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91

    보라색으로 물든 우주 아래.

    세상이 점점 뒤틀려 가고 있었다.

    법칙이 뒤틀리면서, 공기가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기는 벌레가 내뿜는 고치, 혹은 거미줄 같은 것처럼 변해버렸다.

    물리 면역에 가볍고 질기면서, 끈적끈적한 기분 나쁜 실이 허공을 마구 날아다녔다.

    그 실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건물 같은 구조물에 달라붙어 고치처럼 둘러싸기 시작했다.

    오브젝트가 아닌 숨을 쉬는 모든 생물에게 극도로 해로운 뒤틀림이었다.

    공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폐에 들어가면 끝장날 것 같은 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다니.

    게다가 지면은 점점 거울처럼 투명한 무언가로 변해갔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하늘을 그대로 투영하는 늪이었다.

    나는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를 쓰고 보라색 외신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보라색 외신.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도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까지는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 때문에 뒤틀림이 하얗게 타오르며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세계의 뒤틀림이 심해져서 예린이가 있는 곳까지 뒤틀림이 번질 것이다.

    나는 양손을 뻗어서 공간을 꽉 움켜쥐었다.

    뀩.

    공간이 우그러들면서 커다란 검은색 구체가 생겨났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분쇄해 버리는 능력이었지만, 외신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딘가 괴리된 것 같은 느낌.

    저 외신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래서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도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헤일로의 범위가 전 우주는 아니니까.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 제한적으로 효과 있음.

    완전 회피의 헤일로, 공격도 하지 않는 적에게 쓸모가 없음.

    환상 구현화의 헤일로, 환각으로 뭔가를 만들어도 외신 정도 되는 상대에게는 의미가 없음.

    죽음을 보는 헤일로,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꺼낼 수가 없음.

    답이 없네.

    ***

    늦은 밤, 어두운 밤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난도질 된 것처럼 찢어지면서 드러난 불길한 밤하늘이었다.

    그 생소한 하늘에는 평소에 보기 힘든 형형색색의 별들이 박혀 있었고, 보라색 실타래 같은 것들이 별과 별 사이를 채웠다.

    그렇게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은 평범한 밤하늘과 달리 자체적으로 빛을 내며 지상을 밝히고 있었다.

    양손이 거칠게 뜯겨나간 상처에서 장작을 뚝뚝 흘리는 황금 사신이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뒤를 돌아서 작게 웃었다.

    ‘힘내.’

    자신은 여기까지라며, 미안한 감정을 담은 미소를 마지막 남은 황금 사신에게 남기고 천천히 가루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황금 사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성냥불만큼 조그마한 황금 불씨만이 남아있었다.

    마치 죽어서라도 세희 연구소를 지키겠다는 것처럼,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세희 연구소 주변에는 그런 황금색 불씨가 잔뜩 남아있었다.

    황금 사신들은 원래 세희 연구소를 크게 빙 둘러서 전선을 형성했었지만, 어느새 주차장을 지나서 세희 연구소 본 건물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튼튼한 세희 연구소의 외벽에 기대서 좁은 입구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황금 사신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보라색으로 물든 협회 인형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게다가 녹슬고 망가진 것처럼 보였던 보라 인형들은 점점 정상적인 인형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며 좀비처럼 움직이던 물리 면역 인형들은 이제 인간처럼 빠르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남은 황금 사신은 겨우 하나.

    1분도 버틸 수 없을 만큼 적은 숫자였다.

    ‘괜찮아. 엄마가 곧 이길 거야.’

    굳은 의지를 다지며 앞으로 나서는 황금 사신의 앞으로 거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보라색으로 물든 여파 때문인지, 녹슬고 뒤틀렸지만.

    그 크기만은 건재한 건설용 협회 인형이 보라색으로 물든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황금 사신의 몸을 통째로 집어넣어도 멈출 수 있을지 불확실할 정도로 거대한 인형이었다.

    또르르.

    마지막 남은 황금 사신의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무거웠다.

    스러져 간 황금 사신들의 기대가.

    서러웠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인간들을 지킬 힘이 없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검의 재능이 있었다면.

    광선검이 있었다면.

    인간들을 지킬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마지막 남은 황금 사신에게는 검의 재능이 없었다.

    아마 가장 재능이 없는 황금 사신이 자신일 것이다.

    그 수준은 거의 ‘엄마급’!

    하지만 그래도 황금 사신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끝없이 염원했다.

