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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4

     대륙력 99년 12월 24일.

     결전의 날이 되었다.

     결전이라고 하면 뭔가 엄청 대단한 게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실제 전쟁을 나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전쟁터를 나가는 군인과도 같다.

     비장한 마음으로 언제 어디에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른다.

     ‘준비는 만전.’

     모든 걸 준비했다.

     통제할 수 있는 요인은 모두 제어했고, 변수는 모두 차단하거나 보험을 들어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사고가 난다면, 그건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불가항력이다.

     뿌우우우ㅡㅡㅡ

     

     창 밖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퍼진다.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니, 하늘에는 거대한 비행선이 오로솔 아카데미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그레이 지브롤터.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전지 같은 걸 붙여둔 걸까, 아니면 비행선의 옆에다가 크게 새로 잉크를 칠하기라도 한 걸까.

     흰색 바탕에 글씨가 적혀있는 걸로 봐서는 전자같은데, 눈에 마력을 불어넣어 집중해서 올려다보면 아무리봐도 후자같다.

     

     ‘에르윈 황후로군.’

     비행선을 도색하는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그런 비행선의 옆에다가 플랜카드를 걸어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잉크를 새로 칠해버린다는 건 잉크와 인건비만 하더라도 억소리가 날 정도다.

     심지어 나중에는 저걸 닦아내거나 그래야 하는데, 그걸 또 새로 덮거나 잉크를 벗겨내는 것도 돈이 들어가기 마련.

     협찬,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

     실제로 문구가 그렇게 적혀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 약혼식에 필요한 모든 제국의 물품을 준비해준 건 아이페리아 인터스트리였다.

     심지어 왕국 내에서 준비할 수 있는 물건을 사들여 준비해준 이들도.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검푸른 정장만 하더라도, 에르윈 황후가 직접 준비한 정장이다.

     “…….”

     전신 거울의 앞에 선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전부 뒤로 넘긴 것도 조금은 낯설고, 일부러 비열한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쓰고 다니던 안경-때로는 단안경이었지만-도 없다.

     일단 정장부터 군청색이라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버지의 색, 지브롤터 당대의 색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아닌 다른 색의 정장을 걸친다는 것부터 그레이 지브롤터로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드레스코드는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넥타이의 색 하나만으로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드러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정장의 색을 군청으로 맞췄다는 것은 이제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제국의 황녀’와 약혼한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든말든, 제국편이 된다.

     ‘떨리네.’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지만, 오늘은 어딘가 더 떨리는 기분이다.

     이미 결혼은 한 번 해봤지만, 회귀 전의 결혼식은 결혼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한 결혼식이었다.

     전쟁 이후.

     죽어버린 어머니.

     폐인이 된 아버지.

     졸지에 제국인이 된 동생들.

     하객으로 찾아오는 이들의 눈빛은 절반은 왕국의 배신자를 바라보는 시선이었고 절반은 제국 후계자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정적에 대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들이 넘쳐났지만, 그건 전부 형식적으로 말하는 자들 뿐이었다.

     오직 나와 아스타시아의 결혼을 축하하던 이는 한 사람 뿐.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다.

     혹시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본심이 드러날까봐 긴장되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날도 이렇게 새벽부터 찾아왔다.

     “열려있습니다. 들어오시죠, 폐하.”

     “실례하지.”

     

     정말로 실례라고 생각하는 걸까?

     집무실 문을 열고 느긋하게 들어온 남자는 당연하게도, 이 군청색 정장의 색과 같은 계열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진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황제였다.

     “아침부터 나를 봐서 불쾌하다는 표정이군.”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그건 조금 의외인데.”

     “어차피 오늘 약혼식을 치르고 나면 공식적으로 예비 장인이 되는 셈이니, 미리 인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죠.”

     “예비 장인이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약혼식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자네의 공식적인 예비 장인이 되는 셈이로군.”

     “예.”

     

     황제는 당연한 말임에도 자랑스럽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인가?”

     “글쎄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죽이고 난 뒤,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환경이 되고 나면?”

     동시에, 합스베르크를 죽여 아스타시아가 걱정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환경이 된다면.

     “동감이야. 언제 또 노스트럼의 기적을 이용해서 훼방을 놓으려고 할지 모르는 자니까. 그 바람에…가족들도 한 명도 오지 않았으니, 조금은 섭섭하기는 하겠군.”

     “괜찮습니다. 결혼식이 아닌 약혼식이라서.”

     이곳에 지브롤터는 한 명 뿐이다.

     그레이 지브롤터를 제외한 다른 지브롤터는 누구 하나 약혼식이 열리는 오로솔 아카데미로 오지 않았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위험하니까.

     “비록 황금의 영령들이 이전보다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거짓된 세계에 사로잡힌 이들에 의해 거짓된 황금도 줄어드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오늘같은 날 아예 안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렇지.”

     차라리 회귀 전 결혼식이 더 안전했다.

     그 때는 제국의 그림자들이 철통 경비를 서기도 했고, 초대받은 이들이 전부 제국에 항복한 이들이기도 했으며, 당장 왕국이 멸망한 뒤 황제가 주도하는 첫 행사라 함부로 암살자들이 손을 쓰지 못했다.

     “이거 하나는 분명히 말해두지. 무언가 사고가 생긴다면, 그건 제국에서 저지르는 건 아니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자네의 약혼식에 깽판을 놓으려고 하든, 아니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장애 정신병자들이 ‘이 약혼은 무효야!’라고 지껄이든, 그건 제국 황제도 어떻게 제어할 수 없는 변수거든.”

