말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하아….”

         

       사이고 리세(西郷 利世)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손님 하나 없는 신사도.

       괜히 쓸데없이 높아서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진이 빠지게 만드는 계단도.

       가업을 이어야 한다. 잔소리하는 아버지도.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무녀복까지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짐을 놓고 계단에 걸터앉았다.

         

       ‘나를 옥죄는 목줄 같아.’

         

       레일에 깔린 인생.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여겼다.

         

       신사에 태어나서, 무녀로서 교육을 받고, 신령을 평생 모셔야 하는 인생.

         

       그나마 신관(神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의욕이 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무녀는 신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관은 신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의 몫이 아닌, 데릴사위로 들여오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차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긋지긋해….’

         

       하지만 그녀는 무녀라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면서도 쉬이 벗어던지려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목줄은 분명 그녀의 인생을 조이는 하나의 족쇄였지만, 동시에 목줄에 달린 이름표는 그녀를 외압에서 멀쩡하게 만드는 보호막이 되어주었으니까.

         

       당장 그녀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신사가 가지고 있는 재력 때문이며, 그녀가 지역에서 좋은 취급을 받는 것은 신사의 위세 때문이며, 그녀가 일본 어디를 가던 대접을 받는 것은 그녀가 이름 있는 신사의 무녀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던지면 그녀에겐 무엇이 남는가?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 아이리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다. 마히로처럼 끼가 넘쳐서 연예계쪽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오리처럼 무공에 재능이 있지도 않았고, 레나처럼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없다.

       오직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신사의 딸이라는 것, 무녀라는 것뿐이다. 그것을 벗어던지면 그녀는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국민, 아니…. 그 국민만 못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리라.

         

       ‘일탈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랬기에 그녀는 평생 선로가 정해진 레일을 따라 진행될 그녀의 인생에서 있을 추억이 필요했다. 순결을 유지해야 하기에 불장난은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책이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풋풋한 사랑 정도는 해보고 싶었다.

         

       ‘그 불한당만 아니면….’

         

       하지만 그 사소한 바램은 시작부터 틀어져 버렸다.

       큰마음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찾아간 시내에서 웬 불한당에게 걸려든 것이다.

       무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사뭇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꾀려고 했고, 분위기를 잡아 그녀를 호텔로 유도하려 했다. 그녀가 거절해도 못 들었다는 듯 너무나 끈질기게 쫓아오고, 숫제 스토커나 다름이 없는 구애는 날이 어둑해지고 그녀가 신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무인이 너무 끈질겼던 것도 있지만, 날이 어둑해지자 잘되었다는 듯 점점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다만 일을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체만 밝혀서 조용히 무인을 물러나게 할 생각이었지만….

       무인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훨씬, 훨씬 멍청하고 바보 같았다.

       그녀가 내뿜는 신력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으며, 그녀가 밝힌 정체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녀의 아버지는 대노(大怒)했다. 그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무인의 유파인 야태도아랑류(野太刀餓狼流)에 강력한 항의와 함께 그 무인에게 처벌하기를 종용했다.

       지역의 유지이자 역사 깊은 신사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권력 덕분에 그 복수는 손쉽게 이루어졌고, 리세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무인은 도망치듯 지역을 떠나 한국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일탈을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어디 외출을 하게 되면 반드시 호위가 뒤따랐으며,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들을 해보려고 하면 품위를 해친다며 만류 당했다. 그나마 그녀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취미였던 드라마 감상, 영화 감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뿐.

         

       “후우우….”

         

       그녀는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목줄의 존재를 다시 느끼며 일어섰다.

         

       그녀를 옥죄는 목줄.

       하지만 벗을 수 없는 목줄.

       어쩌면 평생….

         

       “아냐.”

         

       그녀는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생각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떨쳐내었다. 그리곤 다시 높디높은 계단을 따라 신사로 향했다. 다행히 한 번 쉬었던 덕분인지 그다지 힘들지 않게 올라가 빨간색으로 칠한 토리이를 지나칠 수 있었다.

         

       속세와 신토(神土)를 구분하는 경계를 지나치자 평소와 같이 잔잔한 신력이 그녀를 맞이해….

         

       “에?”

         

       맞이해주지 않았다.

         

       토리이를 넘어서면 느껴져야 할 신력이, 그녀의 존재를 환영해주듯 흐르며 그녀의 활력을 북돋아 줘야 할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신령님이 주무시나?’

         

       리세는 의아해하면서 평소와 같이 참도(參道)를 걸어 본전(本殿)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마을에서 구해온 공물을 신체에 올리기 위함이었다.

         

       “여기 무녀이신가요?”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이상한 남자를 보았다.

         

       “네?”

         

       그녀와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나는 커다란 남자였다. 하지만 큰 키에 비해 몸은 호리호리했고, 잘 차려입은 양복은 마치 피부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남자의 몸에 맞춰져 있었다.

         

       리세는 어쩐지 그 남자가 토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관님이 여기서 뭐 할 게 있다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무녀님께 전해달라 하셔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신에 무녀님은 신창(神倉)에서 에마(絵馬) 정리를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토끼를 닮은 남자는 정중히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의식을 하시나?’

         

       그녀는 남자의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 신령을 화나게 하는 경우 아버지가 들어가 신령을 진정시키는 의식을 하는 것은 종종 있었다. 토리이를 넘었을 때 신력의 느낌이 이상했던 것도 신령이 무언가 화가 나거나 삐지는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라 납득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혹시 그 말을 전해주시려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 부담 갖지 마세요. 오래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게 너무 죄송한데….”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나마 신사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죠.”

         

       리세는 남자에게 관심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일탈을 원하는 그녀의 바람에서 비롯된, 무언가 항상 보던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남자에게서 끌려서 생긴 관심일지 모른다. 특히나 토끼를 닮은 남자의 인상이 잠깐 일탈을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늦게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인상이.

       토끼를 닮은 무해한 얼굴이.

       정중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안전하다 소리치는 듯한 그 분위기가.

         

       그녀의 판단을 늦췄다.

         

       “신창?”

         

       사이고 리세는 남자에게 등을 보이고 몇 걸음을 걸어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려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무해해보이는 얼굴로 아까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남자에게 물었다.

         

       “신관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고요?”

       “신창에서 에마 정리를 좀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리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신관으로서의 모범과 같은 사람이었고, ‘이름에는 힘이 실린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친구를 별명으로 부르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신창에서 에마 정리를 해달라고 했다고?

         

       “…우리 신사는, 에마를 에마전(絵馬殿)에서 보관하는데요?”

       “아, 그러신가요? 저는 그냥 들은 대로 전달한 거라….”

         

       남자는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리세는 그 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는데요?”

         

       이름을 함부로 붙이고 말하는 것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닌, 신사의 건물을 다른 이름으로 말했을 리가 없다.

         

       리세는 남자를 경계하듯 뒷걸음질 치며 신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신력은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지 요지부동이었고, 그녀는 크게 당황하며 본전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무엇이 제대로 되지 않느냐?”

         

       리세의 눈에 비친 남자는 여전히 토끼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무해해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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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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