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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3

       이링 지역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50만에 달하는 군세가 겹겹이 포위되었다. 돌파구라고 할 만한 곳은 없었다. 어딜 둘러보더라도 버섯구름이 올라오고 있다.

       

       “이게, 대체.”

       

       병사들은 세 마디 이상을 내뱉지 못했다.

       

       그들의 몸이 조영제를 마신 것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막대한 양의 X선이 몸을 뚫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테두리에 있던 병사들은 즉사했고, 나머지도 3도 이상의 격한 화상을 입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아귀가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젠장….”

       

       그나마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가 두 발 딛고 서 있었지만,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정령이라고는 해도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방사선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벌써 영체가 무너지는 중이었다.

       

       ‘시큐엘, 네 말을 듣는 거였는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어서 2차 폭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벌어졌다.

       

       “……!!”

       

       그 위치는 바로, 이프리트 자신이 있는 곳이었다.

       

       산화한 잿가루가 하늘로 올라서며 대미를 장식했다.

       

       

       **

       

       

       모든 폭발이 끝나고 난 뒤.

       

       유리화된 들판을 밟을 때마다 거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식은 땅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것은 마왕이었다. 그는 황폐해진 초원을 공원 산보하듯 유유히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하나.

       

       화계마도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사체였다.

       

       “질긴 놈.”

       

       틀림없이 죽긴 죽었다. 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른 병사와는 달리, 화산재에 묻힌 것처럼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네놈을 죽이기 위해 발아래에 스물하고도 다섯 발을 묻었다.”

       

       요르문간드에게 무리를 시켜서라도 1백 발의 포탄을 만들어냈다.

       

       이프리트를 쓰러뜨리는 데 25발. 주위를 포위하는 데 또다시 25발. 해당 포위망을 좁히기 위해 사용한 것이 또 50발.

       

       그만한 수의 재앙이 이링 초원을 꺼멓게 물들인 것이다.

       

       “이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마왕은 이프리트의 사체를 지그시 밟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봐, 이프리트.”

       

       마왕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틀어진다.

       

       “무엇이 그리 성급했나?”

       

       지난날의 기억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린다. 이제는 술 한 잔에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 미화된 추억.

       

       그 기억 속에서, 마왕은 이프리트에게 밟혀있었다. 봉인석에 갇히기 직전의 기억이었다.

       

       “짐이 그때 이야기했잖나, 삶이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라는 것을….”

       

       마왕은 1천 년을 기다렸다.

       

       정령계를 더 큰 화마에 휩싸이게 할 역량과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여신의 로드스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당시 정령왕들을 잡아 죽일 능력은 있었어도, 여신까지 쓰러뜨릴 기량은 없었다고 판단했기에.

       

       그 때문에 영겁과도 같은 세월을 견뎠다.

       

       “애통하구나.”

       

       제아무리 강한 존재일지라도, 이 흑주인가 뭔가 하는 무기 앞에선 결국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정령왕이 죽은 걸 확인하자 마왕은 더는 상천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고유마도이다.

       

       “그러게 짐처럼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런가?”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마왕은 더는 말하는 데 아가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양손을 들어 하나는 턱에, 다른 하나는 입천장에 가져갔다.

       

       그대로 기괴하게 팔을 꺾어 입을 둔각으로 벌린다. 무(無) 그 자체였던 면상 위로 심연이 떠오른다.

       

       촉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빨.

       

       사람이나 동물의 입이라기보다는, 유기체로 된 거대한 점막 같은 모양새였다.

       

       마치 칠성상어의 구강구조처럼 돌기가 난 입천장을 마구 돌리며 정령왕을 흡수하기 시작한 마왕이 용트림을 반복했다.

       

       코끼리를 삼키는 보아뱀처럼 느긋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이프리트를 먹어 치운다.

       

       “끄으으윽.”

       

       세 시간에 달했던 식사가 끝나고. 

       

       이링 초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

       

       

       레니냐의 집에 더부살이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문을 두들겼다. 얼마 전에는 국회의장이 다녀갔고, 바로 어제만 해도 행정부장관이 면회를 요구했다.

       

       물론 심신 미약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

       

       빵과 스프를 내 온 레니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로 나갈 생각이 없으신가요?”

       “몇 번이나 얘기했잖니. 몸이 피로해서, 더는 연구할 수 없다고.”

       

       나는 픽 한숨을 쉬며 그녀가 준 보리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노예로 구르던 시절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식사였다.

       

       “오늘도 캘리그라피를 하시네요. 그게 그렇게 심신 안정에 좋아요?”

       “좋다마다.”

       “그런 것치고는 하루에 종이를 수십 장씩 쓰시는걸요.”

       “……하도 불안해서 그래.”

       

       레니냐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말. 사실은 연구하고 계시잖아요.”

       “…….”

       “그거 봐요. 선생님은 거짓말을 못 해요.”

       “아닌데? 연구 아닌데?”

       

       똑똑.

       

       “저거 봐요. 선생님이 안 만나주시니까 또 왔잖아요.”

       

       질리지도 않고 오는구나.

       

       “돌려보내.”

       

       아직 때가 이르다.

       

       저들과 금안족의 입장이 동등해지려면 행정부 수반 정도는 와야 한다. 그래야만 타협할 여지가 생기겠지.

       

       그전까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다.