    제1 검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런 힘은 뭔가가 부서진 미니 사신만이 가질 수 있으니까 없는 편이 좋아.’

    하지만 황금 사신은 계속 염원했다.

    황금 사신 제1 검처럼 무기를 만들 수 있기를.

    검에 재능이 없는 자신이라도.

    잠시라도 괜찮으니까.

    단 10분이라도 괜찮으니까.

    대신 영원히 죽어버려도 괜찮으니까.

    이 두 손에 제1 검의 무형검이 내려오기를!

    그 순간, 황금 사신의 심장에서 무언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지만 부족했다.

    재능 없는 황금 사신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만으로는 제1 검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었다.

    ‘안 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온몸이 갈라지고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변에 남아있는 황금 사신의 불씨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세희 연구소를 지키겠다는 염원들이 황금 사신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온몸이 엉망진창으로 부스러졌다.

    아프다.

    너무 아팠다.

    하지만 황금 사신은 환하게 웃었다.

    염원하던 무기를 얻었으니까.

    모두의 염원이 황금 사신을 이끌어 주고 있었다.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염원의 불꽃이 갑옷처럼 전신을 감싸고 타오르고 있었다.

    제1 검의 무형검처럼 닿는 것만으로도 물리 면역을 파괴하는 불꽃의 갑주였다.

    황금 갑옷 사신은 마치 혜성처럼 날아올라, 인형들의 심장을 꿰뚫기 시작했다.

    ***

    나는 보라색 외신을 바라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예린이가 위험해질 거야.’

    당연히 나는 지금 당장 예린이랑 도망간 다음, 불변구를 가져오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가 뒤로 빠지면 미니 사신들이 화낼 것 같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능력 무효화의 헤일로가 저 ‘실’들을 열심히 태우고 있는데도 이 정도인데, 태우지 않는다면 1분 안에 서울 전체가 고치가 되어버리고 장작들도 모두 죽어버리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미니 사신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미니 사신 정원이 열린 건지, 미니 사신들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잔뜩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협회 인형을 부수는 미니 사신들.

    서울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해로운 ‘실’을 하나하나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미니 사신들.

    하지만 정원과 현실을 잇는 연결의 격이 떨어져서 불변구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역시 도망갈 수밖에 없나.’

    그 순간 미니 사신들이 내 옆으로 와서 응원하기 시작했다.

    ‘엄마 힘내!’

    ‘엄마는 할 수 있어!’

    불리한 상황인데도,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니 차마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래, 오랜만에 ‘생각’을 하자.

    어둡고 춥고 막막한 서울숲에서처럼.

    물리 면역도 없고, 유령화도 없었을 때처럼.

    그때처럼 내 최초의 무기이자, 최강의 무기. 

    ‘눈’을 사용했다.

    <■■를 ■■ ■■가 ■■■■ ■에, ■을 ■■다.>

    외신이라서 그런지, 조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천천히 관찰하자,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조금 흐릿해 보이는 게, 보라 외신의 격이 완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외신과 달리 조건도 꽤 보이고 있었다.

    붉은 핏덩이 속에서 ‘새로 태어난’ 외신인 게 아닐까?

    그 순간, ‘눈’에 보이는 파괴 조건이 조금 명확해졌다.

    <■■를 ■■ ■■가 완성되기 전에, ■을 ■■다.>

    그리고 저 외신은 붉은 외신이나 푸른 외신과 달리 ‘이 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존재할 뿐.

    게다가 뭔가가 저 외신의 몸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어쩌면 저 외신은 ‘붉은 외신’이 지구로 집어 던진 게 아닐까?

    내가 추리를 완성하는 순간, 내 인지가 조금 넓어지며 조건이 명확해졌다.

    <■■를 ■■ ■■가 완성되기 전에, 닻을 부순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의지를 담아 크게 뿜어내었다.

    서울 전역에 있는 미니 사신들에게 들리도록.

    ‘수상해 보이는 모든 오브젝트를 부숴!’

    ‘!’

    그 소리를 들은 내 주변의 미니 사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도움이 필요해!’

    ‘빨리 움직여!’

    그 순간, 보라색 외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사고도 못 하는 해로운 덩어리 같은 존재였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천천히 그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두 번째 페이즈라 이거지.

    미니 사신이 닻을 부술 때까지, 검은 시체 없이 외신을 붙잡는 미션이네.

    나는 거대한 외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애써 웃었다.

    다음화 보기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