     “이해합니다.”

     노스트럼의 기적을 이용하여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무능왕도 그렇지만, 그 기적의 산물로 순식간에 반제국주의자가 된 과격분자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레이. 그런 자들 말이야, 이 참에 싹다 치워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

     “…….”

     황제가 묻는다.

     “결혼 동맹을 통해 공동체가 될 노스트럼, 지브롤터, 제국. 이 일자동맹에 아직도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을 따르는 멍청이는 필요없지. 하물며 꿈 속을 진실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들이 답답한 건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일부러 다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네의 약혼식에 가족들이 못오게 만드는 위험요소가 되었는데도?”

     “일일이 다 죽이면 그 시체는 누가 치운답니까.”

     황제가 씩 미소를 짓는다.

     제국에서는 시체를 치우는 방법이 노스트럼과 다르기도 하지만, 황제는 그중에서도 유독 다른 방법으로 시체를 치우는 걸 선호한다.

     “글쎄. 자네가 이 방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겠나?”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 방에서 시체 치웠던 적은 없어서.”

     “왜 없어? 라이오넬…이었던가? 황금여명의 기사단이 이곳을 습격하고 실종되지 않았나.”

     “악취미로군요. 그런 걸 일부러 말씀하시다니.”

     “자네와 나는 닮았으니까.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면, 산 사람을 위한 마력강화제로서 쓰여지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않겠나.”

     황제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나 애도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어느정도 비슷하기는 하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그래서 충성병자, 망상장애 정신병자들을 전부 싸잡아 가두시려고요? 그 다음에는 흡혈귀로 만들어서 죽인 다음, 그들의 뼛가루를 모아다가 백은으로 만들어서 팔아치우려고요?”

     “쓸데없이 양지 바른 노스트럼 땅에 묻혀서 땅을 더럽히는 것보다, 불로 태워버린다음 백은으로 써먹는 게 이 대륙을 위해서도 효율적인 조치가 아니겠는가.”

     “그건 인정합니다만, 살아있는 사람을 일부러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죽을 짓을 했을 때만 죽이려고 하겠다?”

     “안 될 거 있습니까?”

     “자비롭군.”

     “귀찮은 거죠.”

     “귀찮다….”

     황제가 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씩 웃는다.

     

     “그렇다면 그 귀찮음, 덜어줄 수 있는데.”

     “다 죽여버리면 귀찮은 일이 없겠지만, 노스트럼 사람들은 전부 죽이면 안 됩니다.”

     “왜?”

     “노스트럼 사람들이 있어야, 제국인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갈 거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죽어가기 직전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적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

     “항상 경계해야죠. 노스트럼 사람들이 제국보다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뒤쳐진 건 사실이지만, 몇몇 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분명 노스트럼은 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만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몰라서 그랬던 거지, 알고 나면 확실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면 폐하께서는 노스트럼 사람들이 기어이 지브롤터를 잡아먹고, 제국까지 잡아먹을까봐 걱정되십니까? 두려우신가요?”

     “내가, 두렵다?”

     “예.”

     “…두렵지.”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나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할까봐 그게 무섭지.”

     “…….”

     “나도 항상 피를 보려고 하는 그런 잔인한 인간은 아니야. 매번 죽이기만 했다면 이미 제국인 절반은 백은이 되었을 것이다. 무능한 것들이 세금을 축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빌붙어 살아가든 그런 기생충과도 같은 자들,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지.”

     저 말은 진심이다.

     “하지만 제국과 노스트럼은 다르지 않나.”

     “다르죠. 다를 겁니다. 달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있는 황제 폐하께서 노스트럼을 싹다 죽여버리고 싶으실 테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병자들만 처리하자?”

     “좋은 날이고, 앞으로도 이런 좋은 날이 계속될 겁니다. 좋은 날에 함부로 피를 볼 수는 없는 법이죠.”

     “좋은 날이라…. 그렇지.”

     황제가 조용히 두 손을 들었다.

     “오늘은 자네의 날이니, 여기까지만 하겠네.”

     “오늘로 끝내시고 앞으로는 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럴 수 있겠나. 나의 사위가 된 이상,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귀담아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황제가 키득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쉽군.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모든 게 수월했을텐데.”

     “사위는 아들 아닙니까?”

     “친아들이랑 사위는 느낌이 다르지. 마음 같아서는 크림슨 그 자로부터 아버지 자리를 빼앗고 싶은 심정이야.”

     “남의 여자를 빼앗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아버지 자리를 빼앗는다는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군요.”

     “그런가? 처음이 아니지 않나?”

     황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지만, 아쉽게도 진짜로 처음 듣는다.

     “죄송하지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은 폐하가 최초십니다.”

     “…왜?”

     “그야….”

     이전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는 다르니까.

     “폐하께서 아쉽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어떤 누구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제 친아버지는 크림슨 지브롤터 단 한 명일 것입니다.”

     폐인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두고 회귀 전의 황제는 이미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오히려 비난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는 걸 즐기기도 했다.

     지금의 황제와 달리.

     나도 그걸 어느정도 받아들였고.

     아버지라기보다는, 정치적 뒷배 정도로 여기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아들이란, 아버지를 보고 배우면서 남자로 크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쉽군. 정말로 아쉬워.”

     합스베르크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이번 만큼은 감사해야겠군.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덕분에, 자네의 아버지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

     “…….”

     “거절하겠나?”

     “거절할 수 있을 리가요.”

     거절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가시죠, 장인어른. 세상 사람들의 앞에서, 당신의 딸을 가지겠노라 만천하에 선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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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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