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95

     기분이 묘하다. 

     

     한 때는 오로솔 아카데미의 재단 이사장으로서 걸었던 거리를 전혀 새로운 신분으로 걷고 있다.

     본래 학생들이 다녀야 할 길은 텅 비어있다.

     마차 네 대가 일렬로 오다닐 수 있는 거리가 텅 비어있고, 그 좌우로 병사들이 서 있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자가 누군가의 약혼식을 위해 동원되었다면, 당연히 불쾌한 감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뭐, 그 누군가가 지브롤터의 장남과 제국의 황녀라고 한다면 이해는 하겠지.

     이해는 하더라도, 짜증은 날 거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너머에서 함성을 내지르는 이들이 있다.

     나를 향해 환호성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혼란을 주기 위한 환호성이다.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이유는 저런 열광적인 이들 때문이 아니다.

     짝짝짝.

     조용히 손뼉을 치며 광장을 걸어가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

     아카데미 학생 제복을 입은 채,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

     거짓된 황금이 퍼지기 전에는 나를 제국의 앞잡이로 봤지만, 꿈 속 세계를 체험하고 난 뒤로는 나를 더 심각한 매국노로 보는 이들.

     무슨 말이냐고?

     간단하다.

     ‘노스트럼의 수호자였던 인생을 봤는데, 현실은 다르니까 새삼 매국노처럼 느껴지겠지.’

     꿈 속 세상의 그레이 지브롤터는 자신들을 지켜주는 영웅이었다.

     노스트럼을 지키는 최후의 수호자로서, 제국을 상대로 협곡을 등진 채 왕국을 위해 싸우던 구국의 장군이었다.

     그런 내가 앞장서서 제국 문화를 설파하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제국의 황녀와 약혼까지 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약혼, 무ㅎ-”

     갑자기 병사들 사이에서 약혼식이고 뭐고 눈이 돌아간 여인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퍼ㅡ억.

     그들은 즉시 병사들에게 제지되어 기절했고, 다른 곳으로 조용히 끌려갔다.

     누군가가 폭력에 의해 사라졌다.

     분명 좋은 일이 아니고, 공포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상황.

     그러나 참으로 우습게도, 약혼식에 온 이들은 그저 쓰게 웃기만 하며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다들 알고 있다.

     조금 전에 끌려간 여자가 왜 갑자기 미친 것처럼 날뛰려고 한 건지.

     “또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여자가 난동을 부리는 건가.”

     “지난 번에는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선언을 하더니.”

     약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이런저런 사고가 있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예전부터 막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사랑을 속삭인 것도 아닌데, 자기가 그레이 지브롤터의 부인이었다느니…쯧쯧.”

     꿈 속 세상에서 자기가 내 아내였다고 주장하며, 자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조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회귀 전.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여러 여자들을 꼬드겼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여러 가문의 군사적 정보를 얻기 위해 여인들을 상대로 연회장 테라스에서 얻어냈던 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만일 그런 기억 때문에 나에게 따지고 드는 거라면 얌전히 그 손찌검을 두겠지만, 지금 내 부인을 자칭하는 이들은 꿈 속 세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매국노 그레이가 아닌.

     대영웅 그레이의 아내라면서.

     “미쳐버린 거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국 후계자의 첩이 되려고 비벼보려는 걸 수도 있고.”

     “부끄럽지도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었다면, 저렇게 날뛰었겠어?”

     “그러게. 황금의 영령들보다 더 심하게 날뛰는 것 같아.”

     그런 날뛰는 이들만 없다면, 이 약혼식은 평범하게 진행될 것이다.

     오로솔 아카데미 중앙 광장에 마련된 연단.

     내가 걸어가는 길의 정중앙을 따라, 다른 이들이 고개를 올려다 봐야하는 무대가 앞으로 쭉 펼쳐져있다.

     저벅, 저벅.

     천천히 계단을 올라, 무대의 앞으로 걷는다.

     

     지팡이는 없다.

     나를 다리병신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아무런 불편함 없이 걷는 모습을 보이자 몇몇이 당황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지팡이는 그저 장식이었을뿐.

     실력을 숨기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마지막까지 지팡이를 짚는 것도 가능하기는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전방.

     무대의 앞에, 이미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꽃다발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하얀 베일을 두른 드레스 차림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노스트럼식 결혼식도 아니고, 제국에서 흔한 약혼식 절차도 아니다.

     이것은 굳이 말하자면-

     “지금부터 그레이 지브롤터 바르셀로나 총독과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황녀의 약혼식을 시작하겠다.”

     나와 아스타시아의 사이, 넓은 원형의 무대에 제복을 입고 선 나리아 여왕이 준비한 아주 특별한 무대기 때문.

     “본 약혼식은 두 사람의 결혼을 약속하는 의식이며, 이 자리에 온 모두가 증인이 되어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겠다는 약속을 하는 장소일지어니.”

     펄럭.

     나리아의 손짓에 왕실 의장대가 창을 크게 휘두른다.

     지브롤터의 깃발, 노스트럼의 깃발,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제국의 깃발이 하나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누군가의 깃발이 더 많다거나 하는 것 없이, 정확하게 1:1:1의 비율로 펄럭이고 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지만, 약혼식의 모든 것들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나와 아스타시아가 서로 반대편에서 만나는 것도 그렇고.

     중간에 만들어진 무대의 정중앙에 나리아 여왕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이어주듯 서 있는 것도 그렇고.

     

     그 주변을 윈체스터 대공, 카르멘 왕비가 서 있다거나.

     반대편에는 합스베르크 황제가 제국에서 데려온 일부 대신과 함께 서 있다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이 우리를 지키듯이 활공하고 있다거나.

     그 주변을 모르가니아의 비룡기사단이 천천히 날아다니며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거나.

