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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3

     딸칵, 하는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바로 천장에 달린 마석이 불을 내뿜는다.

     딸칵, 하는 수도꼭지를 위로 당기자마자 아래를 향해 물이 쏟아진다.

     그걸 붉은점이 칠해진 방향으로 돌리자, 곧 물에서 뜨거운 연기가함께 뿜어져나오며 온기를 내뿜는다.

     ‘이거지.’

     내가 제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이 목욕 문화일 것이다.

     ‘위생 때문에 매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노스트럼 왕국은 목욕을 함에 있어, 많은 자원을 사용해왔다.

     그리고 한정된 장소, 많은 인력이 있는 곳에서만 목욕이 가능했다.

     도자기로 만든 넓은 욕조에 끓이고 난 뒤 적당히 식힌 온수를 붓고, 이 과정을 메이드 여럿이 목욕이 끝날 때까지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전에는 마법으로 물을 끓였다지.’

     고대에는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마법의 왕국답게, 마법사를 동원하여 물의 온도를 조절하고 정화했다고 한다.

     ‘근데 그것도 옛날 이야기.’

     하지만 이런저런 위생 문제로 공중목욕탕이라는 게 사라졌다고 한다.

     ‘마법사가 현재 특권계층이 된 걸 생각한다면, 아마도 온수와 정화마법을 평민들에게 베풀어주는 걸 저급하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그게 정말로 위생 문제인지, 아니면 너무 더러운 것을 많이 보게 된 마법사들이 대중들을 상대로 오염수를 정화하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겠다고 강짜를 부린 건지는 미지수.

     ‘그냥 강에다가 한 번 몸을 휘젓고 나오는 게 평민의 목욕.’

     몸을 온수에 담근 채 피부를 불려서 오염물질이나 기타 각질 등을 쉽게 벗겨내는 게 아닌, 그냥 몸을 흐르는 물에 담그고 손으로 닦아내는 게 목욕의 전부였다.

     차가운 건 어쩔 수 없고, 이를 악물고 몸을 씻어내야만 했다.

     ‘귀족들이야 뭐 돈으로 목욕하는 게 가능하니까.’

     그래서 목욕은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매일매일 목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고, 많은 이들이 그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특권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 특권을 마도공학 연금술은 딸칵, 한 번으로 누구나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수많은 메이드가 목욕 시중을 들 필요도 없이, 그저 목욕하기 전에 미리 물을 받아두거나 목욕 후에 청소를 하기만 하면 되도록 변했다.

     ‘귀족들도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곧 익숙해졌지.’

     오로솔 아카데미의 장점 중 하나가 개인실마다 간이 욕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 문화가 빠르게 퍼진 건 오로솔 아카데미 덕분이었고, 특히 화장실 및 샤워 문화를 경험한 이들이 고향에 가서 널리 퍼뜨린 덕분이기도 했다.

     ‘진짜 알몸으로 목욕하는 경우는 잘 없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가끔은 남들 눈치 안 보고 혼자서 목욕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금은 그다지 의미는 없지만, 오로솔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학생들 중에는 욕조 딸린 화장실이 큰 영향을 미친 경우도 있었다.

     왜?

     ‘귀족들 중에는 혼자서 조용히 목욕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어.’

     

     제국식 온수 시설이 있는 욕조에는 메이드가 따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

     목욕 시중을 받는 이가 없어도 어디 몸이 불편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도꼭지를 딸칵 누르는 것만으로도 몸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옆에 사람이 있는 걸 바라지 않는 걸까?

     몸에 자신이 없어서?

     아니면 메이드들이 옆에 있는데도 알몸이 되는 걸 부끄러워해서?

     목욕 시중이라는 게 보통 메이드들이 하는 게 보통이라, 남자 귀족이 목욕을 하면 행여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도 하나 있을 것이다.

     “아스타시아.”

     “…….”

     좋아하는 사람, 혹은 연인-부부끼리 단 둘이 목욕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화났습니까?”

     “세상에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내 앞에 앉은 아스타시아가 전신이 붉어진 채 투덜거린다.

     “모처럼 메이드복을 입었는데, 그걸 냅다 바로 허리를 잡아다가 욕조로 같이 들어오다니.”

     “알몸으로 들어올 수는 없잖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데, 지금 이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아스타시아가 자신의 옷과 내 옷을 가리킨다.

     “세상에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만.”

     “옷만 입으면 괜찮다?”

     “꼭 피부에 물이 닿지 않아도, 저희 정도면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여도 나쁘지 않잖습니까?”

     욕조는 제법 넓지만, 사람 둘이 나란히 옆으로 앉을 정도는 아니다.

     “아스타시아.”

     그러므로, 두 사람이 동시에 욕조에 들어온다면 욕조의 끝에 등을 기대고 마주보거나-

     “이게, 싫으십니까?”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괜찮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내가 지금 아스타시아를 내 앞에 앉혀놓고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다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것처럼 앉을 수밖에 없다.

     싫어하는 기색은 없다.

     그저 아스타시아는 옷을 입고 이러고 있다는 게 불편하면서, 동시에 옷을 입지 않고 들어왔을 때를 기대하고 있어서 그런 것 뿐.

     “아스타시아. 당신이 왜 불안해하는지 잘 압니다.”

     “제가 불안해한다고요?”

     “그럼요. 이렇게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데, 벗어나지 않잖습니까.”

     아스타시아는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게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벗어나지 않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내게서 몸을 돌린 채 얼굴을 마주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스타시아.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제 곁에는 오직 당신만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달라붙어 있으면서,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있을 것입니다, 도 아니에요. 아스타시아가 제 옆에 없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하물며 다른 여자가 제 옆에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요?”

