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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0

    하늘을 가득 채운 색채 우주 그리고 나타난 보라색 외신.

    이것으로 총 3번째로 만나는 외신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외신은 징그럽게 생겼네.’

    처음 만났던 붉은 외신도 상당히 끔찍하긴 했지만, 이번 녀석은 정말 끔찍하게 생겼다.

    수십, 수백 개가 달린 팔과 얇고 뭔가 지저분해 보이는 피막.

    이제까지 인간 형상을 취하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다들 푸른 외신처럼 깔끔하게 생겼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나는 그 징그러운 녀석을 올려다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니 사신 정원 사용 불가능.

    불변구 소환 불가능.

    주변에 예린이 없음.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헤일로는 소환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나는 내 손에 들린 3개의 헤일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물론 인간 시절의 습관대로 한숨을 쉬어봐야, 숨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후퇴를 한 다음 불변구를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은데….

    미니 사신 정원을 쓰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지구 전역은 아닐 테니 말이다.

    외신의 힘을 생각하면 잠깐 사이에 서울의 장작이 모두 죽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우선 거리를 벌리는 쪽이 확실히 논리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래도 우선은 싸워봐야겠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면, 황금 사신이 ‘때찌’ 할 테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우선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를 뒤집어썼다.

    ***

    송파구 외곽에 위치한 세희 연구소.

    협회 인형 사태가 발발하자, 소수의 황금 사신이 교대로 튀어나와서 순찰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곳에 조금 생소한 빛을 띠는 인형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철컥.

    그 인형은 저가형 인형에게서 흔히 나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가 특별히 크지도 않고 움직임이 빠르지도 않았지만, 보라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그 모습은 어딘가 특별해 보였다.

    ‘!’

    평소의 황금 사신이라면 당장 튀어 나가 인형의 몸통에 황금 사신 모양의 구멍을 뚫어버렸겠지만, 지금은 비상사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다.

    이럴 때는 광선검을 가진 용사들이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용사들은 자리에 없었다.

    몇몇은 애착 인간을 찾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고, 몇몇은 이미 서울 전역으로 흩어져서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 한 용감한 황금 사신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다른 황금 사신들과 시선을 맞추더니, 보라 인형에게 달려들어 박치기를 시도했다.

    유령화-겹치기를 이용한 위력적인 공격!

    그러자 보라색 인형도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황금 사신 모양의 구멍이 뚫리며 무력하게 쓰러져 버렸다.

    ‘!!!’

    하지만 황금 사신들은 흠칫 놀라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리 면역을 가진 황금 사신도 겹치기에 쌍 소멸해 버렸으니까.

    ‘큰일 났어!’

    ‘어떡하지?’

    황금 사신들은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보라 인형은 심장에 뚫린 상처를 천천히 재생하기 시작했지만, 미니 사신 정원이 막혀 버린 황금 사신들은 더 이상 보충될 수 없었으니까.

    황금 사신들은 싸우는 데 걸리적거리는 투구와 창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고통스럽게 신체 일부를 조금씩 희생해서라도 인형을 틀어막겠다는 각오에 찬 눈빛이었다.

    ‘엄마, 빨리 이겨야 해!’

    황금 사신들은 거대한 보라 괴물이 나타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그마한 염원을 엄마에게 보냈다.

    ***

    달은 없지만 아름다운 별빛이 가득한 하늘.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감촉의 잔디.

    간식은 하나도 없지만, 이상하게 황금 사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풍경이었다.

    ‘!’

    그런 풍경 속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황금 사신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보라 인형과 쌍 소멸한 황금 사신이 미니 사신 발할라에서 눈을 뜬 것이다.

    ‘빨리 돌아가야 해!’

    미니 사신 정원과 세희 연구소의 연결이 끊어졌더라도,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발할라와 미니 사신 정원을 잇는 문을 넘어가자, 드넓은 마시멜로 평원이 보였다.

    마시멜로 평원을 통해서 미니 사신 정원 얕은 곳으로 나오자, 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한때 안뜰과 연결됐었던 미니 사신 정원 얕은 곳에는 황금 사신과 동생들이 잔뜩 모여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앙대!’

    ‘인간이 위험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애착 인간을 찾아다니던 보라 동생들이었다.

    보라 동생들은 불안함을 잊기 위해서인지, 서로 끊임없이 투닥투닥거리고 있었다.

