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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4

    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회색 사신 격리실.

    예린은 품속에 회색 사신을 안고 핸드폰으로 인터넷 방송을 보고 있었다.

    협회 인형 폭주 사태 때 잠깐 봤던 방송이었다.

    남자는 방송을 종료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실은 방송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궁금해하는 분이 많으신 것 같더라구요.]

    예린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을 본 사람은 적었지만, 그 방송을 본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철컥. 철컥. 철컥.’]

    일정한 리듬으로 3번 문고리를 돌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405호 총각. 문 좀 열어봐.”]

    이 패턴은 완전히 제임스 연구소 측에서 발표한 ‘인형화’한 인간의 패턴이었으니까.

    게다가 새로이 발족한 ‘오브젝트 안전 관리 협의회’도 제임스 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을 긍정해 버렸다.

    그의 마지막 방송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오는 철컥 소리.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

    그래서 그런지 그의 방송은 순식간에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캡처하여 밈으로 만들어 퍼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남자의 생존 여부를 궁금해했기에, 방송을 켜게 된 것 같았다.

    [많은 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형들의 함정이 맞았습니다.]

    [방송을 끄고, 입구를 막아둔 장롱을 치우고, 문을 딱 열어보니까. 아주머니 뒤로 인형들이 우글우글 하더라구요.]

    [그 순간 등 뒤에서 식은땀이 쫙 나는 게, ‘아,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죠.]

    침대 위의 남자는 나름대로 조리 있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지만, 예린은 그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화면 구석에 조그마하게 꿈틀거리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침대 뒤에서 슬그머니 검은색 얼굴이 튀어나왔다가.

    화면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보고 ‘앗!’ 하고 놀라서, 다시 침대 뒤로 쏙 숨어버리는 귀여운 오브젝트.

    검은 사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은 사신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작은 검은색 손가락이 침대 등받이 위에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침대 등받이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검은 사신은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런지, 5초에 한 번씩 빼꼼 고개를 내밀었는데.

    그 때문인지 방송을 보는 사람들도 검은 사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잡히기 직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버렸죠. 6층 높이라서 이판사판이었는데, 다행히도 살았습니다. 네? 검은 사신이요?]

    남자는 채팅을 보고 침대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몰래 고개를 내밀다가, 남자와 눈을 마주친 검은 사신은 멋쩍은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아, 숨어있으라고 했는데, 튀어나와 버렸네요.]

    남자는 손을 뻗어서 검은 사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더니,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내밀었다.

    [이야기를 다 풀고 나서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소개하겠습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도망갈 수도 없는 순간에 저를 구해준 검은 사신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검은 사신을 소개하면서, 검은 사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검은 사신은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어 줘서 그런지,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검은 사신의 얼굴을 더욱 카메라에 들이밀더니, 자랑을 시작했다.

    [여기 이 이빨 보이세요? 날카로운 게 조금 귀엽죠?]

    예린은 그 모습을 보며 방송을 끄더니, 회색 사신의 정수리에 머리를 얹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저 남자는 살아서 다행이고. 검은 사신이는 애착 인간을 구해서 다행이고.”

    검은 사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아마 저 남자를 구하기 위해 정말 노력했겠지.

    사방에서 몰려드는 협회 인형을 막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상상만 해도 까마득했다.

    예린은 자신의 턱 밑을 간질이는 회색 사신 더듬이의 감촉을 즐기며,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를 회색 사신에게 전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어.”

    그러자 살랑거리던 회색 사신의 더듬이는 더 말해보라는 것처럼 멈춰서 예린의 말을 기다렸다.

    “협회 인형 사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더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안에 박살 난 인형들이 잔뜩 쌓여있었어.”

    황금 사신이 찾아와서 해치웠다고 보기도 힘들었고, 하얀 아귀가 했다고 보기에도 이상한 흔적이었다.

    “무슨 일이었던 걸까?”

    예린의 말을 들은 회색 사신은 ‘나도 몰라!’라고 외치는 것처럼 더듬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

    세희 연구소와 미니 사신 정원이 만나는 곳.

    보라 외신이 습격했을 때는 닫혀버렸던 곳이었지만, 보라 외신이 사라지자 다시 열린 통로였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바람개비도 다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애착 인간을 찾고 싶어 하는 미니 사신들을 다시 옮겨주기 시작했다.

    저번 사건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안뜰과 미니 사신 정원의 경계에는 미니 사신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닫히려고 하면, 몸을 던져서라도 경계가 닫히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겠지.

    내 아이들은 장작을 가지고 있어서 꽤 효과가 있겠지만, 외신 급의 간섭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그렇게 미니 사신들로 북적이는 안뜰과 미니 사신 정원 경계에 딱 걸쳐서 누워있었다.

