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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3

    모든 것이 끝나고, 적막 속에 잠긴 서울.

    색채 우주에 가려진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하늘을 날아다니던 구름 고기들부터 태양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지평선에서 솟아오른 빛은 구름 고기를 시작으로 고층 빌딩을 지나 점점 밑으로.

    그렇게 지평선 위로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 태양 빛이 서울로 완전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어둠 속에 가려진 건물의 외벽을 밝혀, 지난밤 서울에 벌어진 참상들을 드러냈다.

    강력한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무너진 건물들과 망가진 도로.

    태양 빛에 밝혀진 길거리에는 어디에도 인적이 보이지 않아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 조용한 폐허 속, 거대한 보라 외신의 잔해가 하얗게 타올라 태양이 닿지 않는 곳을 밝혀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신 앞에 있었던 회색 사신은 상황이 끝났다고 느끼자마자, 공기 중에 녹듯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앗!’

    ‘엄마, 도망갔어!’

    엄마랑 같이 승리를 축하하고 싶었던 미니 사신들은 엄마가 사라져 버려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외신의 시체 근처로 모여들었던 미니 사신들은 다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서울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의 펌프질이 혈액을 몸속 구석구석까지 나르는 것처럼, 미니 사신들은 서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고요한 길거리에 뚜방뚜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뚜방뚜방.

    미니 사신들은 모두가 겁에 질려 나오지 않는 길거리를 뚜방뚜방 걸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해로운 오브젝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안전해!’

    미니 사신들은 사람들이 숨은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해맑은 표정으로 의지를 보냈다.

    인간들은 그 의지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미니 사신의 행동과 밝은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미니 사신들은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숨어있는 인간들을 찾아내었다.

    고립된 지하 주차장처럼 길이 없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입구가 건물 잔해에 막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너져 버린 지하 주차장.

    “추워….”

    거대란 콘크리트 잔해가 만든 틈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빛 하나 없어 끝없는 어둠 속.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서울 외곽의 건물.

    게다가 무너진 잔해에 다리가 깔려,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의 사람.

    그런 사람의 눈앞에 황금 사신의 머리가 ‘퐁’하고 튀어나왔다.

    황금 사신이 내는 상냥한 빛은 어둠 속에 있던 사람에게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황금 사신의 태양 같은 향기와 해맑게 웃는 표정은 절망마저 잊게 했다.

    황금 사신은 마치 조금만 더 힘내라는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방 구해줄게!’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황금 사신이 위로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높은 고층 빌딩에 숨어있는 사람이든, 지하 주차장에 숨어든 사람이든, 미니 사신들은 인간들에게 고개를 들이밀고 안심을 선물해 주었다.

    ***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주택가.

    다른 지역에서는 미니 사신들이 인간들을 구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오무룡의 저택 근처는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진작에 대피해서 그런지, 미니 사신들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상당히 조용했다.

    거기다가 거대한 바위에 완전히 박살 나버려서 그런지, 마치 쓸쓸한 폐허 같은 느낌이었다.

    그 쓸쓸한 폐허 속에서, 금발 소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도 거의 남지 않았고 길도 없었지만, 금발 소녀는 헤매지도 않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튼튼한 벽과 박살 난 바위가 절묘하게 몸을 기대서 동굴처럼 보이는 틈.

    그곳이 금발 소녀의 목적지였다.

    그 틈에서는 짙은 석유 냄새와 질척질척한 혈향이 풍기고 있었지만, 소녀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얕은 틈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독기에 가득 찬 중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아, 아아아. 손녀야.”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그 어둠 속에는 이미 모든 힘을 잃고 녹아버린 구체에 손을 대고 있는 오무룡이 있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는다! 절대로!”

    오무룡의 눈동자는 붉은 광기에 가득 차서 번들거렸다.

    그 앞으로 금발 소녀가 천천히 다가가자, 오무룡이 고개를 들었다.

    오무룡은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금발 소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아, 손녀 왔구나. 이 할애비가 많이 다쳐서 그런데, 좀 부축해 주겠니?”

