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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96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이제순은 앞서 만든 자그마한 흔적에 의지해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그렸다.

         

       솔직히 말해 그것이 제대로 된 반듯한 원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으니까.

         

       제대로 반듯하게 잰 뒤 움직인 것도 아니고, 초능력이라도 있어서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가 엄청난 재능이 있어서 측량 없이도 반듯한 원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제순은 자신이 그린 원이 찌그러진 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찌그러진 원도 원은 원이다.

         

       ‘그래. 어쨌든 원이면 된 거 아니겠어?’

         

       주의할 것은 원이 아닌 다른 도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것은 잡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그려놓은 원을 따라서 계속해서 걸어가는 방법뿐이다.

         

       이제순은 마음을 다잡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몇 바퀴를 돈 것일까?

         

       문득 그는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오감이 확장되는 느낌과 함께 어둠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한 치 앞을 보기 힘들었던 어둠임에도 저 멀리에서 윤곽이 꾸물꾸물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느껴졌고, 코는 바람에 실려 오는 실낱같은 고약한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귀는 아까부터 들리는 바람이 나무 사이에 흐르며 내는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에 흙을 밟는 듯한 소리가 섞여 있다고 말하고 있었고, 바싹 선 솜털은 무언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듯했다.

         

       시선이.

         

       시선이 느껴진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확장된 오감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어서 당장, 이 허튼짓을 멈추고 도망가거나, 경계 태세를 갖추고 그것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순은 본능의 속삭임에 따르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릴 뿐이었다.

         

       『 원을 그리며 계속 돌다 보면 인기척이 느껴질 것이다. 』

       『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의식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 』

       『 하지만 절대로 원을 그리며 걷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속도의 변화는 상관이 없으나, 절대로 멈추어 서거나 원 밖으로 나가거나, 원 외의 다른 도형을 그려서는 안 된다. 』

       『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걸으라. 』

       『 인기척은 계속해서 가까워질 것이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는 중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야 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제순은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주는 섬찟함 때문에 몸을 떨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주의사항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의식이 진행되는 중이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느끼는 공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끔찍한 결말이 다가올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뿐이다.

         

       저벅.

       저벅.

         

       이제순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그가 걸음을 옮기는 것에 맞추듯, 인기척 역시 그에게 다가왔다.

         

       어둠 저 건너편에서 윤곽만 보이던 것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발소리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듯 풀숲 스치는 소리와 흙에 발을 디디는 소리, 발을 질질 끌면서 내는 소리를 바람에 실어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짓이겨지는 풀의 냄새와 튀어 나가는 흙이 흩날리는 냄새,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함께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순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살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다.

         

       눈동자도 보이지 않고, 눈동자가 만드는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어렴풋한 윤곽뿐.

         

       그것의 시선은 필요 이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인기척은 계속해서 가까워질 것이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는 중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야 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그럼에도 그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수상한 의식을 계속 이어나갔다.

       귀신의 숨결같은 차가운 밤공기가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식에 실패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수첩을 대신할 물건을 얻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그리고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에서 벗어나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지는 보답받았다.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멈춘 것이다.

         

       그것은 이제순을 관찰하는 것을 멈추고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아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순에 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인지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이제순을 힐끔힐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정말 시선에 몸이 뚫리지 않을까 싶었던 아까와 비교한다면 저것은 무관심이나 다름이 없었다.

         

       ‘돼, 됐다.’

         

       이제순은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에게 관심을 거두자 크게 기뻐했다.

         

       큰 산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인기척을 무시하고 계속 걷다 보면 그것이 멈추게 될 것이다. 』

       『 그렇게 된다면 의식은 반쯤 성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

         

       그는 종이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바닥에 놓인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걸어가면서도 쉽게 집을 수 있도록 놓았기에 집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이제 준비해둔 술을 마시도록 하라. 』

       『 술을 마시는 주기는 어떻든 상관이 없다. 30초 간격으로 마시던 1분 간격으로 마시던, 특정 구역을 통과할 때 마시건 모든 것이 자유다. 』

       『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

       『 첫 번째는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 』

       『 두 번째는 한 바퀴에 술 한 병을 모두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

         

       이제순은 종이에 적혀 있던 것을 떠올리며 천천히 자기 손에 들린 술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플라스틱병에 담겨있는 술.

       라벨에는 막걸리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도수는 상관없다고 했지.’