       

       – 대통령 각하께서 에테르 님을 뵙길 바라십니다!

       

       “…그렇다는데요?”

       “…….”

       

       뭐야. 왜 진짜 오는 건데.

       

       다른 사람은 다 돌려보냈어도, 일국의 수장을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정말 어느 편에도 못 서게 될 테니까.

       

       “나가 보실 건가요?”

       “…그래.”

       “제가 열어드릴게요.”

       

       레니냐가 현관으로 나가는 사이,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친 뒤 뒷머리만 대충 묶었다.

       

       초라한 의자 세 개를 꺼내놓고 기다리자, 말쑥하게 차려입은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우렐리아 민주공화국의 대변인인 드와이트 아이젠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고개를 슬쩍 숙이며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적당히 뜸을 들이다가 손을 맞잡았다.

       

       “…에테르입니다.”

       

       악수를 나누면서 수십 번이고 계산기를 두들겼다.

       

       대통령이 아닌, 국가의 대변인이라니. 어지간히도 자신을 낮추는구나.

       

       이유가 뭘까….

       

       “갑자기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여기, 이쪽부터 차례대로 소개겠습니다. 우선 여긴 경제부장관인…….”

       

       그 뒤로 정부 고위 관료들과 짤막한 인사가 오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장관급 인사를 전부 끌고 온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이분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입니다. 이상으로 41개 부처 장관들과 27명의 고위 공직자가 선생님을 보러 왔습니다.”

       “…높으신 분들이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일단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료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직급에 맞지 않게 차디찬 마룻바닥에 꿇어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그렇게 대뜸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예법이 카우렐리아 고유의 방식이 아니었다.

       

       보아하건대 제국.

       

       필리우트 제국에서 쓰이는 예절을 배워 나에게 써먹고 있다. 아무래도 나를 제국인으로 인식하는 모양새였다.

       

       국가를 이끄는 수뇌부 모두로부터 제국식 도게자를 받은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왜 갑자기 이러시는 겁니까?”

       

       특히 대통령. 여태 한 번도 안 나타나더니 인제 와서 구걸이다.

       

       “선생님, 저희가 그동안 무지몽매했습니다. 이제 카우렐리아는 선생님의 조력이 없으면 멸망하고 말 겁니다. 대가를 치를 터이니,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선처라뇨. 저는 여러분을 도울 깜냥이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몸이라서요.”

       

       요 며칠 사이, 나는 불안장애를 핑계로 잠을 성기게 잤다.

       

       덕분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생겼다. 머리도 안 감은 지 꽤 되었기에 떡진 상태였다. 좀비나 다름없는 몰골인 셈인데.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건…. 수면장애를 겪고 계신다면 저희 나라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이용하실 수 있도록 조처하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정말 안 돼서 그래요.”

       “선생님…!”

       

       퍽, 퍽, 퍼억.

       

       대통령을 포함한 관료들이 일제히 머리를 박아댄다. 레니냐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고, 나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설마 이세계판 삼궤구고두례를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선민의식이 가장 심하다는 종족에게서 말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희 나라의 미래는 선생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께 가능한 한 모든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나라 법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이 나라의 주인은 대통령 각하 아닌가요?”

       “민주주의 국가에 대통령이 주인이라니요.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요, 선생님께서도 카우렐리아에 있는 이상 카우렐리아의 국민이시니 마땅히 권한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궤변처럼 들리지만, 꽤 그럴싸하다.

       

       “하지만 조금 전 보여주셨던 예법은 제국의 예법인데요.”

       “선생님께서 제국 출신이시니 가능한 그쪽으로 격을 차린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카우렐리아의 예법으로 바꾸어…….”

       “아뇨, 그건 괜찮아요.”

       “그러면 도와주시는 겁니까…?”

       “국민이 저 혼자던가요? 제가 여러분을 돕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야당에 위치한 사람이라든지. 그 당을 지지하는 엘프들이라든지.

       

       “그것이라면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러면서 행정부장관이 신문 기사를 쓱 내밀었다.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었던 설문조사였다.

       

       [Q. 전(前) 상천 에테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마수가 아니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64%]

       [2. 마수이긴 하나,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 33%]

       [3. 마수이며 악한 존재이나, 현재 전쟁 상황을 위해서라도 협력해야 한다 : 2%]

       [4.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장 형을 집행하거나 추방해야 한다 : 0%]

       

       “보시다시피 선생님께 반대하는 분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국민 여러분도 선생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계십니다!”

       

       통계 조사를 읽은 내가 짐짓 한숨을 흘렸다.

       

       이거, 2주일 안에 조사가 이렇게 뒤집힐 리가 없는데. 틀림없이 모집단을 잘못 설정했거나 통계를 유리하게 조작한 것이다.

       

       “…조작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조작이 아닙니다.”

       “에테르 선생님, 어젯밤 이프리트 님께서 마왕에게 당하셨습니다─!!”

       

       내 눈동자가 500원짜리 동전처럼 커졌다.

       

       뭐야. 불의 정령왕이 죽었다고?

       

       “그런 소식은 들은 적 없는데요?”

       “저희가 보도 제한을 걸었습니다. 혹여 이것이 국민에게 알려지기라도 했다간 큰일이 날 듯해서….”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허어.”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몸이 너무 아픈 것이에요..!

    하지만 글을 쓰면 사라락 낫는답니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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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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