    그 말을 들은 금발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오무룡을 향해 다가가자, 오무룡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숨길 생각도 못 하는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외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오무룡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되기 직전, 금발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오무룡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표정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지만, 목소리만은 마치 손녀 시절의 금발 소녀처럼 귀엽고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 딱딱한 표정은 동굴의 역광에 가려져, 오무룡이 볼 수 없었다.

    “왜, 왜, 왜 그러니?”

    일그러진 표정과 급한 말소리.

    금발 소녀와 달리, 오무룡은 조급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몇 번째야?”

    조금 전까지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그 소리를 들은 오무룡은 혀를 차고,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미안하단다. 이 할애비가 전부 잘못했어. 용서해 줄 수 없겠니?”

    그 말을 들은 금발 소녀는 마치 우는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금발 소녀는 오무룡에게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죠?”

    하지만 오무룡은 금발 소녀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잡았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발견한 것처럼 금발 소녀를 기괴하게 뒤틀린 양팔로 꽉 붙들 뿐이었다.

    “아니, 손녀의 이름을 기억하기는 해요?”

    “….”

    “우리들을 이름으로 불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런 슬픈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금발 소녀의 전신에서 붉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정화의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한 오무룡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

    “이름. 이름. 이름?”

    정화의 불길 속에서 점점 재가 되어 사라지는 오무룡은 마지막까지 손녀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 순간.

    죽음으로 인해 붉은 목소리마저 멀어진 순간.

    딱, 한 가지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모든 클론은 더없이 착한 손녀다웠다는 걸.

    그저, 오무룡 자신이 만족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할아버지!]

    해맑게 웃는 첫 번째 클론의 미소를 떠올리며, 오무룡은 그렇게 후회 속에서 죽어갔다.

    ***

    언제나 편안한 세희 연구소 격리실.

    나는 예린이의 품에 안겨서,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옴뇸뇸.

    TV나 라디오 방송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서울이 완전 박살 난 사태였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부서진 건물이나 죽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복구에 1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제 슬슬 TV 뉴스도 제대로 나오는 채널이 많아지고 있었다.

    오브젝트 협회 같은 공공 기관도 제 기능을 꽤 찾았는지, TV에서는 꽤 관심이 가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울에서 발생한 ‘협회 인형 폭주 사태’ 이후, 서울은 아직도 복구 작업이 한창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오브젝트 협회’의 해체를 결정했습니다.]

    [대신, 오브젝트 안전 관리를 위한 새로운 기구인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가 발족하였습니다.]

    [이번 사태가 협회에서 직접 개발한 ‘인형’ 때문에 벌어졌던 만큼,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는 기존의 협회와는 전혀 다른 기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협의회는 해체된 오브젝트 협회와는 달리, 연구 시설 운영 대신 오브젝트 안전 관리와 규제에 주력할 것으로 보입니다.]

    [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황금철 씨는 “비대했던 협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안전 관리에 집중하겠다”라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한편, 협회의 해체와 함께 수도 이전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여러 현실적 문제로 인해 현재는 보류된 상태입니다.]

    TV에서는 커다란 황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중년 남성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와, 드디어 오브젝트 협회가 사라지네.

    그 뒤를 이어서 탄생한 안전 관리 협의회는 좀 괜찮은 조직이려나?

    뭐, 아무리 나빠 봐야 협회보다는 좋겠지.

    그러던 중, 내 입에 과자를 하나씩 물려주고 있던 예린이 내 눈앞에 휴대전화 화면을 들이밀었다.

    “사신아, 이것 좀 봐봐.”

    예린이가 들이민 인터넷 기사에는 난장판이 된 건물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오브젝트 협회 비밀 연구 시설 붕괴, 대규모 피해 우려>

    <오브젝트 협회의 한 비밀 연구 시설이 협회 인형 사태로 인해 완전히 붕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고로 인해 내부에 격리 중이던 다수의 위험 오브젝트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되면서, 2차 피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이번 사고로 인해 악명 높은 범죄자 ‘메이커’도 탈출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에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는 “경찰과의 공조를 통해 메이커의 행방을 추적 중이며,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

    메이커라.

    왠지 기억이 날듯 말듯 한 이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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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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