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296

       정신없이 일하는 사이에 하루가 훌쩍 지났다.

       

       오늘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안부를 주고받은 것은 물론이고, 현장 사람들과 합을 맞추어 보기도 했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핫라인을 설치한 건 덤이다.

       

       더불어 레너윌 하스펠트 공작과 만나기도 했다.

       

       공식 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말이다.

       

       “보증, 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 봤을때만 해도 꼰대 같던 이미지였는데.

       

       레너윌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인재 보는 눈 하나는 탁월하지.”

       

       틸레트 시절 클라이스가 이 사람 반이라도 닮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은 잠깐만 하고 말았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까.

       

       “마왕군 간부의 정체가 눈 노란 인간이었다니….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심하고 말았네.”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만약 정말로 이계에서 온 괴물이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나?”

       “영명하십니다.”

       

       적당히 웃어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레너윌 공작은 침음을 흘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고맙네. 제국을 위해 그런 조약에 그런 내용까지 넣어 주고.”

       “뭘요.”

       “아니네, 백 번 고마워 해도 모자랄 판국이야.”

       

       이 공작님은 국제 정치를 아는 사람이다. 카우렐리아가 단순히 선심으로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자네가 그리 나오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끝나더라도 암울한 미래뿐이었겠지.”

       

       레너윌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국이 멸망하여 대륙 중부가 텅 비어버린 지금, 마왕군이 궤멸하고 나면 그 땅의 주인은 누가 되는가.

       

       손실을 메꾸고자 엘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겠지. 그렇게 되면 금안족이 설 자리는 없다.

       

       “국제 정세는 또 어디서 배웠나?”

       “교양 시간에 겉핥기 수준으로요.”

       “보통 잔머리가 아닐세.”

       “마왕군 최고 간부였던 사람을 과소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공작님.”

       

       나는 후후, 하고 웃으며 대화를 일단락했다.

       

       이러니까 흑막이 된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참. 저녁에 클라이스와 둘이서 술자리를 가진다고 했나?”

       “소문이 빠르네요. 그렇습니다.”

       

       오늘 한 이야기인데, 벌써 알고 계시다.

       

       “둘이 관계가 원만하게 풀렸으면 좋겠군.”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레너윌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얼굴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술주정이 심하네. 맥주를 아주 조금만 마셔도 금세 사람이 바뀌지.”

       

       그가 우려하는 건 클라이스의 주량이었다.

       

       나도 노예였을 시절 헤를라인 선생님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클라이스 하스펠트라는 사람은 술에 아주 취약하다는 걸.

       

       그런데 직접 술잔을 부딪혀 볼 시간이 있었어야지.

       

       “보고 놀라지나 말게.”

       “그렇게 심각한가요?”

       “그, 저…. 하아. 아니다. 사람의 언어로 형용할 수가 없어.”

       

       대체 뭐가 얼마나 약하길래.

       

       블렌딩 되는 것처럼 휙휙 변하는 공작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구미가 당긴다. 오늘 저녁 식사에는 독한 위스키를 곁들여야겠다.

       

       그렇게 공작님과의 대화가 끝나고 난 뒤, 잠깐의 시간을 빌려 숙소로 돌아왔다.

       

       아카데미 근처에 새로 마련한 집이었다. 마도부장관이 된 기념으로 나라에서 헌정해 준 주택가.

       

       처음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 헛간에서 살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도 이제 부르주아가 된 걸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빰빠라빰빰!”

       

       뭐야.

       

       현관에 들어서니 웬 여우 하나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쳐나왔다.

       

       “꼬맹이, 네가 왜 여기 있어?”

       “꼬맹이? 꼬맹이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싫은 소리할 거야?”

       

       난데없이 나타난 프레이가 팔짱을 끼며 흥칫뿡을 시전한다.

       

       얼척이 없었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는데, 새로 마련한 보금자리가 이런 여우 꼬맹이에게 강탈당할 줄이야.

       

       “여기 문 누가 열어줬어?”

       “로테가.”

       

       그때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쪽에서 난 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습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은은한 라벤더 향과 바디워시 냄새가 섞인 향이었다.

       

       “어서 와, 에테르.”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는 물기가 뚝뚝 떨어졌고, 이지를 담은 총명한 눈동자는 여과없이 나를 직시한다.

       

       선(善)이라는 존재를 의인화해 놓은 듯한 모습.

       

       로테 살리에르. 내가 이 세상을 미워하지 않기로 한 원인이 눈앞에 있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직 다크서클이 그대로 남아 있잖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겠다니까.”

       

       눈가에 다크서클이 지거나 한 건 피곤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한부 조건.

       

       눈앞의 소녀를 살린 대가였다. 지금도 조금씩 몸이 무너지는 게 느껴진다.

       

       “혹시 그걸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그거? 그게 뭔데.”

       “원자폭탄. 수많은 엘프가 죽었잖아.”

       

       로테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

       “네가 한 일이 아니야. 마왕이 한 일이지. 그러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나는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어두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약속 있어서 다시 나가봐야 하거든.”

       “뭐? 안 돼!”

       

       프레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오늘 셋이서 같이 마시려고 여기 온 거란 말이야!”

       “내가 약속 잡았었나?”

       “아니? 원래 이런 건 서프라이즈로 해야 재미있지!”

       

       그러면서 침대 위로 폴짝 올라가는 꼬맹이.

       

       최신식 매트릭스에 다이빙한 꼬맹이가 이불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댔다.

       

       “술, 술, 수울!!”