    좌우로 반반.

    이렇게 누워있으면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불안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신기한, 그런 느낌.

    양쪽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달라서 그런 건가?

    경계면의 색다른 감촉을 즐기며 시선을 미니 사신 정원 쪽으로 돌리자, 하늘에 떠오른 구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구체, 불변구.

    푸른 구체. 

    그리고 새로 생긴 보라 구체.

    하지만 보라색 구체는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해서,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인간은 당연히 볼 수 없었고, 미니 사신들조차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크기가 다른 구체보다 조금 작았다.

    아무래도 보라 외신이 완성되기 전에 죽여서 그런 거겠지.

    그래서 그런지 저 반투명한 보라 구체로는 보라색 거인 사신 소환이 불가능했다.

    색깔별로 거인 사신을 모아 보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네.

    그래도 기대할 만한 점은 하나 있었다.

    저 보라 구체가 장작을 조금씩 흡수해서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선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익은 과일처럼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완성되는 능력 같았다.

    제대로 완성되고 나면 차원 괴리를 쓸 수 있는 거인이 튀어나오려나?

    아니면 인형들을 강화했던 능력이 나오려나? 

    조금 기대되는 게, 마치 랜덤 뽑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네.

    당장 얻지 못한 보라 외신의 능력 대신, 이번 사태에서 능력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얍!

    내가 마시멜로 평원을 향해 손을 뻗자, 마시멜로가 꿈틀거리더니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협회 인형이 열화된 것처럼 생긴 마시멜로 인형!

    얼굴이 민둥민둥해서 눈코입도 없고, 팔다리도 대충 형태만 잡은 것 같은 인형이었다.

    이번에 생긴 능력은 장작을 사용해서, 이런 못생긴 인형을 원하는 만큼 소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생산되는 이 인형의 능력은 딱 평범한 인간 수준.

    숫자 제한이 없어서 대단하기도 한데, 황금 사신을 파도처럼 부를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인형!’

    대신 예상외의 쓸모가 있었는데, 미니 사신들이 저 인형을 굉장히 좋아했다.

    저 인형 머리 안에는 텅 빈 콕핏 같은 곳이 있었는데, 딱 미니 사신 사이즈의 콕핏이었다.

    지금도 미니 사신 정원에는 수많은 인형이 미니 사신을 태운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인형을 타고 제자리 뛰기를 하거나, 빠르게 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등.

    마치 스포츠 선수가 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서도 없고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조종하는 거지?

    미니 사신들은 인형을 타고서 철인 3종 경기 같은 경주를 하고 있었다.

    마시멜로 평원을 빙글빙글 돌다가, 핫초코의 바다를 수영해서 설원까지 일직선!

    그리고 설원을 돌파한 뒤, 사탕 산맥을 기어 올라가서 마시멜로 평원으로 돌아오면 끝나는 경기였다.

    게다가 물방울로 만들어진 커다란 화면까지 만들어서, 평원에 있는 다른 미니 사신들에게까지 중계방송하고 있었다.

    현재 챔피언은 예상외로 푸른 사신!

    푸른 사신들이 저 인형 조종을 기가 막히게 했는데, 아무래도 콕핏에 버튼이 많고 복잡해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마라톤 중계를 보는 기분으로 미니 사신 인형 3종 경기를 구경하는 도중, 신기한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미니 사신 정원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황금색 혜성.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고속으로 지나갔지만, 내 탐욕 레이더가 반응하고 있었다.

    저건 분명 멋있는 무언가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혜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히히.

    ***

    송파구 외곽, 제임스 타워 인근.

    알렉스는 터덜터덜 걸어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오브젝트처럼 격리실에 꽁꽁 묶여있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상태였다.

    알렉스는 한때 ‘인형화’를 당했었지만, 다행히도 다른 인형화 피해자처럼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지럽군. 게다가 도대체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겠어.’

    알렉스는 협회 인형 사태 전후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격리실에 조금 전까지 묶여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정신 오염이 심한 오브젝트에 당한 것 같은 기분.

    이런 일은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교육받은 사태였기에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는 아니었다.

    “정신 오염 수칙대로, 충분히 휴식하고 복귀하게. 알렉스.”

    그저, 유독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제임스 사장과.

    알렉스가 동료들 근처를 지나갈 때면 분위기가 조금 기묘해지는 것 정도만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현관문이 부서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알렉스는 깜짝 놀라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무참히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인형뿐이었다.

    “안 돼!!!”

    알렉스는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인형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온기를 뿜어내던, 인형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알렉스는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인형의 머리만 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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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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