     “그럼요. 항간에서 자기들이 그레이 지브롤터의 기사단 중 한 명이었다거나, 그레이 지브롤터의 첩이었다거나 하는 소리는 전부 망상장애에 불과합니다.”

     “망상장애….”

     “그것은, 그저 꿈이기 때문입니다.”

     “꿈인 건가요.”

     “그렇죠.”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지워진 역사.

     “한 명이 꿈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10명이, 100명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도요? 사람도 틀리지 않고, 대상까지 정확하게 들어맞는데?”

     “그런 세상도 있었나보죠. 하지만 아스타시아. 그 세상에서, 저는 당신과 만났습니까?”

     “……몰라요.”

     모른다.

     위르고의 장녀가 말했던 것도 그렇고, 윌리엄 테일 이후로 수많은 꿈 속 노스트럼을 경험한 이들이 말한 정보를 모두 수합해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제가 만일 꿈 속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알 수 있었겠지만, 제국인은 거짓된 황금을 마셔도 꿈 속 세상을 볼 수 없으니까.”

     오로지 꿈을 체험한 노스트럼 사람의 기억에 모든 정보를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체험 속 기억에 ‘아스타시아가 없다’고 한다면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그레이. 저는 꿈 속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지금이 너무나도 행복해요.”

     “제가 옆에 있어서요?”

     “그런 것도 있지만…그레이 지브롤터의 옆에 제가 없는 세상이, 그저 ‘꿈’이라는 거니까.”

     “…….”

     꿈 속, 그레이의 옆에 아스타시아는 없었다.

     “저도 좋습니다.”

     “네?”

     “그것이 그저 꿈이라서. 지금 당신과 이렇게 온기를 나누고 있는 게 현실이라서.”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인간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들은 원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는 법이죠. 특히 같은 성별이라면 더더욱.”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요, 그레이 지브롤터는 크림슨 지브롤터의 삶을 보고 배웠다.

     비록 지금의 크림슨 지브롤터보다는 회귀 전의 크림슨 지브롤터, 그 야윈 매국노 폐인이기는 하지만-지금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도 상당하다.

     ‘회귀 전의 아버지로부터 적을 죽이고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면.’

     지금은.

     “저는 아버지로부터, 한 사람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금의 나는, 지금의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모습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새로이 배웠다.

     “가족을 아끼는 법을 배웠고, 자신의 사람을 품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죠.”

     “…….”

     “꿈 속의 그, 노스트럼의 마지막 수호자는 시작부터 많이 달랐을 겁니다. 어머니가 샤를로트 지브롤터가 아닌 카르멘…지브롤터였을 테니, 두 명의 어머니를 보면서 남자는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 있구나, 뭐 그런 걸 배웠겠죠.”

     “그렇다면…카르멘 왕비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제게는 절호의 기회네요.”

     아스타시아가 쓰게 웃는다.

     “아버님께서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모습을 당신에게 보였기에, 그걸 보고 자란 당신이 이렇게 저만을 사랑해주고 있으니까요. …욕심일까요?”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아닌 지브롤터는 지브롤터가 아닙니다.”

     나는 떨리는 아스타시아를 좀 더 강하게 붙잡았다.

     “꼭 지브롤터의 피를 운운하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저는 당신 이외의 사람을 제 옆에 둔다는 것조차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왜요?”

     “제 두 팔은 이렇게 한 사람만을 꼭 끌어안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요.”

     “…….”

     아스타시아가 조용히 내 손을 붙잡는다.

     

     “정말, 다른 여자 안 들이는 거 맞죠?”

     “물론입니다.”

     “오직 저만을 계속 사랑해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그건 좀 곤란하네요.”

     “뭐라고요?”

     아스타시아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쪽.

     고개를 돌린 아스타시아를 향해 바로 입을 맞췄다.

     아스타시아는 처음에는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곧 눈을 감으며 조용히 힘을 빼냈다.

     “…키스로 용서가 다 될 거라고 생각하면 유감이네요. 흥.”

     “자식에게 굿나잇 키스하는 것도 안 됩니까?”

     “네?”

     “제가 아직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는데, 자식이 태어나면 분명 아버지처럼 될 것 같아서 걱정이거든요.”

     “……하.”

     내 말에 아스타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진짜, 장난을 쳐도 그런 장난을.”

     손을 뒤로 뻗으며 내 볼을 꽉 움켜쥐었다.

     “놀랐잖아요.”

     “복수입니다.”

     “복수?”

     “남들이 말하는 거짓된 세상의 모습에 현혹되어서, 저를 의심한 당신에 대한 벌입니다.”

     나는 아스타시아의 배를 쓰다듬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제가 다른 이성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거짓된 꿈 속 세상의 저를 현실의 저와 비교하면서 불안해 한 당신에 대한 사소한 복수입니다. 저를 의심했잖아요.”

     “…….”

     “제가 사랑하는 건 가족 뿐입니다. 그리고 피를 나눈 혈연이 아닌 이들 중에서 제가 사랑하는 타인은 오직 한 사람, 당신 뿐이고요.”

     나는 가볍게 아스타시아의 왼손을 당긴 뒤.

     “증명이, 필요합니까?”

     네 번째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어, 잇자국을 냈다.

     “……반지 치고는 조금 그렇긴 한데.”

     아스타시아는 키득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러면 저도, 잇자국 내면 되는 건가요?”

     “어디에?”

     “흐음, 글쎄요.”

     나는 몸을 천천히 눕혔고, 아스타시아는 내 위에 몸을 겹치며 내 목 뒤로 팔을 뻗었다.

     “…전부?”

     아스타시아가 씩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정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일찍 와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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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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