       

       그러면서 뒹굴뒹굴 굴러대는데, 하얀 극세사 이불이 돌돌 말리며 순식간에 여우 누드김밥이 완성되었다.

       

       “술 같이 마시자!”

       “내려와, 꼬맹이.”

       “술 마셔줄 때까지 안 내려올 거야!”

       

       트레이드 마크인 여우귀와 꼬리가 파닥파닥 움직인다. 아주 잠깐이지만 침대 위로 개털 날리는 것이 보였다.

       

       “침대 청소는 네가 해라.”

       “같이 술 마셔 주면 할게!”

       

       내가 못 살아.

       

       결국 로테 선생님께서 긴급처방으로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그것을 꼴깍꼴깍 마셔댄 프레이가 잠깐 누그러졌다.

       

       “얘 갑자기 왜 이래?”

       “그…. 일단 개과잖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무척 반가워 하는 거야.”

       “그런가?”

       

       생각해 보니 레니냐의 집에 틀어박힌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솔직히, 그동안 나도 많이 서운했어.”

       “어, 음….”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 안 가줬으면 하는데.”

       

       안 될까? 하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로테.

       

       솔직히 말해서 거절할 수가 없다.

       

       이 둘이 없었더라면 나는 인간의 편에 서지 않았을 터. 그만큼 로테와 프레이는 내 인생에서 뜻깊은 우정을 준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하루 동안 같이 있어달라는 부탁도 거절한다면…….

       

       “미안, 약속이 있다고 했지?”

       

       로테는 짐짓 아쉬운 듯 눈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버림 받은 강아지와도 같았다.

       

       이건 이것대로 죄책감이 든다. 심지어 로테 자신은 의식하지 않고 한 말이라서 나무라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클라이스와 먼저 한 약속을 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약속을 먼저 잡은 건 나니까.

       

       이렇게 된 이상 중간책을 마련해야겠다.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내가 말을 꺼냈다.

       

       “알았어. 오늘은 여기 있을게.”

       “정말? 고마워.”

       

       로테는 내 손을 꼭 붙잡고는 안주와 술병들을 늘어놓았다. 그중 하나는 살리에르 저택에서 먹었던 와인이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말해 봐.”

       “그…. 경우에 따라 조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괜찮아?”

       “여기 같이만 있어 준다면야, 나는 상관없어.”

       “좋아.”

       

       나는 크게 심호흡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은 로테는 미묘한 표정이 되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래도 계산기를 두들기는 모양이었다.

       

       어느덧 생각을 마친 로테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알았어. 그러면 나랑 프레이는 방해되지 않도록 저기 장롱에 들어가 있을게.”

       

       뭔가 위험한 발언이 튀어 나왔는데.

       

       

       **

       

       

       “하아…….”

       

       결국 저지르고 말았다.

       

       전(前) 주인이자, 전전(前前) 노예였던 소녀와 동등한 입장에서 술자리를 가지게 되다니.

       

       

       클라이스의 얼마 없는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술이었다. 술만 마시면 곧바로 필름이 끊겨버리고 만다.

       

       ‘에테르는 술을 잘 마실까요…?’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건 안다.

       

       클라이스의 술주정은 가족이 알고, 헤를라인을 위시한 동료 교수들이 알고, 심지어 전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다.

       

       지금 와서 숨기려고 해봤자 소용없겠지.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만한 악연을 가진 이와 술미팅을 벌인다는 게 익숙하지 않게 느껴질 뿐이다.

       

       ‘못 마셔야 할 텐데요.’

       

       필름이 끊기더라도 같이 끊겨야 덜 쪽팔릴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한 클라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심호흡을 반복하며 에테르가 알려준 장소까지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약속 장소를 바꾼다고 하길래 알았다고 답했다. 그렇게 수십분 전 새로 전달받은 위치가 바로 눈앞에 놓인 건물이었다.

       

       “여긴….”

       

       틀림없다.

       

       일리야드 아카데미 근교의 주택가. 마도부장관이 된 이후로 에테르가 터를 잡은 곳이었다.

       

       즉, 에테르는 자기 집에서 맞술을 하자는 제안을 꺼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사 주려고 했는데요….’

       

       꽈악.

       

       클라이스는 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거세게 쥐었다.

       

       이렇게 되면 ‘옛 학생에게 술을 사주는 성숙하고 모법적인 어른’이라는 최소한의 이미지마저 날아가고 마는데.

       

       최후의 방어기제까지 깡그리 증발한 클라이스의 눈빛에 이채가 사라졌다.

       

       ‘……아뇨, 오히려 잘 됐어요.’

       

       돈이 굳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에테르와 둘이서만 마시게 되는 것 아닌가.

       

       평소 술자리에서 안전핀 역할을 하는 헤를라인도 없는 상황이다.

       

       만일 에테르와 자신이 동시에 필름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누구 하나 붙잡고 키스라도 갈길지 모르는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사적인 공간에서 취하는 게 낫다.

       

       ‘당신도 술이 약한가 보네요.’

       

       동시에 클라이스는 날선 추리를 선보였다.

       

       에테르가 자기 집에서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주량도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평소 쿨하고 밋밋하던 얼굴이 흐트러진다고 생각해 봐라. 제아무리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건 못 견딘다.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지금 에테르는 마도부장관. 아주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식당에서 술주정을 부렸다간 탄핵당할지도 모른다.

       

       ‘좋아요, 부딪혀 보자고요.’

       

       모든 사고를 마친 클라이스는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