         

       마실 술은 그 어떤 종류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보드카도, 와인도, 럼주도, 소주도.

       어쨌든, 술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제순은 어떤 술을 마실까 한참을 고민했다.

         

       어떤 술을 마셔야 의식에 방해가 되지 않고, 비싼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결정한 것이 바로 막걸리였다.

         

       도수가 그리 높지도 않고, 값도 쌌으니까.

         

       맥주도 고민해보기는 했지만….

         

       맥주를 마시면 이뇨 작용 때문에 소변이 마려워질 것이고,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소변을 누기 힘들 것이니 무작정 참거나 걸어가면서 싸지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맥주를 후보에서 치워버렸다.

         

       아무리 의식에는 영향이 없다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짐승도 아니고, 걸어 다니면서 오줌을 싸지르는 것은 거부감이 있었다.

         

       그리고 막걸리를 고른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막걸리의 별명이 ‘앉은뱅이 술’이라는 것이다.

         

       『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때뿐이다. 그전까지는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

         

       막걸리는 멀쩡한 듯했다가 갑자기 취기가 몰려오면서 사람을 훅 보내곤 한다.

       그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막걸리는 이 의식에 참 걸맞은 술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뭐….

         

       ‘여러 가지 맛도 있고.’

         

       요새 막걸리는 여러 가지를 첨가하며 다변화를 꾀하는 중이다.

         

       복분자, 호두, 잣, 민트초코, 배, 밤, 트로피컬….

         

       그야말로 온갖 맛을 통해 개성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는 이제순에게 참 기꺼운 것이었다.

         

       한 가지 맛만 마시며 도는 것보다는, 그래도 혀가 즐거운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래봤자 막걸리는 막걸리지만 말이야.’

         

       이제순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막걸리를 몇 번 흔들고는 뚜껑을 딴 뒤 원 안쪽에 집어 던졌다. 그리곤 병을 들고 조금씩 마시면서 앞으로 걸었다.

         

       생각 같아서는 호쾌하게 한 번에 마시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원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조금씩 마시면서 원을 그리며 걸어가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이다.’

         

       이제순은 여기까지 와서 의식에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기에 이제순은 입으로는 연신 막걸리를 들이켜면서도 눈은 똑바로 자신이 걸어온 자리를 바라보았고, 몸 역시 점차 몰려오는 취기에 조금씩 휘청이면서도 절대 자신이 걷는 선 밖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때로는 발목이 꺾이거나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 병쯤 비웠을까?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랩.

       -탭.

       -투.

         

       그 소리는 기묘한 것이었다.

         

       노래를 닮아 있었지만, 악기로 연주한 것은 아니었고, 목소리를 내어서 노래했다기에는 입술을 마구잡이로 놀리며 내는 소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는 그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의 시야가 점차 뿌옇게 변하고 머리가 마비되면 마비될수록 선명하게 들렸다.

         

       정신을 잃은 그를 홀리려고 하는 듯 말이다.

         

       그리고 이윽고 그 소리는 완전하게 변해 그의 귀에 꽂혔다.

         

       [ 립-탭, 팁-랩! 랩팁탭! ]

       [ 팁탭, 팁, 립탭! 티거택-투! ]

         

       그 소리는 귀에 닿아 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뇌에 들어갔다가 귀로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소리는 그의 머리를 진동시키며 몸에 울려 퍼졌고,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소음을 내면서도 그의 머리를 깨질 듯이 울리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콘서트장에서 듣는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흥분만 일깨울 뿐이었다.

         

       [ 팁탭, 틱택투! 틱-택-투! ]

         

       그리고 그 소리를 시작으로 소음에 가사가 붙기 시작했다.

         

       그 가사는 한국어도 외국어도 아닌….

       기묘한 소음에 불과한, 하지만 그런데도 그 뜻이 또렷하게 인지되는 기묘한 가사였다.

         

       [ 내 모자에 메뚜기가 앉는다, 내 모자에 나방이 날아간다! ]

       [ 뾰족한 콧날에 외알 안경! ]

       [ 빨간 안경테에 나방 가루 살포시 앉았다가 사라진다! ]

       [ 값비싼 은 버클에 귀한 시계! 무릎까지 내려오는 바지에 기다란 부츠! ]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노래는 이제순에게 묻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 팁랩, 랩팁탭! 틱택투-! 탭탭, 티커-택-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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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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