    그 밖에도 전 세계로 흩어져서 애착 인간을 찾기 위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황금 사신과 동생들로 가득했다.

    열리지 않는 허공을 두들기며, 포롱포롱 눈물을 흘리는 미니 사신들.

    방금 죽었다 살아난 황금 사신도 그 옆에 우울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세희 연구소가 위험해. 엄마의 애착 인간도 위험해.’

    히잉.

    하지만 미니 사신들은 그저 하염없이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서울의 어느 한적한 도로는 평소와 달리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도로를 밝혀주던 가로등은 이리저리 처참히 꺾이고 부서져, 오직 달빛만이 그 어둠을 은은하게 밝혀주었다.

    그 어둠 속에서 청과 이탈리아 남매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한국에 꽤 오래전에 입국했었다.

    세희 연구소와 미니 사신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관광객 기분으로 부산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다 보니, 서울에 도착한 지 겨우 6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은 도시마다 특색이 강했기에, 흥미로운 것들을 살펴보는 것만 해도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도시마다 신기한 오브젝트 관련 제도가 즐비했고, 해로운 오브젝트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야말로 위험하지만, 구경거리도 많은 여정!

    청 일행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라면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 국가의 연합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각각인 도시들이었다.

    아마 이렇게 된 데에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오브젝트 협회의 지분이 상당해 보였다.

    “아직도 더 가야 해?”

    이탈리아 남매 중 여동생이 자기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보라 안대 사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보라 안대 사신은 아직 멀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어째서 계속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걸까?’

    청은 가장 앞에서 일행을 인도하고 있는 보라 안대 사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잔뜩 다치고 죽어가고 있을 텐데, 보라 안대 사신의 인도는 계속 서울 외곽을 향하고 있었다.

    지나가다 조우한 인형들을 해치우거나 인간을 구해주기는 했어도, 구조 활동에 큰 시간을 들이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서울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장난이 심하긴 해도, 인간을 구하고 아끼는 아이니까….’

    청은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품 안에 안긴 왕관 주황 사신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폴짝.

    그리고 어느 순간, 보라 안대 사신이 살짝 뛰어서 바닥 위에 내려섰다.

    스르르륵.

    뭔가 바닥을 약하게 쓸어내는 소리와 함께, 보라 사신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끝없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평평한 바닥을 채운 그림자 위로 그림자로 만들어진 막대가 솟아올랐다.

    길쭉한 막대기가 완성되자, 그 위로 가지가 4개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커다란 바람개비.

    “바람개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형상의 바람개비였다.

    “오빠, 이거 이탈리아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그 바람개비의 형상은 ‘황금 사신 만남의 광장’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 작은 바람개비 하나를 만드는 일이 상당히 힘들었는지, 보라 안대 사신은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보라 안대 사신 옆으로 주황 왕관 사신이 내려앉더니, 허공에 손을 뻗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염력으로 바람개비를 돌리려는 것처럼.

    그러자 바람개비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빙글.

    빙글빙글.

    빙글빙글빙글.

    그렇게 천천히 돌던 바람개비가 일정 속도에 도달하자, 달콤한 향기가 주변으로 확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볼록.

    그 순간,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그림자 표면에 황금색 더듬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더듬이는 점점 표면 위로 올라오더니, 그 밑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황금 사신의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튀어나온 황금 사신은 ‘여기가 어디지?’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기가 서울인 것을 깨닫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잠수해 들어가 버렸다.

    볼록볼록볼록.

    황금 사신이 사라진 지 수 초 뒤, 매끈한 그림자 표면 위로 잔디처럼 수많은 황금 더듬이가 튀어나왔다.

    ‘돌격!’

    ‘돌격!’

    그리고 의욕이 넘치는 의지와 함께 황금 사신들과 미니 사신들이 잔뜩 바닥에서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황금의 파도처럼 서울로 몰려가는 황금 사신들.

    광선검을 들고 빠른 속도로 뛰어나가는 용사 황금 사신들.

    꾸물꾸물 모여서 거대하게 변신한 검은 사신들.

    바람개비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서, 바람개비를 보강하는 보라 사신들.

    서울에서 고군분투하던 미니 사신의 몇 배나 되는 미니 사신의 대군이 서울을 향해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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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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