     이 연단이 땅으로부터 제법 높이 솟아올라, 땅에서 솟아날지도 모르는 황금의 노예로부터 조금은 안전한 위치에 있다거나.

     그런 정치적인 메세지들이 한 눈에 보이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스타시아.”

     나는 아스타시아의 앞에 섰다.

     “정말이지…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잃으셨나요?”

     아스타시아가 은은하게 웃는다.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약혼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민 모습은 다시 한 번 나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멀리서 볼 때부터 눈이 부셨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이제는 아스타시아 말고는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죠? 다른 거 봐야하는 거 아녜요?”

     “원래는 그랬죠.”

     약혼식은 세계를 향한 공언이지만, 단순히 우리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맹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피로연은 그 자를 끌어내 사로잡는 걸로 하려고 했죠.”

     병사들 틈에 숨어있는 지브롤터의 환영기사단과 제국의 그림자들은 약혼을 축하하러 온 하객의 사이에 숨어, 혹시나 모를 충성병자의 등장에 긴장하고 있다.

     비행선에 탄 마법사들은 경룡장에서 경룡들을 격추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원거리 마법을 준비하고 있고, 일부 비행선에는 제국 호위병들이 머스킷을 든 채 바깥을 겨누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기사들 또한 혹시나 하늘을 날아올 이형의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 계속 활공하고 있다.

     모든 것은 상식을 벗어난 존재,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테러를 막기 위해서.

     “그런데 무능왕이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약혼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약혼식이 끝나면 어디로 갈 건가요?”

     “글쎄요. 이대로 저기 비행선을 탄 다음, 지브롤터로 데려가서 그대로 성에서 연도가 넘어갈 때까지 둘이서 지낼까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오히려 좋을 것 같은데.”

     “흠흠.”

     옆에 서 있던 나리아가 헛기침을 하며 나와 아스타시아의 옆에 섰다.

     “둘이서 속닥거리는 건 좋지만, 바로 옆에 있는 제가 듣고 있습니다만.”

     나리아는 잠시 병풍이 된 것에 쓰게 웃었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두 사람의 말대로 잘만 해결된다면 좋겠네요. 아무런 문제 없이 일이 지나간다면 좋겠….”

     짙어지려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지고, 나리아는 한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도 아스타시아도 동시에 나리아가 바라본 곳을 바라봤고, 모든 이들이 동시에 그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짝, 짝, 짝.

     땅에서 솟아나는 황금.

     그 황금의 인영이 손뼉을 치며 연단으로 기어올라왔고, 곧 하나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야, 약혼을 축하하네. 역시 대영웅이자 왕국의 수호자, 그레이 지브롤터 공이야.”

     비꼬듯이 말하며 나타난 이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전하.”

     놀랍게도, 무능왕.

     “전하라고 부르는가? 어처구니 없군.”

     황금빛 슬라임처럼 빛나던 몸이 서서히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는 나를 향해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계속 웃고 있었다.

     “그레이 지브롤터, 그레이 지브롤터.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하던, 세 번 정도는 용서해주려고 했다. 왜냐고? 네 덕분에, 나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당장 국왕을 향해 칼이나 창을 겨누지는 못했다.

     “너는 꿈 속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니.”

     “…….”

     국왕이니까.

     아직, 나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일주일이나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저 자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할 지도 모르고, 지금 나타난 저 황금의 마력에 빙의한 무언가가-진짜 국왕의 본체인지도 알 수 없으니.

     “너희들이 말하는 그 꿈 속 세상의 이야기, 궁금하지 않나? 아마 황금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라면 어느정도 궁금할텐데? 그레이 지브롤터는 왜 12명의 부인을 들였는가. 그 황금의 축복이 보여주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남의 약혼을 망치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나서기 전, 나리아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전하라….”

     “꿈 속 세상의 이야기는 현실이 아닙니다. 지금의 제가 당신의 딸이지만, 꿈 속에서는 지브롤터의 자식인 것처럼.”

     “크흐흐….”

     나리아의 말에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비릿하게 웃는다.

     

     “그렇지. 꿈에서는 그 카르멘 왕비께서 왕비가 아닌, 지브롤터 백작부인이었지.”

     카르멘 왕비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조롱에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다.

     옆에 있던 윈체스터 대공이 다급하게 카르멘 왕비의 어깨를 감싸며 마력을 흘리지만, 카르멘 왕비의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건, 분명 꿈이 맞아. 누군가에게는 바라마지 않는 이상향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지옥같은 세상일 수 있겠지.”

     전자인 경우, 거짓된 황금을 먹어치우며 여전히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환상에 빠져있다.

     후자의 경우, 꿈에서 깨어나 이 약혼식에 직접 맨정신으로 찾아온것처럼 다들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무능왕은 옆으로 손을 뻗었다.

     “왜 지금도 그런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무능왕의 손에서 흘러내린 황금이 거대한 지팡이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황금의 지팡이 끝에는 드래곤이 지팡이를 휘감는 듯한 장식이 형성되었다.

     “약혼이라. 그래. 행복한 꿈이로구나.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이라는 여자를 보면 눈이 돌아간다는 걸 확인한 이상, ‘다음’은 다를 것이다.”

     “무슨….”

     “뭐, 이쪽의 이야기다. 어차피 너희들은 평생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건 모두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약혼식이라고 했지? 그렇다고 한다면, 축포가 빠져서는 안 되는 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빈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화려하게, 축하해주마.”

     손가락을 튕겼다.

     지팡이 끝에 장식된 드래곤의 눈동자가 반짝인 순간.

     파ㅡㅡㅡ앙.

     폭발이 일어났다.

     황금으로 빛나는 폭발이.

     “……어?”

     주룩.

     “…….”

     카르멘 왕비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